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육2020 봄호 (238호)

‘지원’이라는 우산을 쓴
핀란드 학교의 자율행정 이야기

주정흔 (서울교육연구정보원 교육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이 글은 주정흔 외(2019) 의 「학교자율운영체제 구축을 위한 한국-핀란드 단위학교 행정체제 비교연구」.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서교연 2019-87. 일부분을 재구성함.

어떤 주제에도 시원하고 명쾌한 답(?)을 주는 펭수도 교육에 관한 질문에는 ‘참 어려운 일이죠.’라는 답을 했다고 한다. 교육에 관한 이슈는 언제나 뜨겁다.
지향하는 가치에 따라, 정치적 입장에 따라, 자신이 처한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정책에 대한 옳고 그름이 제각각이다. 이런 현실에서 특별한 이견이나 반대가 없는 흔치 않은 교육정책이 하나 있다. 바로 학교자율운영에 대한 필요이다. 1995년 5. 31교육개혁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육의 분권화 · 자율화의 담론은 역대 모든 정부의 교육개혁의 주요 정책내용이 되어왔다. 세기가 바뀌고 거스를 수 없는 미래 담론이 팽배해지면서 새로운 학교자율운영과 학교자치는 이제 지체할 수 없는 당면과제가 되었다. 문제의식도 있고, 진단도 넘쳐나며 정부와 교육청의 구체적인 정책적 노력도 진행되고 있다. 그러나 가야 할 길은 여전히 멀게 느껴진다. 잠시 숨을 고르며 우리보다 앞서 중앙집권적인 교육행정에서 자율화·분권화를 성공적으로 안착시킨 핀란드 학교행정의 내부 세계로 눈을 돌려보고자 한다. 연구를 위해 핀란드를 가게 됐다고 했을 때 주변의 반응은 다소 당황스러웠다.

“와~ 좋으시겠어요.” “또 핀란드입니까?”
“대체 우리나라 고위교육 관계자치고 핀란드 안 다녀온 사람이 얼마나 되나요? 그런데 대체 뭐가 바뀐 거죠?”
“남의 나라 좋아 보이는 정책이나 제도 가져다가 붙이는 거 그만하자.”
“우리나라교사들중에서핀란드 교육에찬성할사람이 얼마나 될지 그것부터 연구해주세요.”


수년 전 핀란드 교육에 대한 붐이 지나간 자리는 성찰 없는 기대와 환상만큼의 실망감과 낯선 문화가 주는 이질감이 대신하고 있었다. ‘왜 핀란드인가?’낯선 문화는 그 자체가 거울과 같다. 문화적 차이나 이질감을 벗어나 거울에 나를 비추었을 때 비로소 낯선 나, 낯선 우리를 만나게 된다.
이번에 우리가 가지러 간 거울은 핀란드 학교의 내부 행정체제와 행정의 작동방식이다. 자율과 자치는 선언이 아니라 일상의 모습으로 살아 움직인다. 핀란드 학교행정의 일상적인 모습이 궁금했다. 핀란드 학교의 교장은 어떤 일들을 하며 하루를 보내는지, 의사결정은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지, 교무행정은 누가 어떻게 하는지, 교사의 하루는 어떤 일들로 채워지는지, 그들도 학교시설 관리 업무를 하고, 청소 감독을 하는지, 수업에 필요한 교구는 어떤 방식으로 구매하는지, 학교에서 안전사고가 났을 때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지… 거울은 구체적일수록 좋다.

슈필라움(Spielraum), 자율과 주체의 공간

우리나라 학교라는 공간을 떠올리면 특유의 전형성이 있듯이, 핀란드 학교도 규모의 차이는 있지만 특유의 전형적인 배치가 있다. 교문에 해당하는 현관문을 열고 로비에 들어서면 카페테리아와 여러 휴게시설을 갖춘 공간이 넓게 자리하고 있다. 여러 가지 모양의 테이블엔 학생들이 자유롭게 얘기를 나누며 쉬고 있다. 로비 중앙엔 대형스크린이나 모니터가 있고 학교에 따라선 별도의 무대가 마련되어 있어 이곳에서 각종 모임이나 공연이 열리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밝은 색상과 디자인이 돋보이는 가구들이 곳곳에 놓여있다. 로비를 둘러싼 나선형 모양의 계단을 따라 교실이며 교장실, 도서실 등이 배치되어 있다.

