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슬 서울고등학교 교사
서울고등학교에는 학교의 오랜 전통과 함께 이어져오는 여러 프로그램들이 있는데, 대토론회가 그 중 하나이다. 대토론회는 매년 5월 1,2학년 재학생들 중에서 1차 원고심사와 2차 면접을 통하여 선발된 6명의 토론자와 교사, 학부모 그리고 졸업한 동문토론자가 한 자리에 모여 그 해의 주제에 대해 토론하는 행사이다. 1988년 이래 ‘서울고 문화 창조’라는 기치 하에 20년 간 교육적 현안에 대해 토론해 온 ‘교육 대토론회’는 올해 사회적, 인문학적인 부문까지 토론 주제를 확장하고 ‘서울고 대토론회’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바뀌었다. ‘서울고 대토론회’에서 토론할 주제는 학생, 학부모, 교사를 대상으로 3월에 주제 공모를 진행하는데, 올해의 주제는 ‘선거권 부여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어야 하는가’라는 청소년 참정권과 관련된 주제가 선정되었다. 매년 토론자들과 2차 면접 대상자들의 우수 원고를 모아 500부 가량의 자료집을 만드는데, 토론을 참관하는 약 400여 명의 재학생들에게 모두 배부하였다. 올해 자료집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토론은 CEDA 토론 방식으로 진행하되 대토론회의 상황에 맞게 순서 및 시간을 조절하였다. CEDA는 ‘교차질문형 토론협회(Cross Examination Debate Association)’의 약자로, CEDA 방식 토론은 이 협회의 이름을 따서 ‘교차질문형 토론’이라고도 한다. 교차질문형 토론협회는 1971년 미국에서 처음 발족되었는데, 이전의 토론방식이 주장과 반박으로만 이루어져 있어 토론자들이 각자 자신의 주장만 내세우고 상대팀의 말을 전혀 듣지 않는 토론이 이루어지고 있음을 비판하며, 토론자들끼리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도록 상대팀이 주장한 내용에 대해 질문하는 시간을 넣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상대팀 토론자가 말한 내용을 확인하고 상대팀의 논점이나 논거의 허점을 찾아내어 질문하는 ‘교차조사’ 단계가 삽입된 방식이 CEDA 토론이다.
대토론회가 실제 진행되면서도 토론자들 간에 서로의 주장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 그리고 상대편 주장의 논리적 허점을 제대로 짚어낼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교차조사 단계가 가장 흥미진진하여 방청객들의 호응도가 높았다. 그리고 방청객들도 토론자들에게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교차조사 시간을 마련하였는데, 토론자들이 교차조사하는 모습을 즉석에서 보고 배운 후 응용하여 질문하는 우수 질문자들이 많았고, 서로 질문을 하려고 손을 드는 바람에 7분이 빠르게 지나갔다. 대토론회 사회를 보고 행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걱정이 되는 부분 중 하나가 방청하는 학생들이 토론을 멍하니 바라보며 지루함을 느끼는 것인데, 토론 중간 중간에 방청객들에게도 교차조사의 기회를 부여하니 확실히 토론자들의 주장을 듣는 태도가 좋아졌다는 것을 무대 위에서도 느낄 수 있었다.
‘선거권 부여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어야 하는가’라는 토론 주제와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만 18세 청소년이자 본교 3학년에 재학 중인 박◯빈 학생을 대토론회에 깜짝 초대하여 본격적인 토론에 앞서 본인의 생각을 들어보는 시간을 가지기도 하였다. 박◯빈 학생은 정치인들이 아동, 청소년을 위한 정책들을 공약으로 내걸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가 청소년들이 참정권이 없기 때문이라고 주장하며, 청소년들에게도 참정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내용의 입론을 발표하고 후배들에게 큰 박수를 받았다. 본교의 교장선생님께서도 격려사에서 역사상 선거권은 확대되어 왔고, 선거권을 제한하는 ‘나이’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현 시점에 선거권 부여 연령에 대해 각자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토론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활동이 될 것 같다고 하시며 대토론회의 시작을 알려주셨다.
재학생 토론자로는 본교 2학년 최◯우, 1학년 이◯원, 김◯우 학생이 ‘선거권 부여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어야 한다.’는 찬성 측으로, 본교 2학년 유◯형, 서◯원, 강◯웅학생이 ‘선거권 부여 연령은 현행대로 만 19세로 유지해야 한다.’는 반대 측으로 토론에 참여하였고, 교사 토론자로는 본교의 국어과 김◯호 선생님이 찬성측으로 토론에 참여해 주셨다. 학부모 토론자로는 1학년 학생의 아버지이자 본교 39회 동문이기도한 심◯현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께서 토론에 참여해 주셨다. 그리고 본교 동문 중에서는 69회 졸업생이자 서울대학교 경제학과에 재학 중인 류◯석 학생과 70회 졸업생이자 연세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재학 중인 양◯원 학생이 토론에 참여해 주었다. 서울고등학교에서는 졸업생이 대토론회에 토론자로 참여하는 것이 영광스러운 일로 인식되고 있어서 졸업생 토론자를 구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오히려 동문들이 왜 자신에게는 연락을 하지 않았느냐고 서운해 하는 경우가 많아 추후부터는 동문 토론자도 모집 공고 후 면접을 통해 공정하게 선발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였다.
