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19 봄호 (234호)

교사로서 힘찬 거보(巨步)

아버지는 사추기(思秋期)

고1 아들을 키우는 아빠로서 요즘 불만이 아주 많다. 중1-2학년 때까지만 해도 손도 잡고 다니고 볼에 뽀뽀도 하는 다정스런 부 자(父子) 사이였다. 그런데 아들이 중2 병을 앓았는지 어느 순간부터 소소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시간이나 여유가 사라졌다. 손을 잡 으면 뿌리치고, 길을 갈 때에도 약간 떨어져 걷고, 안으려 하면 어느새 나를 밀쳐내고 어 디론가 사라져버린다. 이건 무슨 불순한 애 정행각을 벌이는 사이도 아니고, 요즘 시쳇 말로 밀당도 아니고. 아들 녀석이 이토록 내 애간장을 태울 줄이야 미처 몰랐다.
아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면서 아들과의 옛정을 다시 찾을 마음과 대학교 진학을 연 구하려는 소심하고 얄팍한 생각으로 1학년 부장을 맡았다. 그리고 남고에 근무하는 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아들과 같은 또래 의 아이들과 부대끼면서 그들을 이해하기 위해 아들에게 많은 것을 질문하고 그에 적 절한 답변을 얻어낼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이 어떤 힙합을 좋아하는지, 어떤 아이돌을 좋아하는지, 어떤 비속어나 유행어를 쓰는지, 어떤 게임을 좋아하는지 등등. 덤으로 어떤 교사를 좋아하는지를 들 을 수 있었다.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 고 친구 같이 다정한 교사라고 한다.
오 마이 갓! 이러한 사항들은 내가 교직 (敎職)에 들어서면서부터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딴판이었다. 수업시간에 즐겁게 가 르쳐주고, 생활모습에서 모범을 보여주며,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사건사고에서 자신의 소신을 과감하게 얘기해주는 교사를 동경( 憧憬)했던 터라, 나도 그러한 교사상을 꿈꾸 며 살았다. 이젠 어느 정도 이룩해가고 있다 고 생각했다.
수업시간 중에 틈틈이 시간을 할애해서 예 의범절, 부모와의 관계, 4차 산업혁명과 미 래 직업 등 다양한 주제를 선별해서 교수 활 동에 접목하였다. 고개를 끄덕이는 학생들 을 보면서 내심 흐믓해 하였다. 반면에 수업 을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의 미래와 관련된 이야기를 그냥 흘려보내는 소위 ‘만사에 무 덤덤한 탈속한 도인(道人)’과 같은 학생들을 보면서 혀를 끌끌 차기도 하였다.

요즘은 정보가 제일

변화의 계기는 아주 사소한 아들과의 맞다툼이었다. 진학과 관련하여 도덕적이고 아 주영양가있는충고를하고있는데고1학년 에 올라갔다고, 나름 머리 커졌다고, ‘나도 생각하고 있어.’라는 다소 삐친 듯한 발언을 듣고 말았다. ‘지금까지 내가 어떤 고생을 해 서저를키웠는데,그노력과고생을이해하 지못하더라도이녀석이그렇게말하면안 되지.’라는 생각에 섭섭한 마음이 몰려왔다.

배우자, 친구들, 그리고 주변의 교사들과 쓰디쓴 소주 한 잔을 나누면서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답변은 싸늘하 고 냉정하며 동정적이었다. “그것을 이제야 느껴요?아들녀석이상당한기간동안많 이 봐줬네.”라는 식이었다. 이제는 내 품에 서 떠나보내야 하는 나이가 됐다고 생각한 적도있지만,아직도내눈에는세살먹은 애기요,유치원도채끝내지못한철없는7 살이다.

지금까지는 가까이에 있는 아들의 얘기를 참고해서 우리 학교 학생들과 대화를 시도 하고이해했는데,이제는반대로해야할것 같다.즉,우리학교아이들의이야기를통 해서 아들을 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가장 먼저 아들의 컴퓨터 게임에 대해서 아이들에게 물어봤다. 내 아들은 현재 통칭 롤(lol: league of legends)이란 게임에 빠 져 있는데 실버(silver) 레벨이다. 게임시간 을 줄이는 방법이 없겠느냐라는 질문에 온 갖 답변이 쏟아졌다.

