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19 겨울호 (237호)

우리가 함께 읽어야만 하는 이야기들

김혜진 (구로고등학교, 교사)

올해로 담임 4년차, 매년 좋은 책들을 골라 읽고 학급 문고에 차근차근 쌓아 온 지도 4년째다. 매해 늘어나서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백 권을 넘긴 책들 중에서 최근 가장 재미있게 읽었고 모두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아직도 온라인보다 오프라인에서 책을 구 경하기 좋아하는 필자가 책을 고르는 기준 은 의외로 간단하다.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 거나, 아니면 표지가 마음에 쏙 들었거나, 멋진 추천사가 쓰여있거나, 뭐 그런 이유들 로 책을 산다.
서점에서 ‘체공녀 강주룡’을 단박에 산 이 유는 여러 가지다. 일단은 표지의 그림이 마 음에 들었다. 멋진 눈썹, 무언가를 응시하는 강렬한 눈빛, 삶의 어떤 고난이라도 이겨 낼 것 같은 튼튼한 광대, 이유 없이 웃지 않 는 굳게 다문 입, 깔끔하게 가르마를 타 뒤로 묶은 머리까지 모두 다. 이 사람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있을까, 궁금해지는 얼굴 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강주룡. 흔히들 말하는 ‘여성스러운’ 이름이 아닌 이름을 여성이 가졌다는 것이 좋았다. 책 표지에 둘러진 책띠에 적힌 추천사 마저 좋았다. ‘자기 연민이나 감상에 젖지 않 는 이 인물을 통해 우리는 전혀 다른 여성 서 사를 만난다.’

올해로 담임 4년차, 매년 좋은 책들을 골라 읽고 학급 문고에 차근차근 쌓아 온 지도 4년 째다. 매해 늘어나서 다양한 영역을 아우르며 백 권을 넘긴 책들 중에서 최근 가장 재미 있게 읽었고 모두와 함께 읽고 싶은 책을 소개하고자 한다.
이런 사람이 정말 있었다면 누구라도 반하지 않을 수 없는 멋진 사람이었을거야. 그렇게 생 각하며 읽은 강주룡의 이야기는 남편과 함께일 때, 그리고 남편이 죽은 후로 나뉜다. 결혼 첫 날 밤 독립운동을 해야만 하겠다고 고백하는 앳된 얼굴의 남편에게 ‘가려면 오늘 잠든 사이에 가라’고 말하고 곯아떨어진 주룡은 다음날 아침, 옆에서 아직 잠든 남편의 얼굴을 보고 ‘서방 만 한 게 없다’고 생각한다. 귀여우면서도 결기가 있는 남편 전빈과 그 기운을 키워 함께 걸어 갈 만한 기백을 가진 주룡은 천생연분일 것이다. 그리고 둘은 그렇게 서로 사랑해서, 오밤중에 함께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다. 강주룡이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이유는 딱 하나다. ‘당신이 좋아서, 당신이 독립된 나라에 살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주룡이 독립운동에 가담한 것은 거창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사랑하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일을 함께 해내고 싶어서였던 거다.

그렇게 독립군이 된 주룡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우리 모두 자연스레 독립 군의 식사 준비나 빨래 등을 떠올리지 않을까? 틀리진 않다. 처음엔 그랬으나, 주룡은 임산부인 것처럼 가장해 폭탄을 나르고, 들킬 뻔하자 기지를 발휘해 임무를 완수한다. 총을 들고 사격 연습도 한다. 물론 주룡도 사람인지라 무서워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그럼에 도 오히려 전빈보다 주룡의 활약이 두드러진다. 그러던 중 독립군 대장과 함께한 술자리에서 희롱을 당한 주룡이 화를 내며 자리를 떠나자, 전빈은 주룡의 마음을 달래주기도 전에 ‘부대원 간의 의가 상할 것 같다’는 말로 주룡을 나무란다. 주룡은 전빈 때문에 ‘금이 간 내 가슴은 쉽게 아물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전빈을 달랜다. 역시 여장부. 그런데도 전빈은 돌아가라고 했다. 이 장면이 좀 우습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순전히 전빈의 자격지심이자 열등감 때문인 것 같은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주룡이 독립군 부대에서 더 오래오래 활동했다면 뭐라도 하나 더 해내지 않았을까. 어쨌거나 주룡은 귀찮다는 전빈의 말에 그대로 집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빈은 죽는다. 전빈이 죽자 전빈의 어머니는 주룡이 전빈을 죽인 것이나 다름 없다며 주룡을 고발하고, 주룡은 그탓에 감옥에 며칠이나 갇혀 있어야 했다. 주룡이 풀려난 뒤 주룡의 가족은 소문과 시선을 피해 다른 동리로 옮겨 살게 되는데, 아버지가 주룡을 주인집 첩으로 들이려 하자 ‘나 죽었다 여기고 잊어주시오.’라고 편지를 쓰고 홀로 떠나버린다.

그래, 어디에도 매이지 말고 혼자 자유로워라.

