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20 가을호(240호)

가르침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간

윤상혁 (서울특별시교육청 정책안전기획관, 장학사)

교육은 미래를 말할 자격이 있는가

‘팬데믹’의 의미를 이제야 조금씩 실감하고 있다. 마스크를 쓰지 않고 밖을 돌아다니던 때가 언제였나 싶다. 마스크가 뉴노멀의 상징이 될 줄은 몰랐다. 기성 세대가 만들어놓은 새로운 일상은 기괴하고 끔찍하다. 이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어렵게 형성된 공익(公益)으로부터 새로운 사익(私益)을 창출하는 것을 ‘뉴노멀’이라 일컫는 약탈자들로부터 민주주의와 공공성을 지켜낼 수 있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인류의 역사가 코로나 이전과 이후로 나뉠 것이라고 말했다. 2020년은 근본적인 전환의 원년이 될 수도 있지만 점점 망해가는 세계에서 각자 도생만이 유일한 초국가적 질서가 되는 첫해가 될 수도 있다. 선택은 오로지 우리의 몫이다.
이와 같은 전환의 시대에 교육 역시 성찰의 시간이 필요하다. 코로나19가 전 세계를 강타하기 5개월 전 스웨덴의 청소년 그레타 툰베리는 2019 UN 기후행동 정상회의에서 기성세대를 향하여 “사실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성숙하지 않다.”고 비판 하여 ‘성숙’의 의미를 전복시켜 버렸다. 툰베리를 비롯하여 전 세계의 청소년들이 ‘기후위기를 위한 학교 파 업’을 통해 등교를 거부한 행위 역시 근대교육체제의 불가능성을 선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동안 학교는 항상 미래를 말해 왔다. 그러나 기후위기 시대 앞에서 학생들이 묻는다. “미래가 없는데 왜 미래를 위해 공부해야 하나요?” 이를 세상 물정 모르는 청소년들의 순수함 정도로 치부하던 근대교육체제가 코로나19 앞에서 흔들리고 있다. 한낱 바이러스로 인해 등교가 중 지될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항상 미래를 이야기해 왔으나 막상 코로나 앞에서는 한치 앞의 미래도 내다보지 못한다는 것을 만천하에 드러낸 것이다.

근대 교육학의 기본 전제에 대한 질문

지금 우리는 학교의 존재 이유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자크 랑시에르는 <무지한 스승>을 통해 1818년 조제프 자코토가 루뱅 대학에서 실천한 ‘어떤 지적모험’에 대하여 소개하면서 근대 교육학이 만든 신화에 대하여 비판한다. 그것은 유식함과 무식함, 성숙함과 미성숙함, 유능함과 무능함에 대한 신화다. 교육을 통하여 유식/성숙/유능해 질 수 있다는 신념은 오직 능력을 갖춘 자만이 평등함을 누릴 수 있다 는 ‘능력주의’로 귀결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이 세계가 본질적으로 불평등 하다는 가정에 굴복하는 것 이라고 랑시에르는 말한다.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랑시에르는 ① 모든 사람은 동등한 지적 능력을 갖고 있으며, ② 누구나 자신이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고, ③ 모든 것은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보편적 가르침’의 원리를 제시한다.
코로나19로 인한 사상 초유의 온라인 개학과 약 두 달 간의 원격수업을 거쳐 온·오프라인 병행수업이 진행되면서 ‘학습격차’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원격수업 상황에서 개별 학생이 지닌 사회·경제적 격차가 학습격차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는 당연한 사실을 실제로 확인한 것에 불과하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쪽에서는 사회·경제적 자본의 뒷받침이 되지 않는 고3 수험생들이 불이익을 받는 일이 없도록 평가를 쉽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모든 학생들에게 표준화된 고품질의 지식을 제공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 동전의 양면과 같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교육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코로나 이전의 질서를 움켜잡고 있는 꼴이다.
우리는 어떤 깨달음도 얻지 못했다. 인간이라는 종을 불평등한 세계의 최상위층에 위치시키고 인간이 아닌 것들을 지구라는 행성에서 함께 살아가는 평등한 파트너가 아닌, 착취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근대 교육학은 결국 인간마저 지능에 따라 계급화시킨 것은 아닌가. 인간을 자원 취급하는 근대 교육학의 기본전제에 대한 성찰과 전환의 사유가 없이는 그 어떤 뉴노멀과 포스트 코로나 담론도 공허한 외침이 될 뿐이다.