행정업무가 이루어지는 교장실과 교무실, 각종 회의실은 좁다고 느껴질 정도로 최소한의 공간에 간단한 집기들만 놓여있다. 교무실에 비해 교사휴게실은
상대적으로 크고 안락하다. 자연이 사방으로 들어오는 넓은 창에 안락한 가구들이 여유롭게 놓여있다. 한쪽 벽면에는 학교로 전달된 2021년 국가교육과정안을 기초로 교사들끼리 교육과정에 대한 얘기를 나누며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붙이는 게시판이 있다. 학교교육과정의 실제는 이곳 휴식의 공간에서 놀이처럼 살아난다.

슈필라움(Spielraum)이 떠올랐다. ‘놀이(Spiel)’와 ‘공간(Raum)’의 합성어로,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율의 주체적 공간’으로 자기만의 공간을 뜻한다.
물리적 공간은 물론, 심리적 여유까지 포함하는 슈필라움이 있어야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자존감과 매력을 만들고 품격을 지키며 제한된 삶을 창조적으로 재구성할 수 있다는 개념이다. 제도적 공간인 학교 속 잠시라도 머물 수 있는 ‘나만의 공간’에서 일은 놀이가 되고, 놀이는 창조적 생산의 토대가 된다. 행정업무는 학교를 지배하기보다 학생과 교사의 슈필라움을 조용히 ‘지원’한다. 자율은 이렇게 공간의 배치 안에서 살포시 그 모습을 드러낸다.

유연한 학교조직과 집단지도체제

핀란드 학교의 조직은 규모와 목적에 따라 구성체제가 자율적이면서 유연하다. 학교규모에 따라 교장이 여러 명인 학교도 있고, 교감 역시 전업교감과 교사 중에서 교장이 임명하는 일반교감을 두기도 하며, 없는 학교도 있다. 반타 시에 있는 Tikkurila 고등학교는 교장 1명과 전업교감(부교장), 교감 1명, IB 코디네이터를 모두 ‘교장단(principles)’으로 분류하고 있었다. 학교 규모가 아주 작다면 다른 학교의 교장을 같이 맡기도 하고, 교장을 하다 좀 더 큰 학교의 교감을 맡기도 한다. 교장은 모든 행정과 책임의 중심에 있고, 행정실은 교장의 부속실 개념으로 교장의지휘하에있다.핀란드는 법적으로 모든 학교에 ‘운영팀(manage-ment team)’을 필수적으로두게되어있어, 교장을 중심으로 학교운영에 관한 전반적인 사항을 결정한다. 이 운영팀은 핀란드 학교의 자율운영체제의 중심이 되어 작동하는 조직이다.
Tikkurila 고등학교는 위의 교장단 4명과 일반교사 5명, 학생 2명이 참여하는 운영팀을 중심으로 주요 사항을 논의한다. 이들은 각 구성원의 대표라는 인식이 강하며, 해당 구성원의 의견을 반영하려고 한다. 이때 교장은 운영팀의 대표가 아닌 일원으로 의견을 내며, 교사 역시 부장교사가 아닌 일반교사가 참여한다. 운영팀은 일주일에 두 시간 정도 모임을 갖는데, 운영팀에 참석하는 일은 교사 본연의 업무가 아니라는 점에서 교사에게 월 50유로 정도의 추가수당이 주어진다. 학생 참여는 지역에 따라 필수 혹은 선택일 수 있지만 학생의 의견을 학교운영에 반영하기 위해 학생이 운영팀에 참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운영팀은 합의 중심의 의사결정을 기본으로 하지만, 여기서 결정된 사안들은 교장이 전적으로 책임진다.