재학생 토론자인 찬성 측 최◯우 학생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대부분의 의무와 권리를 부여받게 되는 나이가 만 18세임에도 불구하고, 선거권만 행사할 수 없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주장하였다. 만 17세가 되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고 만 18세는 운전면허 취득, 혼인, 유언, 공무원 시험 응시도 가능하며 병역의 의무를 다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춘 나이가 된다. 우리나라와 같이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에서 선거권보장은 민주주의의 요체이며, 국민들로 하여금 주권을 행사할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다. 최◯우 학생은 이러한 상황을 정리하며 “대한민국에서 만 18세는 다른의무나 권리에 대해서는 인정받으면서도 선거권은 갖지 못하는 절름발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선거 연령 하향 조정은 세대 간 불균형 해소에도 기여할 수 있다는 점을 근거로 들었다. 참정권이 없는 세대가 자신이 참여하지 못한 정책의 결과를 그대로 수용하고 책임져야 할 때, 세대 간 불평등이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우리나라 복지정책의 문제점도 함께 지적하였다.
이에 반해 반대 측 서◯원 토론자는 민법상 성년의 연령이 만 19세이고, 선거 연령을 하향하려면 민법상 성년 연령의 하향을 함께 해야 하며 이와 연관된 수많은 법 개정이 불가피하다고 밝혔다. 그리고 청소년들이 자신의 결정권에 책임을 지고 자신의 결정이 국가에 영향력을 미칠 만큼 성숙하다면 청소년 보호법(소년법)의 개정도 논의되어야 할 것이며, 선거권 부여와 동반 과제로 청소년들에게 피선거권도 주어져야 할 것이라고 하였다. “독일의 안나 뤼어만 같은 19세 국회의원이 우리나라 고등학교 3학년 학생 중에서도 나올 수 있을까요?” 서◯원 토론자는 그리 낙관적이지 않을 것이고, 우리나라 상황 속에서 선거 연령 하향과 함께 닥칠 여러 가지 문제들로 인해 이는 시기상조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극단적이기는 하지만 학생을 정치에 이용하는 세력의 역사적인 예로 나치의 유겐트와 중국의 홍위병을 예로 들었다.
찬성 측의 이◯원 토론자는 1971년 미국에서 선거연령을 21세에서 18세로 낮출 것을 요구할 때 내걸었던 슬로건인 “Old enough to fight, old enough to vote.(싸우기충분한 나이이면 투표하기에도 충분하다.)”를 예로 들며 선거 연령 하향에 찬성하였다. 그리고 18세 청소년도 정치적 판단 능력이 있다는 예시로 1960년 4.19혁명과 그계기가 되었던 대구 지역 고등학생들의 2.28 민주화운동을 들었다. 이때보다 더 많은교육을 받고 스마트폰과 인터넷으로 정보를 얻고 활용할 수 있는 청소년들의 정치적 관심과 판단 능력을 의심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 측의 강◯웅 토론자는 SNS나 인터넷 등 학생들이 주로 정보를 획득하는 매체는 공신력이 없고 편향되거나 거짓된 정보가 많고, 학교나 학원 등에서 친구나 교사에 의해 선동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고등학교 3학년 수험생들이 학업에 방해를 받게 될 수도 있고, 선거관련법에 대한 지식이 부족한 상황에서 선거 분위기에 취해 청소년들이 선거법을 위반하여 벌금을 물게 되는 일이 발생할 수도 있다고 지적하였다.
재학생들의 이러한 주장들을 각각 교사와 학부모 토론자가 뒷받침해 주셨다. 김◯호 선생님은 찬성 측의 입장에서 현재 아이들을 부모님에게 도움을 얻는 현실 세계와 사이버 스페이스를 동시에 살아가는 ‘매트릭스 세대’로 비유하며, 가상 세계 속에서 청소년들은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펼치고 있으며 여론 파악도 성인을 뛰어넘는다고 하였다. ‘학종’ 세대에게 아무리 민주적 가치를 가르치더라도 그것을 주입식으로 가르치면 순응주의자들을 만들게 되고, 반면 질문과 토론이 있는 교육을 통해서는 고루한 주제를 다루더라도 상상력과 비판정신을 불러와 자기 지식을 주도적
으로 구성해 나가게 된다고 하시며, ‘집오리형 인재’에서 벗어나 학생들이 후보자들의 공약에 대해 토론하고 지도자를 뽑고 대한민국 공동체의 일원으로 가창오리가 되어 훨훨 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입론을 마무리하였다.
