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나눔Vol.223.여름호

[기획연재2]-교사를 위한 인문학]인문학, 삶을 위해 죽음을 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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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상철 / 경희여자고등학교 수석교사

유사 이래 모든 인간의 마음 깊은 곳에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이 똬리를 틀고 있다. 과거에는 죽음과 관련된 많은 일들을 운명·숙명이라는 말로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신화 등을 살펴보면 과거에는 죽음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현재보다 강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죽음을 언급하는 것을 매우 꺼려한다. 왜 그럴까? 현대 과학과 의료 기술의 발전을 통해 자신이 처한 상황을 통제·지배할 수 있다고 믿는 현대인들 은 운명·숙명을 거부하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과학과 기술로 중무장 한 현대인이라도 죽음 앞에서는 무력해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서 현대인들은 죽음에 대한 거부감이 더욱 강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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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경험은 그것이 무엇이든 기억에 강한 흔적을 남긴다. 나는 우리 학교에 임용된 첫 해 2학년 담임을 했다. 학생들이 너무나 사랑스러웠고 이들에게 많은 것을 주려 했다. 그 중 한 학생이 모 대학 국문과에 진학하고 그 해 6월, 병으로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너무나 놀라고 마음이 아팠다. 제자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어 입관을 할 때 가족 과 함께 들어갔다. 학교를 다닐 때 화사한 한복이 너무 잘 어울렸는데, 제자는 차가운 쇠침대 위에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노란 수의를 입은 채 다소곳이 누워있었다. 충격이었다. 그런데 기껏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잘 가라’는 말을 남기는 것뿐이었다. 무기력이 밀려왔다. 그 다음날 벽제 화장터에서 제자의 육신을 한 줌 재로 떠나보내고, 마음에서 끓어오르는 슬픔과 분노를 술에 의지하여 삭히었다. 왜 슬펐을까? 왜 분노했을까?

나의 슬픔이 아무리 커도 부모의 슬픔에 견줄 수는 없다. 소설가 박완서는 스물여섯 살인 아들을 갑자기 잃고, 그 슬픔과 고통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괴로운 심정을 다음과 같이 솔직하게 기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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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의 죽음에 몸부림치며, 한 번 만이라도 다시보고 싶어 하는 엄마의 마음이 담겨 있다. “부모가 죽으면 산에 묻고, 자식이 죽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옛 말이 떠올랐다. 2014년, 300여 명의 엄마들이 이런 심정이었다. 생명의 자연스러운 종말이 아니라, 좀 더 주의하고 노력했으면 피할 수 있는 죽음이었기에 부모의 몸과 마음을 저미는 슬픔은 죽은 자녀들이 있는 바다보다 깊었고, 전 국민의 분노는 하늘을 찌를 듯 높았다.
이처럼 갑작스러운 이별은 살아 있는 자에게 충격을 준다. 죽음에는 다양한 유형이 있다. 지금까지 이야기한 경우는 자손이 부모나 조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애처롭고 슬프다는 뜻에서 ‘참척(慘戚)’이라 한다. 이와 달리 늙은 부모가 젊은 자식보다 먼저 죽 는 경우에는 ‘순상(順喪)’이라하고, 그 중에서 복을 누리고 오래 산 사람의 상사(喪事) 를 ‘호상(好喪)’이라 한다. 그러나 죽음의 유형이 어떠하든 죽음은 슬픔을 동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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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변한다.” 이 세상의 모든 존재가 피할 수 없는 불변의 법칙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성장하고 늙어가다 죽음을 통해 이 세상과의 연을 일단락 한다는 점에서 인 간도 이 법칙에서 예외가 될 수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죽음을 슬퍼한다.
인간으로 태어나 언젠가는 반드시 겪게 될, 모든 살아있는 존재가 피해갈 수 없는 죽음은 한 개체에게는 변화의 종착역이지만 자연의 관점에서는 끊임없는 변화의 연 속선에서 한 지점에 불과할 뿐이다. 이러한 죽음관을 대표하는 철학이 바로 도가사상 이다.

장자의 아내가 죽어 혜자가 문상을 갔습니다. 그 때 장자는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혜자가 말했습니다. “자네는 아내와 살면서 아이들을 기르고 이제 늙은 처지일세. 아내가 죽었는데 곡을 하지 않는 것도 너무한 일인데, 거기다 질그릇을 두드리며 노래까지 하다니 너무 심하지 않은가”
장자가 대답했습니다. “그렇지 않네. 아내가 죽었을 때 나라고 슬퍼하는 마음이 없었겠나? 그러나 그 시작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 본래 삶이란 게 없었네. 본래 삶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본래 형체도 없었던 것이지. 본래 형체만 없었던 것이 아니라 본래 기가 없었던 것이지. 그저 흐릿하고 어두운 속에 섞여 있다가 그것이 변하여 기가 되고, 기가 변하여 형체가 되었고, 형체가 변하여 삶이 되었지. 이제 다시 변해 죽음이 된 것인데, 이것은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의 흐름과 맞먹는 일. 아내는 지금 ‘큰 방'[천지]에 편안히 누워 있지. 내가 시끄럽게 따라가며 울고불고한다는 것은 스스로 운명을 모르는 일이라. 그래서 울기를 그만 둔 것이지.”

장자의 말처럼 사계절이 바뀌는 것과 같은 자연스러운 변화인 죽음을 인간은 왜 두려워할까? 셀리 케이건은 죽음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네 가지로 규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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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죽음의 필연성과 우연성으로 인한 죽음에 대한 무지가 인간에게 공포와 불안 을 심어주었다. 인간은 ‘모른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있기 때문이다.
언제 죽을지 몰라서 죽음이 두렵다면, 언제 내게 죽음이 다가올지를 알면 그 두려움 이 사라질까? 만약 당신에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주민등록증이 교부될 수 있다면 어느 것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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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는 것이 약이다.”라는 속담이 있다. 죽음의 시점을 모르기에 두렵지만, 모르기 에 편히 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죽음을 인식하고 그 의미를 생각해보고, 만약 내가 떠난다면 어떤 모습으로 떠날지 따져보는 것은 의미가 있다. 죽음은 삶의 일부이기 때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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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장병으로 죽음의 경계에 서봤던 미국의 심리학자 에이브러햄 매슬로는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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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최대 관심 분야는 ‘나와 우리의 삶’이다.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사는 것 이 잘 사는 것인지에 관해 인문학은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이에 답하는데 죽음에 대한 성찰은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 6개월 후에 당신이 죽는다면,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겠는가? 죽음에 임박하여 주변 사람들에게 마지막 편지를 남긴다면 어떤 내용으로 쓰겠는가? 이러한 질문에 답을 하려하면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되고, 자연스럽게 어떻게 사는 것이 바람직한 지를 생각하게 된다. 이처럼 죽음은 삶의 거울이 된다. 이것이 삶의 의미를 일깨우기 위해 우리 교사들뿐만 아니라 학생들에게도 죽음에 대한 성찰이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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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박완서(2004). 『한 말씀만 하소서』. 세계사.
2) 오강남 역(2002). 『장자』. 현암사.
3) 셀리 케이건(2012). 『죽음이란 무엇인가』. 엘도라도.
4) 알폰스 데켄(2005). 『죽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 궁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