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20 여름호 (239호)

물려받은 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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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민희 (서울방학초등학교, 교사)

“퇴근하니?”
“아니, 조금 있다가요. 왜요?”
“응, 장조림 해놨으니까 들러서 가져가라고.”
엄마의 전화였다.
퇴근길 친정집 근처에서 반찬통을 건네받았다. 돼지 고기 장조림, 콩나물 무침, 호박 나물, 세 가지였다.
“나 그저께 장조림 했는데…. 그냥 두고 엄마 드셔.”
“아니야, 많이 했어. 지난번에 준 반찬통 그냥 돌려주 기 뭐 해서. 가져 가서 먹어.”
집에 와서 저녁을 차리는데 냉장고 속에 장조림이 담긴 그릇이 들어있다. 아침 먹다 남은 것에 랩을 씌워 넣어둔 모양이었다. 그릇 한편에 엄마가 주신 장조림을 덜어 놓았다. 장조림이 하얗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남편이 밥을 먹다 말고 물었다.
“이거 오늘 가지고 온 거지?”
“응, 왜?”
“아니, 여보가 한 게 더 맛있어서. 이거 우리 집 장조림 국물에 담가 놓으면 나아지려나?”
“뭐. 어느 정도는 국물이 배겠지.”
분명 너무 싱거워서 하는 말일 게다. 베이지색 장조림이라니. 장조림은 무엇보다 짭조름한 맛으로 먹는 게 아닌가. 한 그릇에 놓인 엄마의 베이지색 장조림과 내 고동색 장조림이 묘하게 대비됐다.
엄마의 음식 솜씨는 단연 최고였다. 학창 시절 내 도시락 반찬은 소시지, 햄 없이도 인기가 많았다. 그렇다고 대단한 것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들기름에 달달 볶은 김치, 참기름에 고소하게 무친 시금치 정도가 있을 뿐. 그럼에도 유독 내 도시락 반찬에는 함께 먹는 친구들의 젓가락이 바쁘게 와 닿았다.

남편이 처음으로 우리 집에 인사를 왔던 날이었다. 돌아가던 길에 그는 연신 말했다. “아, 배불러. 너무 많이 먹었어. 그만 먹으려고 했는데, 맛있어서 멈출 수가 있어야지.” 결혼 후에도 친정에서 식사할 일이 생기면 남편은 반기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으레 흡족한 미소와 함께 과식했다는 말을 날렸다.
그러니 단언컨대 처음부터 그의 말은 진심이었으리라.
지금처럼 외식할 데가 많지 않던 시절이었다. 더욱이 외벌이로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는 그럴 만 한 돈도 없었다. 매일의 끼니부터 간식, 일 년에 한 번쯤은 꼭 치르게 되는 아빠 친구나 친지들의 모임 상까지 엄마는 뚝딱하고 차려내셨다. 매운탕, 불고기, 잡채, 꼬지 산적, 해파리냉채, 삼색 나물, 그리고 사라다.(그 시절 그것은 사라다다. 분명 샐러드와는 다르다.) 아, 맞다. 때마침 묵은 김장 김치에 물릴 때쯤이면 배추 겉절이나 열무김치, 깍두기처럼 철에 맞는 김치까지 담그셨다. 익는데 필요한 시간까지 미리 계산해서 담근 김치가 딱 알맞게 익어 상에 오르면 그야 말로 임금님 수라상이 부럽지 않았다.