가르침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시간

브렌트 데이비스는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 의 계보학>(원제 ‘가르침의 발명’)에서 교수행위의 개념을 우주의 본성에 따라 형이상학과 형이하학으로, 지식의 원천에 따라 그노시스/에피스테메와 간주관 성/간객관성으로 구분하고, 이를 다시 인식론의 관점 에서 신비주의/종교, 합리주의/경험주의, 구조주의/ 후기구조주의, 복잡성 과학/생태주의로 나누고 있다.1
브렌트 데이비스는 근대 교육학이 합리주의/경험주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고 말한다. 합리주의에 따르면 가르침이란 지식을 전달(instructing; lecturing)하는 것이다. 가르침이라는 것은 학생들이 반드시 배워 야 할 내용들을 단순하고 기초적인 것들부터 점점 복잡하고 어려운 것들 순서로 교육과정에 담아 잘 설계 된 교수법에 의해 구조적으로 전개되어야 한다. 한편 경험주의에 따르면 가르침은 진단(diagnosing)하고 개선(remediating)하는 것이다. 가르침이란 가급적 많은 미성숙한 아이들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성숙한 인 간으로 성장시키는 것이다. 정상적인 발달단계가 설정되고 연령 적합도에 따라 교육내용들이 배열된다. 가르침은 평균적인 기준에 따른 진단과 처방이라는 관점에서 이해된다.
근대 교육학에 대한 반성 속에서 구조주의/후기구조 주의에 바탕을 둔 가르침의 전환이 등장한다. 구조주의 관점에서 학습은 지식을 전수받거나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학습자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을 변경시키는 것이다. 또한 학습자는 불완전한 존재가 아니라 결 코 고정되거나 완성되지 않는 자신의 세상을 끊임없이 만들어가는 인지 주체이다. 따라서 가르침은 배움 없이 존재하지 않는다. 이상적인 교수-학습은 학생이 교사의 의도를 따라가면서 교사가 학생의 학습과정을 상호 조율하는 안무와 같다. 지식권력에 대한 문제도 제기된다. 지식의 정상성/비정상성 및 우월한/열등한 지식을 규정하는 감춰진 권력을 드러내고 이를 통해 피억압자를 해방시키는 것이 가르침의 역할이라는 것이다(랑시에르의 성찰과 연결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구조주의/후기구조주의 역시 인간중심이라는 틀을 벗어나지 못한다. 그래서 데이비스는 가르침/배움의 탈 인간적 관점을 소개한다.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의 가르침/배움이 바로 그것이다. 포스트 코로나 교육 담론에서 가르침/배움이 새롭게 발명되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코로나19 이후 ‘가르침’의 의미는 어떻게 달라질까? 국가-학교-교실로 이어지는 하향적 구조 속에서 국가가 정한 지식을 교사가 학생에게 일방적으로 주입·암기시키는 행위를 우리 사회가 지향해야 할 가르침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가르침이란 세상 속에서 벌어지는 날 것 그대로의 삶을 직시하면서 질문을 던지는 행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 속에서 수많은 편견과 오해, 왜곡과 혐오의 함정을 피해가는 길이기도 하다. 그리고 마침내 나와 당신,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를 포함한 이 세계를 더 나은 곳으로 변혁시키는 존재론적 전회(ontological turn) 의 과정에 참여하는 것, 그것이 브렌트 데이비스가 말 하는 복잡성 교육과 생태주의 교육에 기초한 가르침의 의미이며 자크 랑시에르가 묘사한 무지한 스승이 필요한 까닭이다. 세상을 변혁시키는 일의 원인이 되게(occasioning) 하고, 참여하게(participating) 할 것. (인간이 아닌 것들을 포함한) 나 이외의 세계와 대화 하게(conversing) 하고, 주의를 기울이게(caring) 할 것. 가르침은 오직 배움이 있을 때 라야만 존재의 의미가 있다.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도 가르침이 필요한 가?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교사가 미래세대에게 미래를 돌려주는 유일한 방법이며 인공지능과 로봇이 교사를 대체할 수 없는 본질 적인 이유이다.

  1. 중요한 것은 가르침의 계보도가 프랙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각 부분의 교수행위는 전체와 닮은꼴로 끊임없이 반복된다. 이는 교사의 가르침에는 그/그녀가 지향하는 중심 교수행위가 있지만 항상 단일한 것은 아니며 다양한 교수행위가 혼재될 수 있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