‘실무’를 하는 교장

Tikkurila 고등학교 현관을 들어서니 부스스한 머리칼에 붉게 충혈된 눈의 교장이 직접 연구진들을 맞이하러 나왔다. 연말을 앞두고 여러결산업무로며칠째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며 피곤함을 호소해왔다. 일이 많은 시기인 건 알겠는데 교장이 잠을 못 잘 정도라면 대체 어떤 일들을 하는 걸까?
핀란드에서 교장의 선발은 지방정부(지방교육청)의 권한이다. 지역에 따라 학교 구성원의 협의를 거쳐 지방정부가 최종 심사를 하는가 하면, 다른 지역에서는 교장지원자들을 지방정부가 일괄 심사하여 필요한 학교에 배치하기도 한다. 선발방식은 다르지만 자격요건은 동일하다. 교장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교사 자격과 적당한 교직 경력, 교육행정에 관한 학위 또는 자격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직 교사는 교사 자격과 교직 경력을 갖고 있으므로 교장이 되려면 교육행정에 관한 자격을 준비해야 한다. 교육행정에 관한 자격은 몇 가지 종류가 있는데, 가장 일반적인 방법은 대학에서 운영하는 교장교육 프로그램을 이수하는 것이다. 따라서 본인이 원한다면 20대, 30대 교장도 가능하다.
핀란드에서 교장은 의무적으로 1주일에 적게는2~3시간에서 많게는 20시간까지 수업을 담당하게 되어있다. 동시에 교장은 행정실무자이자 조직문화를 구성하는 리더이다. 실무를 담당한다는 것은 직접 계획을 세우고, 결정하며, 실행하거나 지원한다는 의미이다. ‘예산 관리’는 교장의 업무 중 가장 큰 부분으로 예산 사용에 대한 전권을 가지고 있다. 예산의 80% 이상이 교원 급여 등 고정비용이므로 실제로 교장 권한으로 사용할 수 있는 규모는 크지 않은 편이다. 교장이 일과 중 가장 많이 신경쓰는 일은 예산계획표를 들여다보는 일이라고 했다. 교사들은 예산에 대해 신경 쓸 필요가 없으며 필요한 비용을 교장에게 구두로 요청하면 교장이 예산 상황을 확인한 다음 사용 여부를 판단한다. 예산 사용에 대한 보고 업무 역시 당연히 교장의 몫이다. 학교의 모든 교무행정과 일반행정 모두 교장의 업무로, 교장의 행정 실무를 돕기 위해 1~2명의 행정비서 또는 교육비서(한국의 교무 및 행정실무사)를 둔다. 이 행정비서는 학교장이 직접 고용한다. 가끔 학교 상황에 따라 교감이나 교사가 교장의 업무를 나누어 전담하는 형태로 운영되기도 하는데, 교장이 맡은 일을 받아서 실제로 추진하는 개념이 아니라, 교장이 추진하는 업무를 교감 및 교사가 ‘돕는’ 개념에 가깝다. 만약 교감 또는 교사가 일정 업무를 맡게 되면 별도의 결재 없이 메시지 수준의 보고로 업무를 진행하는 자율성을 부여한다. 예산 외에도 교장은 교사를 비롯한 학교 인력을 채용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다. 비록 교직원들의 의견을 반영하여 필요한 인력을 채용하지만, 최종 인사결정권은 교장이 가지고있다. 또한 학교 운영상 필요한 조직의 구성, 추가수당 지급 등을 결정하는데, 특징은 교장이 모든 교사의 이야기를 듣고 중재하는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는다는 점이다. 이처럼 핀란드 학교 행정에서 교장은 강력한 권한과 함께 학교행정에 관한 실질적인 업무를 직접 수행함으로써 교사의 교육활동을 ‘지원’하는 파트너이자 리더이다. 교장의 역할에 대한 이러한인식이 처음부터 형성된 것은 아니었다. 1980년 이전까지 핀란드 학교의 교장의 직무는 관리(management)에 맞춰져 있었다. 자율화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면서 1983년 ‘새로운 학교법’을 계기로 교장의 역할을 ‘관리’에서 ‘리더십’으로 전환하고, 교장의 역할과 책임에 대해 매우 구체적으로 규정하는 변화를 만들어냈다.