나는 요즘도 가끔씩 머릿속에 그 음식들을 떠올린다.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입 속에 금세 침이 고일 정도로 기억은 뚜렷하다. 매콤하고 시원한 매운탕 국물, 낚시하듯 미더덕을 골라 입에 넣고 혹여 입천장이 델까 어금니로 살살 깨물던 기억. 거기서 쏟아져 나오던 특유의 향과 물, 그리고 오독오독한 식감. 엄마가 직접 양념한 불고기는 짜지도 싱겁지도 않게 딱 알맞은 간에 잘 재워졌고, 질기지 않고 부드러워 먹기 좋았다. 잡채는 여러 재료를 각각 볶아 버무렸어도 느끼하지 않고 고소했다. 엄마 옆에 붙어 앉아 완성되기를 기다려 한 접시 받아 들면 호로록 호로록 금방 한 그릇을 뚝딱 먹어치웠다. 고사리 손을 보태 만든 꼬지산적에는 좋아하는 햄, 맛살, 단무지가 달걀에 노릇하게 부쳐져 있었으니 그 맛은 말할 것도 없다. 그저 고소한 기름 냄새에 홀려 부엌을 들락거리며 하나씩 집어 먹기에 바빴다. 여기에 잘 익은 새 김치와 해파리 냉채는 아삭아삭 개운한 맛과 침샘을 자극하는 새콤달콤함으로 오랜만에 기름진 음식으로 놀란 혀와 위를 달래주었다. 그 덕분에 계속해서 양껏 식사를 할 수 있던 건 아니었는지.

큰 아이 세 살 때 그 해 추석 상에 오른 돼지갈비는 또 어땠나. 달콤 짭짤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었다. 음식은 맛있고 아이는 잘 먹으니 아이의 허벅지는 단 삼일만에 눈에 띄게 살이 올랐다. 얼마나 맛있었으면 제 엄마가 먹은 마지막 고깃덩어리가 아쉬워 억지로 엄마 입을 벌리려 했을까. 그 날 아이는 내 입 안에 들어간 고기를 꺼내 먹겠다며 울며불며 입을 벌렸고, 나는 결국 씹다가만 고기를 뺏기고 말았다. 아이는 울고, 나는 황당하고, 다른 식구들은 모두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랬던 엄마의 음식이 이제는 어디에도 없다. 엄마의 매운탕을 먹어본 지가 언제였던가? 지난겨울 오랜만에 끓여주셨던 빨간 국물 동태탕은 예전 그 맛이 아니었다. 싱거웠다. 아주 많이. 밍밍할 정도로. 남편은 재료 본연의 건강한 맛이라고 했지만 나는 알았다. 맛이 변했음을. 그 맛은 사라졌음을.
나이가 들면 음식이 짜지기 마련이라는데, 엄마의 음식은 반대가 되었다. 아마 아빠의 투병 탓일 게다. 암 환자, 그것도 말기 위암 환자를 위한 음식은 싱거워야 했다. 그리고 갈수록 음식을 입에 대지 못 하는 아빠를 위해 엄마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할 일은 요리가 아니었다. 자연히 엄마의 메뉴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엄마의 가게는 썰렁해졌다. 맛있는 음식에 넉넉한 주인 인심까지 더해져 먹는 이의 마음까지 살찌우던 가게는 이제 텅 비었다. 개점휴업 중인 가게에는 음식을 준비하는 분주함도 군침을 돌게 하는 냄새도 없다. 그저 체중이 10킬로 이상 줄어들어 몰라보게 야윈 주인만 있을 뿐.

“뭐로 장조림 했니?”
“소고기.”
“얼마나 했어?”
“고기가 좀 적어서 메추리알이랑 달걀도 넣었지.”
“그래? 엄마는 돼지고기만 넣고 했는데. 맛있겠네.”
아무래도 이제 가게는 2대 사장님 손으로 넘어온 듯하다. 하긴 이제 엄마도 예순여섯, 정년을 훌쩍 넘 긴 나이다. 은퇴를 한다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엄마는 열흘 전 내가 가져다 드린 카레와 마파두부가 맛 있었다고 자꾸 말씀하셨다. 며칠 기운이 없어 꼼짝 못 했는데 그거 먹고 기운이 났다고.
1대 사장님의 손맛을 따라갈 수 있을지 아직은 자신이 없다. 하나 기술은 좀 부족해도 정성과 노력을 배로 담아내면 차차 흉내나마 낼 수 있지 않을까. 이제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음식을 그리워하지 않기로 했다. 가게가 2대 사장님에게로 넘어왔으니 내 손으로 직접 해볼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