주룡은 훌훌 평양으로 날아가 고무공장에 취직한다. 여기서부터가 주룡 인생의 2막이다. 글의 분위기도 확 달라진다. 남편을 사랑하던 여성 주룡은 없고, 자신의 인생을 제 뜻대로 살아가는 인간 주룡이 등장한다. 주룡은 단발머리의 모던 걸을 꿈꾸고, 공장의 관리자에게 성희롱을 당하면서도 ‘구남성의 박해를 받았으니 이는 도리어 모단 껄 되기의 제일보에 진입한 것’이라며 할 일을 다 해낸다. 다른 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할 일을 야무지게 해내고, 그 과정 에서 자연스레 연대한다. 그러다가 주룡은 남편 때문에 독립운동을 시작했던 것처럼, 우연히 노동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고무공장에서 동고동락하던 홍이 형님, 삼이와 ‘어쩌다’ 파업단 천막에 들어간 주룡은 파업단의 연설을 듣고 마음이 동한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파 업단이 요구하는 것은 임금 안정, 노동자에 대한 인격적 대우, 유급 출산 휴가, 지금은 당연시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물론 지금도 당연시되나 지켜지지 않는 것들도 많다). 매일매일 천막에 나가며 한참 마음을 공그린 다음 가입 원서를 낸 그날, 주룡은 신입 조합원 결의 발언 시간에 앞으로 나가 평양고무직공조합의장이 되려고 가입했다고 말한다. 그렇지. 그래야 강주룡이지. 그래야 멋지고 당당한 강주룡이지. 이 장면에서 웃지 않을 수 없는 독자는 없을 것 이다. 주룡은 그 자리에서 ‘내 동지, 내 동무, 나 자신을 위하여 죽고자 싸울 것’이라고 다짐 했고 실제로 그랬다.

공장주가 결정한 17%의 임금 인하에 반대하며 주룡을 포함한 마흔 아홉 명의 파업단 전원 이 아사 동맹에 참여하기로 한다. 그러다 강제진압을 당하자 주룡은 평양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에서 죽자며 을밀대로 간다. 주룡은 을밀대 지붕에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계속 농성을 하다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옥사에서도 단식을 강행하다 아사했다.

책의 말미에 와서야 제목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체공녀(滯空女)’는 ‘공중에(滯) 머물러(空) 있는 여성(女)’을 의미한다. 여기까지는 정말 소설인 줄로만 알았다. 여기에 필자의 한계가 있다. 성평등한 생각을 바탕으로 말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음에도. 몸에 불을 질러 죽어가며 노동자들의 권리를 주장한 전태일의 이야기는 ‘대단하다’며 읽었으면서도, 강주룡의 이야기는 그냥 정말 허구인 줄로만 알았으니까. 그런데 마지막 페이지에 신문 기사 스캔 본이 있었다. 표제는 ‘乙密臺上(을밀대상)의 滯空女(체공녀)’, 부제는 ‘女流鬪士(여류투사) 姜 周龍(강주룡) 會見記(회견기)’. 강주룡은,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까지 몰랐던 조선 최초의 고 공 농성자다.

가명의 기자가 쓴 기사에는 강주룡이 을밀대 지붕 위에서 외친 내용이 그대로 적혀 있다. ‘ 나는 죽음을 각오하고 이 지붕 위에 올라 왔습니다. (…) 끝까지 임금감하를 취소치 않으면 나 는 자본가 압제에 신음하는 근로대중을 대표하여 죽음을 명예로 알 뿐입니다.’ 그 뒤로는 강주룡이 스스로의 삶을 회상한 내용이 이어진다.

작가 박서련은 이 기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강주룡의 인생을 이백 페이지가 넘는 긴 드라마 로 복원해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강주룡은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해야 할 일을 하고, 해야 할 말을 하는 사람이다. 강주룡은 독립운동도 노동운동도 작정하고 달려들 지 않았으나 무엇이든 제대로 해낸다. 하나 제대로 하기도 힘든 일들을 두 개나 당당히 해내 는 와중에 자신의 불행에 빠져들지도 않는다. 제 한 몸 건사하기 벅찼을 것 같은데도, 주룡은 주위 사람들을 배려하면서도 그들에게 솔직하다. 이렇게 멋진 강주룡은 그래서 한 번쯤 만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너무 멋지지만 과하게 힘이 들어간 건 아니어서 더 멋진, 그래서 만나서 악수도 하고 싶고 사인도 받고 싶은, 그런 팬심을 가지게 하는 사람.

기록은 있으나 널리 회자되지 않은, 그래서 더더욱 이야기하고 적어야 하는 여성의 이야기 를 이렇게 명쾌하고 가볍게 담아낸 글을 오랜만에 만나 정말 반가웠다. 가볍게 읽을 수 있으나 받아들이기에 따라 묵직한 무게감을 지닐 수 있는 글, 인물, 사건, 배경이 뚜렷해 ‘소설’임 을 느끼며 읽을 수 있는 글, 쉬우면서도 새로운 시각을 가질 수 있게 하는 글, 다양한 이야깃 거리를 이끌어 낼 수 있는 글, 이 책은 그런 글이다.

(아이들이 이북 사투리라는 큰 벽을 넘을 수만 있다면) 전태일 평전도 좋지만 이제는 「체공녀 강주룡」을 함께 읽고 싶다. 우리에게는 이런 서사가 필요하니까. 그동안 널리 이야기되어 온 내용들도 좋지만, 드러나지 않은 멋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