지방정부가 담당하는 책임 : 시설 유지 보수, 청소, 급식, 방과후 교실

학교가 관리하고 운영할 수 있는 영역이 많을수록 학교의 자율성은 커지는가? 핀란드로 떠나기 전, 우리나라 학교구성원들의 직무분석 관련 연구물에 나온 교사직무분석표를 체크리스트로 만들었다. 수업과 관련된 활동 외에 핀란드 교사들은 과연 어떤 업무를 하는지, 체크리스트에 나온 업무를 자신의 역할로 인식하는지, 만약 하지 않는 일들이 있다면 그 일들은 누가 담당하는지 확인해보고 싶었다. 핀란드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지방자치제를 근간으로 하지만 교육행정체제는 매우 다르다. 한국의 지자체, 즉 시정부 및 도정부가 교육청과 분리되어 존재하는 것과 달리 핀란드의 지방정부는 지역 교육부를 포함하고 있는 일원화된 행정단위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일원화된 지방정부 내 교육부서는 지역 행정부의 다양한 교육관련 과제를 실천하는 주체 중 하나라는 점에서 우리의 교육청과 유사한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교육부서는 학교에 대해 관리 감독하는 역할이 아니라, ‘지원’에 초점을 두어 기능하도록 되어있다. 하나의 시설을 설치하고 유지·보수한다는 것은 해당 시설의 효용성을 유지함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일임과 동시에 많은 행정력이 드는 일이기도 하다. 게다가 기술이 발달하면서 하나의 시설 안에 더 체계적이고 복잡한 장치들이 함께 구성되면서, 시설 관리는 더욱 전문성을 요하는 영역으로 변하고 있다.
게다가 안전사고에 대한 책임소재에 대한 민감성과 쾌적한 실내·외 환경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학교를 운영하는 교장에게 있어 학교 시설관리를 더 민감한 업무로 만들고 있다. 이러한 업무는 자연스럽게 교사들에게도 공유된다. 결과적으로 학교의 과도한 시설 관리 업무는 경직된 교육과정 운영이나 추가적인 행정절차를 감수하도록 유도한다. 핀란드 학교는 지방정부에 건물 및 시설의 임대료를 지불하는 방식으로 계약을 맺음으로써 건물 유지 보수 및 청소와 환경미화와 관련된 모든 업무는 지방정부의 몫이다.
급식업체 선정, 방과후 활동 등의 관련 업무 일체도 마찬가지이다. 즉 일련의 업무들은 학교에서 행해지지만, 그 학교를 담당하는 지방정부는 학교 본연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할 수 있도록 다른 조직을 동원하여 업무를 책임지고 있다. 이러한 방식은 행정부담을 상당히 덜어주기도 하지만 학교 개별적으로 계약을 하는 것보다 비용적인 면에서도 훨씬 경제적이다. 핀란드에서 지방행정기관은 정책이라는 이름으로 명령을 내리고 감독하고 관리하는 기관이 아니라 학교를 보호하고 지원해주는 ‘우산’으로서 행정기관 나름의 역할을 책임지고 있었다.

