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2020 겨울호(241호)

팬데믹 시대,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것들

정영철 (성동광진교육지원청, 교육장)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지난 1학기 수업은 온라인 (비대면) 중심으로 이루어졌고, 2학기 들어서도 비대면과 대면을 병행하는 혼합수업으로 진행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로 불가피하게 도입한 원격수업은 이제 전통적인 교실 수업을 대체하는 새로운 표준(new normal)이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코로나 감염 사태가 아직도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유사한 바이러스 감염 상황이 반복될지 모른다는 우려 속에서, 최근 들어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를 대비한 교육체제의 변화와 혁신에 대한 다양한 논의가 활발하다.
이 글에서는 올해 원격수업과 방역이라는 과제를 두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상황에서 우리 모두가 혹시 놓치거나, 무심코 지나친 것은 없는지, 알면서도 외면해버린 것은 없는지 되돌아보는 성찰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코로나19가 변화시킨 교육현장

코로나19 사태가 바꾼 것은 한둘이 아니다. 특히 교육은 가장 큰 변화를 겪고 있는 분야 중 하나이다. 올해 초 코로나19가 맹위를 떨치자 급기야 4월 9일에는 사상 처음으로 전면적인 온라인 개학이 이루어지면서 전통적인 등교수업 형태는 온라인 또는 온라인-오프라인이 결합된 형태로 바뀌었고, 그동안 보조적인 역할에 머물렀던 온라인 수업이 부각되었다.
사실 전면적인 온라인 개학이 가능할지 여부를 두고 우려가 컸고, 실제 시행착오도 있었다. 평소 경험이 부족했던 원격수업은 교사들의 헌신과 노력에 대한 인정과 여전한 아쉬움을 간직한 채 이제는 일상적인 교육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원격수업이 진행될수록 많은 학교에서 평소 학교수업에 침묵하던 학생들의 참여도가 높아지는 것을 경험하고, 새삼 학교의 중요성과 관계의 소중함을 재조명 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입을 모았다. 특히 글로벌 교육혁명의 촉발점으로서 원격수업의 가능성을 점쳐 보기도 했다.
지금 이 시점에서 분명해진 것은 코로나19가 전통적인 교육 시스템에 파열음을 내면서 새로운 교육방식을 재촉함에 따라 코로나19 이후 시대에 맞는 교사들의 역할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이다. 원격 수업의 효과성을 논하기에 앞서 코로나19가 지속 되는 위기재난 상황에서는 비대면 온라인 수업이 피할 수 없는 과제가 되었다. 반면 원격수업의 부담을 떠안고 정신없이 앞만 보고 달려온 교육현장에는 비대면 교육의 한계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지, 디지털 양극화의 격차를 어떻게 해결해갈 것인지 등이 여전히 숙제로 남아있다. 코로나19의 위협 속 에서 비록 마스크를 쓰고 생활하고 있지만, K방역이 어느 정도 성공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우리의 일상은 매스컴을 제외하곤 대체로 평온해 보인다. 그런데 우리가 더 심각하게 바라봐야 할 문제는 코로나 상황에서 소중한 삶과 시간을 무딘 시선으로 흘려보낼 수도 있는 우리 아이들이다. 홀로 컴퓨터나 TV 앞에 앉아서 학교생활을 배우다 보니 친구와 함께 어울려 지내며 배우는 관계성을 익히지 못할 수도 있다. 등교해서도 마스크 때문에 선생님과 친구들의 표정을 읽기 힘든 우리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모두의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그동안 교육관계자 모두가 가장 걱정했던 것도 교육과정의 실행이나 교과 진도가 아니라 코로나 이전 학생들이 친구들을 직접 만나 서로 부딪치며 경험했던 교육의 사회화 기능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한다는 문제였다. 이런 와중에도 고3의 경우 대입에 필요한 내신 성적 의 필요성 때문에 전일 등교를 강제하는 정책 결정이 유지되어 온 반면, 나머지 학생들은 간헐적 등교 수업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했다. 그러다보니 비대면 시대에 ‘학교란 무엇인가?’에 대한 끊임없는 물음이 제기되어 왔다. 다행히도 정부의 사회적 거리두기 1단계 완화 조치에 따라 10월 19일부터 일선학교의 등교수업이 전면 확대되었다. 학생수의 2/3까지 등교가 허용돼 초등학교 1학년의 경우 대부분 학교에서 매일 등교가 가능해졌고, 소규모 학교의 기준이 300명 이하로 완화됨에 따라 학교 상황에 따라서는 전 학년이 매일 등교할 수도 있게 되었다.

