[기획연재4]생각의 무능과 부끄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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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 생각하는 존재

악행을 저지르고도 뻔뻔한 사람을 봤을 때, 우리는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냐, 사람다워야 사람이지.’라는 말을 한다. 인두겁을 쓰고 있을 뿐 사람답지 못하다는 비난이다. 더심하게는 ‘짐승만도 못한 놈’이라는 표현도 사용한다. 그렇다면 사람다운 사람이란 어떤 사람일까? 다른 동물과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서양 근대철학의 아버지인 데카르트(1596~1650)는 ‘사유(思惟)’에서 그 기준을 찾았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말을 통해 개인의사유 능력을 강조하면서 합리적이고 자율적인 판단 주체로서의 개인이 서양 사상사에 자리매김할 수 있게 했다. 수학자이며 철학자이었던 파스칼(1623~1662) 역시 인간이란 사유하는 능력 외에 아무 힘도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 했다.

* 생각의 무능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고 다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생각은 할 수 있으나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없다면, 그런 사람은 진정한 의미의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문제가 터지면 책임을 져야 할 사람들은 “시켜서 한 일이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자신에게 책임이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하는 말들이다. 이런 사람들을 비난할 때 속된 말로 “머리가 장식품인가?”라고 묻는다.
이러한 무책임의 전형을 보여준 사건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학살에 연루된 아돌프 아이히만에 대한 재판이다. 그는 독일 나치스의 친위대 중령으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대량 학살을 담당한 책임자이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 아르헨티나로 도망가서 숨어 살다가 1960년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다.

아이히만은 재판 과정에서 자신은 당시 독일의 법과 질서를 따랐고 상부의 명령을 충실하게 이행하였을 뿐이므로 유죄 판결은 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유대인을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정책을 만들었음에도 자신은 유대인 학살에 대한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 유대인을 죽이는 일에 나는 아무런 관계도 없다. 나는 유대인이나 비유대인을 결코 죽인적이 없다. 이 문제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어떠한 인간도 죽인 적이 없다. 나는 유대인이든 비유대인이든 죽이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없다.1)”

더 나아가 아이히만은 월급을 받으면서 자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않았다면 오히려 죄책감에 시달렸을 것이라 말한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은 무죄인가? 이 재판을 지켜봤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아이히만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 그의 말하는 데 무능력함은 그의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 즉 타인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데 무능력함과 매우 깊이 연관되어 있음이 점점 더 분명해진다. 그와는 어떠한 소통도 가능하지 않았다.”2)
한나 아렌트는 “생각의 무능은 말의 무능을 낳고, 말의 무능은 행동의 무능을 낳는다.”

고 주장했다. 아렌트는 불의를 보고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 그 자체가 악이 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아이히만은 유죄라고 주장했다. 아렌트의 판단은 파스칼의 생각과 맥을 같이 한다고 볼 수 있다.

“ 나는 손, 발, 머리가 없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사유 없는 인간은 생각할 수 없다. 그는 돌이거나 짐승일 것이다. 내가 나의 존엄성을 찾아야 하는 것은 공간에서가 아니라 나의 사유의 규제에서이다. … 분명히 인간은 생각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것이 그의 모든 존엄성이고 모든 가치이다. 그의 모든 의무는 올바르게 생각하는 데 있다.” 3)

사유하는 능력을 활용하여 정확하고 올바른 판단을 해야 하며, 사유하는 능력이 있기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 사악하지 않은 마음

모든 사람은 사유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이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이를 잘못 사용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약 생각이 있으나 그 출발점이 사악하면, 생각하지 않는 경우보다 더 큰 문제를 야기한다. 영리한 사람이 범죄를 하면 그 파급 효과는 그렇지 못한 사람이 저지른 것보다 더 크고 더 심각하다. 공자는 이러한 일을 경계하며 ‘생각’과 ‘올바름’을 ‘사무사(思無邪)’라는 말로 묶었다.

“시 300편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생각에 사특함이 없는 것이다.”

詩三百 一言以蔽之 曰思無邪 – 『논어』 「위정편」 –

  1452년 어린 임금 단종이 ‘사무사’의 뜻을 물었을 때 박팽년은 “생각에 사사로움이 없는 바른 마음을 일컫는 것입니다. 임금의 마음이 바르면 모든 사물에서 바름을 얻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경우, 생각을 하되 사사로운 이익을 앞세운 생각이어서는 안 된다는 해석이다. 사특함은 사사로운 이익의 추구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공자는 훌륭한 지도자인 군자(君子)는 ‘올바름’을 추구하지만, 지도자인 척하는 소인(小人)은 이익을 추구한다고 말하며 이를 경계했다.

* 부끄러워하는 마음

‘사무사’의 정신에서 올바름을 추구하려는 태도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마음과 항상 같이 다닌다. 부끄러움은 과거에 대한 반성이지만, 새로운 출발을 위한 각오이기도 하다.
항상 올바를 수 없기에 부끄러움이 존재하고, 부끄러움이 있기에 올바름을 추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잘못을 하고도 부끄러움이 없는 사람들을 비난하며 “염치(廉恥)가 없다.”, “후안무치(厚顔無恥)하다.”, “철면피(鐵面皮)한 인간이다.”라는 말을 한다.
맹자는 인간의 선한 본성을 네 가지로 규정했다. 타인의 어려움을 이해하고 공감해주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자신의 잘못을 부끄러워하고 타인의 잘못을 용납하지 않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양보할 줄 아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아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다. 그리고 이 네 가지가 실현되었을 때 ‘인의예지(仁義禮智)’가 완성된다고 보았다. 맹자는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올바름[義]을 동전의 양면으로 보면서 ‘부끄러움’의 필요성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 부끄러워할 일이 없게 된다.(人不可以無恥 無恥之恥 無恥矣)”

“부끄러워하는 마음이란 사람에게 있어서 중대한 것이다. 임기응변을 교묘히 잘하는 자는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쓸 데가 없다. 남들만 못한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사람 노릇을 하겠는가?(恥之於人大矣 爲機變之巧者 無所用恥焉 不恥不若人 何若人有)”4)

거짓말을 할 때 스스로 느끼는 내면의 부끄러움은 인간이 가져야 할 본연의 자세이다. 그리고 이를 인정하고 시정하려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만약 내면의 부끄러움을 잃으면, 몸은 살아 있으되 정신과 영혼이 꺼진 인두겁을 쓴 이상한 존재가 남을 뿐이다 .
부끄러움은 나의 정체성을 찾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사람답기 위해서는 생각할 줄 알아야 하고, 무엇이 올바른 것인지 판단할 줄 알아야 하며, 부끄러워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우리 모두가 무엇이 올바름인지 항상 고민하고 이를 거울삼아 자신을 비추어 부끄러움을 느끼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윤동주의 ‘서시(序詩)’로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파주, 한길사, 2015), p.74.
2) 한나 아렌트, 김선욱 역,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파주, 한길사, 2015), p.106.
3) 파스칼, 이환 역, 『팡세』 (서울, 민음사, 2011), pp.115-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