학교 운영의 자율성 : 공문, 감사, 기안과 결재

‘행정’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게 공문, 감사, 기안, 결재, 예산 등이다. 핀란드 학교에는 공문이 없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알고 있었다. 공문 없는 학교행정을 경험한 바 없는 우리에겐 그저 낯설고 궁금한 이야기다. 핀란드 교육관계자들과의 인터뷰에서 공문에 대한 문제를 질문했을 때, 질문 자체를 이해하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공문은 우리나라 행정에서 매우 중요한 의사소통 도구로 이해된다. 핀란드에서도 행정기관이 학교에 문서를 보내긴 한다. 그러나 공문이 아닌 e-mail을 통해서 전달되며 그 횟수도 많지 않다. 이메일은 지방행정기관과 학교, 교장과 교사 사이에도 일상적인 소통 도구이다. 헬싱키 시 Viki 종합학교의 행정교장은 교육부, 지방정부에서 내려오는 공문의 존재에 관해 상부기관에서 어떤 업무를 해야 한다는 식의 지시를 받은 경우는 없다고 밝혔다. 국가교육원 등 상부기관에서 내려오는 지시는 화재대피훈련 같은 안전 관련 영역뿐이며, 그나마도 구체적인 내용은 학교가 결정한다. 그 이외의 정보전달, 설문조사는 교장이 이메일을 통해 주고받는데, 점검보다는 학교 운영의 자가진단 성격에 가깝다. 또 다른 예로 국가교육원에서 국가수준학업평가에 참여할 의향을 묻는다면, 교장에게 메일을 보내고, 만약 9학년 수학과목 평가라면 행정교장은 중학교 교장에게, 교장은 다시 수학교사에게 평가 참여 의향을 묻는다. 이 과정 역시메시지나 구두로 진행된다. 그 후 수학교사는 평가 참여에 대한 의견을 교장과 상의하는 방식이다. 예산이 지원되는 프로젝트(한국의 ‘시범사업’에 해당)를 신청할 때도 학교가 각자 알아서 해당 기관 웹사이트에 방문한 후 정보를 찾는다. 공문은 특정 사안에 대해 공적 권위와 책임이라는 성격을 함의하는 데 비해 이메일이나 구두는 느슨하며 수평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느껴졌다.
핀란드는 1990년대 분권화와 규제 완화를 위한 노력이 가속화 되면서 90년대 중반 감사와 장학을 폐지하였다. 다만 특정 사안에 대해 비밀보장의 원칙을 준수하였는가 여부에 대한 판단이 필요한 경우에만 감사를 실시한다. 흔히 핀란드를 ‘신뢰 기반사회’라고들 한다. 해마다 각종 감사에 대비하며 그 책임 추궁에 긴장하는 관리자와 진땀을 빼가며 대응자료를 만드는 교사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며 감사와 신뢰 사회 간의 상관관계에 대해 골몰해보았다. 핀란드 학교에서는 한국과 마찬가지로 일 년을 위한 학교교육과정을 작성한다. 학교교육과정은 포괄적이고 선언적인 개념을 담는 틀로 자주 바뀌지 않는다. 대신 매년 ‘연간운영정보(lukuvuositiedot)’를 작성하는데, 이는 내부 교직원들이 실제 학급 운영 및 업무에 참고하기 위한 문서이다. 우선 이 연간운영정보는 학기 시작 전 교장과 교사들이 모두 모여 2, 3일간의 회의를 가진 후, 회의 기록을 바탕으로 교장이 작성한다. 교장이 작성한다는 것은 별도의 기안과 결재 과정을 갖지 않음을 의미한다. 또한 이는 학교운영을 위한 매뉴얼이기 때문에 책자로 인쇄하지 않고 구글 드라이브에 올려 필요할 때마다 열어볼 수 있도록 한다. 교구 구매 역시 일상적으로 이루어지는 수업 자료들은 한 번에 철저하게 계획하여 일괄 구매하는 것이 원칙이며, 특별히 수업 자료를 구매할
필요가 있는 경우에는 교장에게 예산 사용이 가능한지 구두나 메시지로 문의하고, 가능하다고 판단되면 교장이나 교사가 행정실 직원에게 역시 구두로 요청한다. 기안을 하고 품의를 요청하면서 누가 그 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갈등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