“집에 머물라.”고만 하지 말고, 안전한 학교를 아이들에게 돌려주자

과거의 전염병 대유행이 그랬듯이 코로나19는 사회의 명암을 더 짙게 만들었고, 거리두기를 할 수 없는 사회적 약자는 감염에 더 취약해졌다. 교육현장도 예외는 아니어서 가정의 기능과 역할의 수준에 따라 소외계층 아동들의 빈곤과 학습 격차는 점점 더 심화되고 있으며, 집안에 갇힌 채 가정폭력, 아동학대, 돌봄 공백, 식생활 위기, 게임 과몰입 등과 같은 위기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다. 반면 코로나 19 장기화로 방역당국은 연일 매스컴을 통해 “안전한 집에 머물러 달라.”면서 ‘사회적 거리두기’에 적극 동참할 것을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과연 방역당국의 호소처럼 아이들의 집은 바이러스의 위협으로 부터 안전한 공간이고, 폭력으로부터 보호해줄 안식처가 되고 있을까? 어쩌면 고립된 공간에 방치된 아이들에게 집이라는 곳은 안전한 대피소가 아닐 수 있다.
‘르네 지라르’1의 지적과 같이 재난은 위기에 취약한 현실을 드러나게 한다. 가정폭력으로 인해 자기 감정을 말로 표현하기도 어려운 아이들, 좀처럼 울지 않는 아이들에게 우리가 상상하는 집은 코로나19 보다 더 견디기 힘든 위기의 공간일 수도 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자행하고 있는 폭력과 학대로부터 아이들을 구해낼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일회성의 동정 어린 시선과 손길이 아닌 지속적인 관심과 지지일 것이다. 그래서 어쩌면 지금 이 아이들에게 최적의 안전한 공간은 바로 학교라는 생각이 든다.
학교는 집단 감염의 매개원이 될 우려가 다분하다는 전제하에 방역당국으로부터 표적 관리되어 왔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기초학력부진으로 비대면 수업이 힘든 아이들이나 가정으로부터 학대를 받으며 방치되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안전한 공간, 배움터로서 학교가 우선 기능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학교의 자율성 확대가 절실한 이유

지금 유럽은 예고된 겨울철 대유행이 현실화된 듯 코로나19 확진자가 급증하면서 재봉쇄 조치에 들어갔다. 우리 역시 대유행에 대한 우려가 여전하다. 안테나를 높이 세우고 ‘나를 따르라!’며 진두지휘하는 중앙방역대책본부 중심의 방역 대응체제는 ‘K방역’이라는 이름으로 세계의 표준이 되다시피 하고 있다.
이런 중앙정부의 지휘 체제에 다수의 국민들이 동의하고 있는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학교가 자율권을 행사하기란 매우 제한적이고, 학교의 자의적인 판단과 행동의 결과가 자칫 비난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부담감이 큰 것은 사실이다. 세계적 대유행 재난상황에서 학교의 자율성 확대가 자칫 “학교별로 학교장 책임하에 알아서 하라.”는 식의 책임 전가로 오인되지 않아야 한다. 학교의 상황이 제각각 다르고, 위기 상황에 대한 민감도 역시 그 누구보다도 학교가 예민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학교 상황에 맞게 일상적 학교 방역, 학년·학급별 시차 등교, 원격수업 전환 결정, 수업 시간 탄력 운영, 원격수업 방식, 등교 학년의 결정 등에 대해서는 학교구성원의 의견 수렴을 통해 학교가 자율적으로 결정하도록 하자는 의미이다. 비상 시기에는 담대한 사고와 행동을 이끄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물론 이에 따른 문제 상황이 발생할 경우 학교에는 관행적인 책임을 묻지 않는다는 이른바 면책이 전제되어야 한다.
현재의 교육현실을 방치하지 않기 위해서는 정치적 결단도 필요하지만 학교의 내부 동력으로 이를 가능하게 만들 수도 있다. 지금까지 교육정책에 맞춰 교육을 해 온 관행에 맞서 앞으로는 학교 상황에 맞게 교육정책을 선택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물론 방역은 중앙정부의 일관된 정책기조가 필요하겠지만, 학교 교육활동의 선택은 학교의 몫이 되어 야 한다. 이 기회에 학교의 자율성을 근간으로 학교 교육의 난제를 풀어가는 시도가 절실하다. 그래야만 학교라는 공간을 아이들에게 어떤 방법으로 돌려줄지 더 고민하게 되고, 그 속에서 교육의 다양성도 이끌어 낼 수 있다.