김◯호 선생님의 입론이 끝난 후 방청하는 학생들에게 자유 교차조사 시간을 주었는데, 한 학생이 “현재 학교에서 정치에 대한 교육이 전혀 이루어지지 않고, 이것을 도입하더라도 시행착오 등으로 시간이 걸릴 텐데 정치에 대한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학생들에게 선거권을 주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라고 질문을 하였다. 선생님께서는 학생들이 자신의 잠재력을 잘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안타깝고 학생들이 능동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찾아 나서야 한다고 하셨다. 보통 기성 세대와 청소년, 교사와 학생이 청소년 참정권에 대해 토론을 한다고 했을 때 그려지는 모습과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전반적으로 방청하는 학생들은 찬성 측에 많은 질문을 던졌는데, 대부분 ‘과연 우리가 선거권을 부여 받아도 될 정도로 성숙되어 있고 준비가 되어 있는가’와 관련된 것이었다. 선거 연령 하향에 대한 토론을 보며 학생들은 투표를 통해 자신들의 권익을 실현해야겠다는 생각보다 과연 내가 선거권을 올바르게 행사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정치에 대한 제대로 된 교육이 선거권 부여보다 먼저 이루어져야 할 것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대토론회가 끝나고 받은 소감문에도 이러한 내용이 많이 적혀 있었다. 이런 면모를 볼 때면 청소년들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성숙한 존재인 것 같다.
반면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이신 심◯현 학부모께서는 발달심리학과 뇌 과학적 관점에서 선거연령 하향의 문제점에 대해 PPT까지 준비해 오셔서 설명을 해주셨다. 만17세와 만 21세의 뇌 발달 사진을 비교하며, 18세까지 논리적인 사고 능력은 완전하게 발달하지만 사실을 검증하고 실행되었을 때 주변에 미치는 사회적인 파장과 영향까지 고려하기에는 미숙한 상태이며 감정적인 반응에 쉽게 호도되어 극단적인 행동반응이 유발될 수도 있다고 설명하셨다. 그리고 “진정한 정의는 주장과 주의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주변에 미칠 영향을 고려할 때 정당화되고 달성되었으며 발달하였다.”고 하시며, 자유 민주주의와 선거권의 진정한 의미 또한 자신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 아니라 신념에 대한 회의와 의심을 통해 나와 다른 타인 및 사회와 소통하는 능력에 있음을 강조하셨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이 이러한 토론 활동을 통하여 이성과 논리적 사고를 수련함으로써 성숙한 민주시민으로 성장해 나갈 것을 당부하였다.
류◯석 동문은 만 18세로 선거 연령을 하향하는 것에 찬성하는 입장에서 선거권 확대의 법적인 정당성과 실제적 정당성에 대해 밝히고, 게오르크 헤겔이 이솝우화에서 인용한 구절을 재인용하며 “여기가 로도스다. 여기서 뛰어라.”라는 말을 하였다. 이는 다다를 수 없는 환상에 정신을 낭비하기보다는 지금 우리가 발 딛고 있는 현실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의미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많은 ‘로도스’, 즉 바꿀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하는데, 때때로 ‘로도스’가 아님에도 거짓된 ‘로도스’에 갇혀 변화를 거부하기도 한다. 만 18세의 청소년들이 자신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하는 중요한 정치적 논의에서 최소한의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권리를 박탈당하는 것은 ‘로도스’가 아니므로, 로도스를 향한 여행을 시작하자고 입론을 마무리하였다.
반면 양◯원 동문은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들을 예시로 들며 선거권을 부여할 조건이 마련되지 않았고 교육환경도 준비되지 않았으며 수많은 부작용들로 인해 사회적혼란이 일어날 것이라고 지적하였다. 일례로 만 18세를 대상으로 한 무분별한 선거유세를 어떻게 제지할 것인지, 학교 내의 정치 활동에 대한 준비도 미비한데다가 학교 밖에서의 정치 활동의 규제 범위로 부정확한 현 시점에 대해 설명하였다.
지면의 부족으로 각 토론자의 주장 중 일부만을 실었으나 실제로는 더 많은 논점들과 각 주장에 대한 실질적인 근거들이 대토론회에서 오고 갔다. 찬성 측의 김◯우 학생과 반대 측의 유◯형 학생은 대토론회에서 쟁점이 되었던 논점들을 즉석에서 정리하여 각각 반박과 최종 결론 발언을 하였다. ‘선거권 부여 연령을 만 18세로 낮추어야하는가’라는 주제로 진행된 제21회 서울고 대토론회는 찬성 측의 최◯우 토론자가 대상으로 선정되면서 마무리되었다.
필자는 서울고등학교에 재직하면서 2015년과 2016년에 교육대토론회를 담당하여 진행 및 지도하였고 올해에도 서울고 대토론회를 담당하게 되었다. 확실히 이전에 근무하던 학교에 비해 서울고등학교는 인적·물적 자원이 풍부하여 이러한 대토론회도 어렵지 않게 개최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이 서울고등학교에서만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전 학교에서도 학부모와 함께하는 토론대회, 동아리들이 함께하는 토론대회 등을 기획하고 실시하면서 많은 성과를 낼 수 있었다. ‘성과’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학생들이 토론을 준비하고 실제로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견을 논
리적으로 전달하는 활동을 하면서 얻게 되는 자신감은 상상을 초월한다. 학부모와 교사, 학생들이 서로 토론을 하면서 서로의 생각과 말하는 모습에 놀라고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기도 한다. 이러한 토론이 수업을 포함한 학교 현장에서 더 자주, 그리고 많이 시행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글을 마무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