컴퓨터를 때려 부수세요, 계정을 없에버리세요, 용돈을 줄이세요, 다른 게임도 하고 있을 텐데요. 뭘. 알맞은 해결책은 도무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냥 놔두세요, 이미 게임중독이에요, 포기하세요”라는 답변이 나올 정도였다. 자신들이 게임 때문에 집안에서 당했던 온갖 양상들을 봇물 터지듯 다 쏟아내는 것이 아닌가?

이번에는 아들의 최근 행동이 궁금해서 아 이들에게 물어봤다. “평소에 소설책을 잘 읽 지않던아들이최근에<너의췌장을먹고 싶어>라는 영화를 보고, 책을 사달라고 하더 니후다닥단숨에읽더라.그리고요즘방에 혼자 있는 시간이 길어졌어. 공부하는 것은 아닌데…….아마도여자친구가생긴거아 닐까?”라는 질문을 던져봤다. 여자 친구가 없는고교생이어디있어요,벌써늦은거 예요,아니야이미있었는데쌤이늦게알게 된 거예요. 자신의 경험에 기반한 이야기가 쏟아져나왔다.마치인생선배라도된듯 나에게 점잖게 조언해 주었다.
또한“요즘아들이손도안잡고신체접촉 도막더라,장난치는것도싫어하던데왜그 러는 거니?”라고 질문해 봤다. “우리도 그래 요,아빠하고목욕탕안간지오래됐어요, 남산도따로따로가요.”등어느정도예견 된 답변들이 나왔다. 그런데 “저는 아버지하 고 사이가 좋아요.”라는 답변도 있었다. 목 욕탕도같이가고,등산도같이하고,하이 킹도 같이 한단다. 와, 부럽다! 어쨌든 이런 아이들은 극소수였다.

면담은 수담(手談)부터

자식이 한창 성장기일 때에는 부자지간이 다 좋을 리는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 스신화 속 제우스는 아버지와 싸워 권력을 쟁취했고, 고주몽는 아예 아버지의 후광 없이 혼자 자신의 나라를 세웠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이 정도로 안 좋을지는 몰랐다. 아들이라는 존재는 어머니의 전폭적인 지지 와 신뢰를 바탕으로 집안의 중심으로 군림(君臨)하고 있었고, 아버지의 자리는 어느새 가정(家庭)의 주변부 내지는 외곽으로 옮겨져 있었다. 2000년대 대한민국에서 벌어지 는 그러한 대세(大勢)에 나라고 예외일 수는 없었다. 한편으로 아이들과 좀 더 친밀한 상태에서 이야기를 풀어나가려는 심정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아들과 손도 못잡고 다니는 한(恨)을 핑계삼아 우리 반 아이들의 손을 잡고 이야기해 보기로 하였다.우선 소풍때 한 명씩 불러서 좋아하든 싫어하든 손을 잡고 다니며 면담을 시도했다. 아이들의 반응은 아주 놀라웠다. 매우 쑥스러워하면서도 일견 기분 좋아보이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지하고 따뜻하게 손을 잡지 못하는 대신에 담임의 손을 잡고 있으니 말이다. 대한민국 아버지들이 대체로 그럴 것이다. 동서고금에 나타난 부자간의 알력과 입이 무겁고 무관심 한 척하는걸 미덕으로 여겨 애정표현을 잘하지 않기에 오히려 아들을 냉대하기 마련이다. 아이들과 손 잡고 이야기하는, 이 단순한 행위가 상상이상의 효과를 가져다 주었다.

담임한테 억지로 손일 잡힌 아이들은 절에간 새색시처럼 순수하게 자신의 고민과 관심사를 슬슬 풀어내기 시작했다. 공부는 하고 싶은데 송직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방법을 잘 모르겠어요 (매우 일반적으로 자신을 위장할 때 사용하는 말이다), 여친 문제로 심각해요(참으로 솔직한 발언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자주 싸우시는데 그 모습을 보기 싫어서 방문 앞에서 서성이다가 학교에 늦는 경우가 있어요(진실로 심각한 고민일 수밖에 없다) 등등. 내밀한 개인사부터 집안 문제까지 노골적으로 읊어대는 아이들을 바라보면서 새삼 많은 것을 깨달았다.