왜 실시간 쌍방향 화상수업을 해야 할까

요즘 ‘트롯신이 떴다’, ‘백 파더’와 같은 랜선 예능도 대중화되고 있고, 음악회를 비롯한 각종 랜선 공연도 일반화되어가는 것을 실감할 수 있다. 물론 랜선 공연과 예능에 참여하는 관중들과, 컴퓨터 앞에 앉아있는 아이들은 동기부여 측면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수업 상황에서 아이들의 몰입도를 이끌어내는 것은 응당 교사의 몫이다. 지금 세상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하고 있는지 매스컴의 변화가 주는 메시지를 읽어 내야 한다.
등교수업 상황과 가장 가까운 원격수업 방법으로 실시간 쌍방향 화상수업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이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모든 수업을 컴퓨터 모니터나 TV 앞에 모이게 해서 실시간 쌍방향 화상수업으로 진행한다면 이 역시 아이들에게는 고문일 것이다. 따라서 수업은 교사들의 만족도도 중요하지만 그에 앞서 학생들이 얼마나 만족하면서 수업에 응답하는지가 우선 고려되어야 한다. 이러한 이유로 평소 등교수업 상황에서 교사들은 하나의 수업방법이 아니라 다양한 수업모형을 적용해 온 것 아닌가? 그래서 먼저 실시간 쌍방향 화상수업이 왜 필요한지, 최소한의 시간은 어떻게 만들어낼 것 인지에 대한 학교공동체의 논의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본디 교육은 언어적 의사소통만이 아니라 비언어적인 표현(표정, 태도, 몸짓 등)을 함께 포함하여 아이들의 상태를 진단하고 그에 적절하게 대응하는 일련의 모든 활동을 포괄한다. 교실이라는 공간에서 우리는 늘 언어적, 비언어적 활동을 종합하여 아이들을 살펴왔고 그런 아이들을 가르쳐왔다. 교실수업 상황은 담당교사가 가장 잘 알 수밖에 없기에, 아이들의 전인적 성장을 돕는 최적의 조건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래서 우리 사회는 교사를 교육전문가라고 인정하는 데 동의해왔다. 적어도 화상을 통해서라도 1일 1회 이상은 아이들의 상태를 표정이나 목소리, 태도 등을 통해 판단하는 과정은 원격수업 상황에서도 이루어져야 하지 않을까?
원격수업과 등교수업을 두고 무엇이 더 효과적인가를 묻는다면, 응당 등교수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장기적인 비상 상황에서는 등교수업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접을 수 있어야 한다. 다만 정부가 앞장서서 모든 학교가 통일된 모습으로 원격수업이 전개되도록 강제한다면 자칫 학교현장의 반발이 뒤따를 수 있다. 지금은 학교 상황에 맞는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대응책을 마련하고, 각자 몸에 맞는 원격수업 방식을 다듬어가야 하는,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중요한 시기이기 때문이다.

가보지 않은 길,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코로나19 사태가 장기화되면서 우리 사회 전반이 가보지 않은 길(new way)에 적응하기 위해 몸살을 앓고 있다. 돌이켜보면 갑작스럽게 원격수업으로 전환되다 보니 힘겹게 돌파해 온 교사들의 헌신에 대한 언론과 학부모의 감사와 격려가 이어지기도 했고, 한편으로는 원격수업에 대한 불만이나 가정 돌봄의 피로감이 드러나기도 했다. 반면 아이들은 가정에 방치된 채 사회·경제적으로 고립되고 학습격 차가 심화되어 간다는 우려도 커지고 있다. 이런 현실 상황에서 학교는 이제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코로나19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가기를 기대할 것인가, 아니면 이러한 시대에 맞는 새로운 표준(new normal)을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인가.
요즘 관내 학교를 방문하면서 마주하게 되는 교실은 대부분 쌍방향 수업에 익숙해져 있고, 교사들이 태블릿 PC를 이용하거나 스마트폰과 미러링을 통해 다양한 수업방식을 만들어 내는 것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심지어 초등학교 1학년들도 줌 (zoom)으로 연결되어 실시간 쌍방향 화상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쓰럽기도 하다.

내년에도 코로나19에 대한 전망은 밝지 않지만 올해와 같은 혼란 속에서 원격수업이 시작되지 않기 위해서 학교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최소한의 여백을 만들어 내야만 한다. 이제는 코로나 때문에 할 수 없다고만 할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때이다. 학교가 만들어낼 여백은 비대면 시대에 할 수 있는 다양한 상상력의 실험들과 성공과 실패의 경험들, 그리고 미처 살피지 못한 부분을 성찰하는 것으로 채워지기를 기대한다. 아직 끝이 보이지 않는, 계속 반복될 수 있는 세계적 대유행 상황에서, 다양한 시선들이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모두에게 학교 시스템의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그동안 학교 여건과 교과 내용, 학습자의 상황 등을 고려한 원격수업 사례를 나누면서 땀 흘려온 현장 교사들의 열정이야말로 비대면 시대의 ‘교육 백신’이었다는 사실이다.

  1. 르네 지라르(Ren. Girard, 1923~2015) 프랑스의 정치평론 가, 철학자, 『희생양*1982』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