교사의 일과 업무분장: 책임은 덜어내고 교육과정

핀란드 교사들의 하루는어떨까?우리와무엇이 같고 다를까? 저마다 다른 일상이지만 그 안에도 보편성은 있다. 핀란드 교사들에게는 출퇴근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다. 분 단위로 지각이며 조퇴를 체크 할 일이 없으니 복무에 대한 행정부담이 없다. 주어진 수업과 업무에만 충실하다면 그 외에 근무 장소는 따로 정해져 있지 않다. 교무실이 작은 이유가 있었다.
잡 셰도잉(job-shadowing)으로 밀착해서 본 핀란드 교사의 하루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쉴틈 없이 바쁘게 돌아간다. 다만 그 바쁨의 내용에는 차이가 있었다.
초등 6학년 담임인 시루크는 대체로 7시 30분에서 45분쯤 출근한다. 8시부터 1교시가 시작되면 7교시 오후 2시 30분까지 수업을 진행한다. 수업 시간 동안 교사의 일과는 단조롭다고 느껴질 정도로 ‘오직’ 수업 관련 활동으로 꽉 채워져 있다. 함께 배치된 특수교사와 함께 개별적으로 혹은 집단으로 학생들을 지도 하느라 정신이 없다. 수업 틈틈이 전자행정시스템인 윌마(Wilma)에 학생의 수업관련 활동을 입력한다. 점심시간엔 잔반처리통이 잘 정리되었는지 잠시 살펴본다. 수업 후에는 업무분장으로 맡은 일들을 수행한다. 중학교 교사의 잡 세도잉 결과도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큰 차이가 없었다. 핀란드학교에도 업무분장이 있다. 다만 그 구성은 한국의 것과는 사뭇 다르다. 에스포 시에 있는 한 초등학교의 업무분장은 크게 학생자치, 체육, 국제활동, 교사전문성 신장으로 구분되어 있었다. 특히 학생자치활동의 세부 활동들은 모두 학생들의 교육활동을 지원하거나, 학생의 신체 및 정신건강을 위한 지원업무로 구성된다. 세부사항은 다르지만 대체로 초등학교 업무분장은 학생생활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에 비해
중·고등학교의 업무분장은 교육과정을 중심으로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교사의 공식적인 업무라는점에서 직무로 구분되므로 별도의 수당이 지급 되지는 않는다. 핀란드 역시 학교업무의 특성상 업무분장 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들에 대해서는 교사의 직무가 아니라고 판단하므로 추가수당을 지급하는 게 원칙이다. 차이는있지만 대체로 학교운영팀 회의 참석, ICT 관리, 도서관 관리, 음악실 관리, 학부모회 참가, 학교운영위원회 교사위원, 지원이 필요한 학생이 많은 반 등에 추가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모든 학교에서 교장은 학년이 끝나는 3~5월 시기에 교사와 일대일 면담을 갖는다. 이 면담에서 한 해의 운영이나 직장생활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개인 신상 등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담당하고자 하는 업무나 학년, 중등의 경우 희망 과목 등을 논의한다.
교장은 면담 기록을 정리한 후 학년·과목·업무 배정의 초안을 만들어 교사에게 제시하면, 교사들은이를 기준으로 서로 간에 최종 조율을 하게 된다. 핀란드 학교의 업무분장 배정은 ‘공정’(한국의 경우 공정성을 위해 학년 및 업무분장을 위한 점수제를 운영하고 있다) 보다는 교장-교사 간, 교사 간 ‘소통과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국가와 사회가 책임지는 안전

대부분의 핀란드 학교는 숲과 인접해 있으며 담이나 교문을 두지 않아 학교 건물과 인근 주택들 사이에 경계가 없다.

<사진 3> 중간놀이 시간

위아래가 붙은 우주복 모양 옷을 입은 아이들이 바닥에 뒹굴고 거침없이 나무를 타는 모습을 보며 우리들의 대화는 자연스럽게 안전에 대한 책임 얘기로 모아졌다. ‘아, 저러다 다치면 누가 책임지지?’ 경계 없는 저 장소에서 안전사고가 난다면 과연 누가 어떻게 책임질까를 두고 궁금증이 피어올랐다. 안전띠를 하고 순회를 하는 사람이 교사일지 학부모일지도 궁금했다. 한국에서 안전사고에 대한 걱정은 교사 및 학교로 하여금 기안과 결재를 생산하게 하는 영역이기도 하며 책임의 문제에서 매우 민감한 부분이다.
인터뷰에서 한 교사는 “교사가 학생 모두를 보고 있는 건 불가능하다.”라고 설명하면서, 이 개념이 핀란드 사회에서 일반적인 인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암시했다. 교사는 안전띠를 매고 순회하며 아이들의 놀이를 지켜보지만 위험을 미리 판단하며 특별히 제재하거나 끼어들지 않는다. 교사는 중간놀이 시간이나 교외 체험학습 등을 실시할 때 안전지도에
대한 사항을 일일이 기록하지 않으며, 포괄적인 학교규칙을 제시하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여긴다. 학생이 학교의 규칙을 지키지 않아 발생하는 사고는 학생의 책임으로 인식된다. 교사는 20여 년의 교사 경력 동안 안전사고로 인한 학부모 민원을 겪은 적이
없다고 했다. 낯선 얘기에 잠시 멍해졌다. 에스포에 있는 Jousenkaaren 초등학교의 경우에도, 학생들은 아침 수업시작 전 건물 안으로 들어올 수 없으며, 통학 과정의 모든 책임은 학부모에게 있다. 학교 일과 중 일어난 안전사고는 시설이 문제라면 시의 관리부가 책임을 지고, 학생이 안전수칙을 지키지 않은 것이라면 학생의 책임으로 여겨진다. 교사는 먼저 사건 확인서(학생 이름만 적는 수준)를 사고 학생에게 주어 병원에서 보험처리를 받을 수 있게 하며, 경위서를 수기로 작성하여 행정비서에게 제출한다. 유바스큘라 사범대부설 종합학교에서도 놀이터 시설로 인해 사고가 나면 시 관리부가 책임을 갖는다.
겨울철에도 중간놀이 시간에 얼음에서 노는 것을 권장하지만, 규칙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놀 수 없음을 교장이 학생 전체에게 분명히 설명한다. 이러한 학교 규칙은 웹사이트에 등재되는데, 세세하고 구체적이기보다는 상식적인 수준이다. 예를 들어 ‘다른 사람을 괴롭히지 않는다.’, ‘컴퓨터나 악기는 교사의 허락 하에만 사용한다.’ 등의 수준이다. 만약 규칙을지키지 않아 사고가 발생한 경우, 윌마를 통해 가정에 교사의 조치를 설명하면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이 가능한 것은 핀란드 사회에 내재된 안전의식과 문화에서 기인한다. 핀란드에서는 생명존중과 안전에 매우 민감하며 안전교육은 국가·사회적 차원에서 접근한다. 안전의 일차 책임은 각 개인 자신에게 있으며, 국가·사회는 철저한 안전교육에 힘쓴다.
안전띠를 매고 손을 들어 길을 건너는 교육을 시키는 모습은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생활용품점에는 밤길에 옷이나 용품에 부착하는 야광스티커 판매대가 가장 눈에 띄는 곳에 위치에 있다. 학교 안전사고를 두고 연일 교육청과 학교를 비난하며 책임 소재를 따지는 뉴스가 익숙한 우리의 모습이 겹쳐지며 다시 생각이 깊어질 수밖에 없었다.