교학상장(敎學相長)이로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면담 방식이 매우 고 답적(高踏的)이고 위악적(僞惡的)이고 행정 편의적이었구나. 아이들은 솔직하게 살과 살을 부대끼면서 이야기하고 싶어 했는데, 담임인 나는 교무수첩을 채우기 위해, NEIS 에뭔가를적기위해, 단지 아이들의정보를 더 알기위해 면담을 했던 것이구나. 이러한 나의 형식적이고 관행적인 면담에 아이들이 얼마나 상처를 입었을까 생각하면 죄책감마저 들었다.

10여 년 전 졸업한 제자 녀석이 생각났다. 3월 개학한지 얼마안된 첫 면담시간에 이 것저것을 물어보니, 그 녀석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않은 선생님한테 왜 제 얘기를 해야하냐고 항의조로 말하고서는 함구(緘口)했다.

그날 그녀석을 엄청 혼냈던 기억까지 떠올랐다. 담임교사가 진행하는 면담시간에 몇가지 확인하는 것을 가지고 학생 녀석이 감히 항의를 했으니 당연히 혼낼 만 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부끄럽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좀 더 시간을 두고 따뜻한 마음으로 대했어야했다. 교사 초년병 시절의 먼 옛이야기라고 치부할 수는 없었다.지금도 그런 모습의 일부를 갖고 있는 듯 하니까 말이다.
수능시험 100일전이라고 반 전체를 고기 뷔페집에 데리고 가서 사 먹이고, 졸업생들 불러다 밥 먹이고 훈계하고, 특이한 체험활동을 발굴하여 유익함이 있다고 생각하여 싫다는 아이들을 데리고 다니면서 인생격언을 알려주고, 성적 떨어진 아이들을 불러다 혼내고, 목표를 설정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뚜렷한 목표를 제시하고, 적합한 학습방법을 알려주는 등 교사로서 할 수 있는 일을 많이 했다고 자부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교사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느날 졸업생이 찾아와 ‘내 인생의 선생님’하고 불러줬을 때, ‘인생에 큰 변화를 준 사람 인터뷰하기’라는 사회학 과제물이 있는데 나를 인터뷰하고 싶다고 찾아왔을 때 교사로서 행복과 만족을 느꼈다.

소통과 인내의 교사로

아니었다. 잘못되었다. 그러한 행동들이. 그것이 오히려 손을 잡아주고 따스한 한마 디를 건네는 것보다 못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인성교육,학과수업보다 더 중요한 것이 바로 교사와 학생이 인간 대 인간으로 작접 부딪히면서 대화를 나누는 것이다. 내담자(來談者)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이 상담(相 談)의 제일칙(第一則)인 것처럼, 교사도 아이들의 처지에서, 아이들의 수준에서 귀를 기울이고 이야기를 들어줘야 한다. 이 평범한 진리를 나는 ‘교사’라는 권위적인 틀에 감춰놓고 살았다. 이제는 다시 시작하는 마음 으로 학생들에게 다가가고자 한다. 학교 생활에서 엇나가는 아이의 손을 잡고 같이 인생의 목표와 현재의 모습을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 이야기하고, 학습에 열중인 아이의 손을 잡고 긴장과 휴식, 그리고 집중과 선택의 문제를 논의해 보고 싶다. ‘소년이로학난성(少年易老學難成)’인 것처럼 교사도 빨리 늙어가지만 배움과 학습에는 끝이 없고 완성을 보기도 어려운 법이다. ‘군자불기(君子 不器)’인 것처럼 학생들은 무한한 잠재력을 지닌 우주와도 같은 존재인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아들 녀석과 이야기해 보려 한다. 뒷산에 올라갈 계획이다. 건강에 유익하다, 아침 공기를 쐬는 것이 좋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는 다 버리고, 아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싶다. 내 아들이 아닌, 하나의 인격체로서 어른을 향해 질주(疾走)하는 ‘그 사람’과 마주하고 싶다. 산을 내려올 때쯤이면 우리 부자(父子)는 자연스럽게 환한 웃음을 짓고서 서로를 바라보게 될 것이다. 내가 이제서야 커가는, 아니 커져있는 우리 아들의 존재를 느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