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20 여름호 (239호)

새로운 출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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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문구 (영등포공업고등학교, 교사)

일상에서 출근은 설렘보다 지루함을 너머 분주함으로 하루를 시작하기에 여유를 갖기란 쉽지 않다. 승용 차로 출근할 때는 20분 남짓 음악을 듣기도 하고, 멍 때리며 앞만 보고 운전하다가 주차장에 주차 되어있는 차를 보고서야 끊긴 기억을 이어 본다. 올해 초 우연히 뒷산에 올라서 산책 겸 운동을 하다가 이사 온 집근처가 동작동 국립현충원으로 이어져있고 그 출입문이 뒷산과 연결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 안쪽으로 맑고 상쾌한 나무와 새들이 어우러져 시 · 청 · 후각을 깨끗하게 열어주었다. 묘역 사이사이에 가로세로로 뻗은 길을 걷는 정문 앞 동작역에서 전철로 출근하는 일상을 선택했다. 그 후로 일상의 변화는 크고 놀랍게 다가왔고 6개월이 지나는 지금까지 그 기쁨을 게으름에 뺏기지 않고 있다.

언덕 맨 위에서 사당 출입문을 들어서면 제일 먼저 숲과 나무들이 특유의 향으로 반긴다. 가파른 언덕을 조심스레 내려가면 현충원 가장 안쪽 56번 묘역을 먼저 지난다. 1970~80년대 순국하신 영령들이 질서 있게 도열한 묘비를 좌측으로 바라보면서 내려간다. 그 잔디 위에서 까치들이 수다 떨고 청설모가 산책하며 꿩, 비둘기가 뛰어논다. 또, 그분들이 목숨 바쳐 지켜낸 대지는 매일 그때와 같은 태양, 같은 바람이 지나지만, 평화를 위해 잠든 주검들이 일상에 지치고 삶에 젖어 있는 우리들에겐 잊힌 기억 조각이 되고 있다. 그 조각을 매일 마주하며 하나하나를 다시 들춰 보게 된다. 우리 역사에서 누군가는 나라를 지키고자 전투에서 목숨을 바쳐서 귀한 생명 한 줌이 묘비 아래 묻혀있다. 이름 석 자 새겨놓고….

현충원의 묘역은 1번부터 56번까지 나눠져 있다. 중간 중간에 특정 전투에 희생된 분들을 기리는 추념비 와 무명용사의 비, 순국열사비와 국가 원수 묘역, 애국지사, 국가유공자 묘역 등 모여져 있다. 그분들은 묘역과 묘비 사이사이에서 매일매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것 같다. 그곳에서 엿듣는 까치도, 청설모도 시끄럽게 하고 있지만 그들에겐 심심치 않은 동무들인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같은 얘기를 60~70년째 얘기 해도 지겹지 않게 들어주는 것 같다. 하늘과 땅, 나무와 새, 동물들이 주검들과 어우러져 오늘과 내일을 지나며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다. 상쾌한 공기를 들이 마시면서 새들의 노래를 듣고 아침햇살 맞으며 무궁화나무들을 지나고 떨어진 솔방울을 차면서 한걸음, 한걸음 걷다 보니 누워계신 주검들이 어느 때는 앉아 계시고 어느 때는 서 계시기도 한다. 비가 올 때면 우산 들고 손도 흔들어주고 출근길을 격려해주신다. 햇살 가득한 날에는 그림자로, 흐린 날에는 예쁜 꽃과 바람으로, 비 오는 날에는 상큼한 공기와 맑은 비로 온 맘과 생각을 비춰주고 막아주고 씻겨준다. 아침마다 보는 묘비는 색깔과 모양이 그대로라고 생각했지만 조금씩 달라보이는 것을 발견하면 움찔 놀라기도 했다.

누군가가 다녀간 것이다. 유족들, 친지들, 봉사단체들이 묘비를 닦고 꽃을 다시 놓아드리는 것 같다. 가끔 현충원 봉사자를 찾는다는 단체 SNS 메시지를 통해 유추해보니 비석을 깨끗이 닦는 봉사도 있었다. 가까이서 묘비를 보니 까치와 이름 모를 산새들이 응가를 해놓아 하얗거나 누런 빛깔을 띄는 묘비도 있었다. 어느 때는 비 맞은 묘비가 젖어 내린 모습이 우는 듯해서 마음 한편이 싸늘해지는 때도 있었다. 누군가의 아들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던 분들을 현충일이 아닌 매일매일 만나면서 인사하고 대화해보니 조금씩 그분들의 마음이 느껴지는 것을 발견했다. 벚꽃이 흩날리는 늦은 봄엔 “평화로운 세상에 잘 사는구나.”라며 소리 없는 미소를 보내주시고, 장미꽃 붉게 피어나는 여름엔 “꼭 잊지 말아라.”라며 비장하게 쳐다보신 다. 곳곳에 제일 많이 피어나는 무궁화를 바라보면 “삼천리금수강산에 피어나라.” 위풍당당하게 호령하신다. 조국을 잠시 잊고 살 때, 역사에 무관심할 때,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며 일상을 지날 때…. 일 년 열두 달 삼백육십오일 중에 단 몇 시간, 몇 분이라도 생각할 수 있을까? 30년 전 육군 장교로 전방부대에서 2년 4 개월간 근무하며 북한군을 주적으로 바라보며 긴장하던 때에도 시간이 지나 전역하길 기다릴 뿐 조국과 민족, 겨레와 역사를 얼마나 생각했을까? 부끄러운 아침을 지나 이제는 일상의 아침을 묘비와 함께, 역전의 선배 용사들과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은 기쁨이요 축복이다. 좋은 일이 생겨야 기쁘고, 많은 것을 누려야 축복이라기보다 일상의 아침에 볼 수 없고 쉽게 만날 수 없는 분들과 마주하며 도란도란할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도 누릴 수 없는 기쁨과 축복이다. 조국과 민족을 위 해 목숨 바친 분들의 숭고한 뜻과 사랑을 매일 아침마다 마주하며 옷과 맘과 생각을 여미고 하루를 시작하는 것, 누군가의 아들, 남편, 아버지의 희생으로 일군 우리 가정과 일터를 감사와 존경으로 시작하는 것. 이러한 맘가짐으로 일상을 이어갈 때, 모든 것이 감사요 사랑이요 희망이 아닌가. 진심 감사와 존경으로 아침을 걷는다. 그곳에서 미래를 만난다.

매일 현충원 둘레 길을 걷는 분들을 만나면 인사를 건넨다. 하루도 빠짐 없이 그 시간 그곳에서 만난다. 물론 언덕 위에서 물끄러미 한강을 향해 앉아계신 군 선배님들도 그 시간 그곳에서 만난다. 까치도, 청설모도, 꿩 가족도, 무궁화 꽃들까지도…. 만나는 사람, 동물, 식물들은 조금씩 변해가지 않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그 자리 그대로이다. 내가 기쁠 때도 슬플 때도 아플 때도 늘 한결같이 변함없이 그 자리에 계신다. 그리고 지날 때에 가까이 다가와 속삭이신다. 화양연화(花樣年華) ‘인생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순간’이 지금이라며 나에게 말씀하신다. 지금의 너와 가족과 국가를 위해 우리는 여기 앉아있으니 염려, 걱정, 근심, 두려움 내려놓고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지금을 맘껏 누리라고…. 우리가 지금의 대한민국의 화양연화를 위해 70년 전 위기의 나라를 구했노라고…. 그랬으니 너도 다음 세대를 위해 화양연화를 선물하도록
각오하고 다짐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