‘낯선 곳에서 우리를 만나다’

핀란드 학교의 자율운영의 원칙은 단순하고 명쾌했다. 이들 자율행정의 기반에는 학교당사자들에대한 신뢰가 있었고, 신뢰는 학교 각 구성원들이 해야 할 본연의 역할에 대한 명확한 구분과 책임에 기초한다. 국가는 큰 틀에서 최소한의 것을 결정하며 지방정부에게 일임한다. 지방정부의 교육행정기관은 학교가 교육본연의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설이며 건물관리, 급식, 청소, 방과후 활동 등의 역할과 책임을 가져감으로써 학교를 지원한다. 공문과 감사의 자리에는 신뢰가 대신한다. 교장은 학교운영을 위한 행정의 총책임자로 권한과 함께 무거운 책임을 부여받는다.

<도표> 핀란드 학교의 행정체계

교장은 행정에 관한 실무를 직접 수행하며, 불필요한 기안 대신 수평적이고 느슨한 메일과 구두로 대신하여 교사들을 불필요한 행정 업무로부터 보호한다. 학교와 사회는 교사들이 본연의 활동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학생발달 문제를 심층 지원하며, 교사는 이들의 지원과 보호 안에서 교사 본연의 업무인 교육과정 개발과 수업 전문가로서의 활동에 집중한다. 그리고 이 모든 지원은 온전한 한 인간 주체로서의 학습자인 학생의 복지를 향해 있다.
일주일간 5개 지역의 학교를 돌며 14명의 관계자들과 인터뷰를 하는 강행군을 하며 우리는 매일매일 우리가 마주했던 낯설음에 때론 당황하고 때론 부러워하며 긴 밤을 이야기로 채워 넣었다. 누군가의 입에서 핀란드의 지원행정은 ‘우산같다’는 단어가 나왔다. 낯설음을 거두어내고 나니 그 거울에 비친 것은 우리의 모습, 우리의 현실이었다.
우리는 무엇이 다른가? 왜 다른가? 우리의 해법을 찾아 떠나는 길이 꽤나 멀어보였지만, 현장에서 아이들과 함께 어찌할 수 없는 열정에 몸을 맡기며 고군분투하는 교사들을 떠올리니 어쩌면 생각보다 꽤 가까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해법을 찾아 고쳐매고 시작하는 마음으로 다시 시작할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