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빠르게 바뀌고, 그에 뒤질세라 교육 현장도 무서운 속도로 변하고 있다. 요즘 같은 세상에 판서라니, 시대에 뒤떨어진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을까 걱정이다. 다양한 매체와 방법을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매체와 기법이 발달하고 다양화할수록, 그것을 하나로 꿸 수 있는 판서의 힘이 필요하리라 생각한다. 그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Ⅰ. 글씨를 잘 써야 판서를 잘할 수 있나요?
필자도 어지간히 악필이다. 군에 있을 때 선임병이 나에게 “너는 암호병으로 가라. 글씨 자체가 암호야. 알아볼 수가 없어.” 라고 이야기할 정도였다. 그런 상태로 교직에 나왔으니 당연히 판서가 두려웠고, 되도록 판서를 하지 않으려 했다. 지금도 글씨는 여전하지만, 판서를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교사가 되고 10년 가까이 연극반을 지도했다. 사립학교 공채 자기소개서에 “대학 다닐 때 연극을 즐겨 봤습니다.”라고 썼더니 옳다구나 하고 연극반 지도를 맡겼다. 나는 연극에서 두 순간을 특히 좋아했다. 막이 오르기 직전, 무대와 객석이 깜깜한 그 짧은 시간에 오늘은 어떤 연극이 펼쳐질까 상상하는 것이 설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나고, 배우들의 동작이 멈춘 상태에서 불이 꺼지는 그 시간도 좋았다. 그 장면이 사진처럼 머리에 박혀서,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연극반을 맡아 지도할 때도, 마지막 장면에 많은 공을 들였다. 그 한 장면이 관객들의 머리에 각인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다른 장면에서는 배우들이 자유롭게 연기할 수 있도록 허용했지만, 마지막 장면만
큼은 내가 배우들의 손짓 하나 눈짓 하나까지 그림으로 그렸다. 어떤 작품에서는 멈춘 장면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움직이는 상태에서 끝이 나기도 했지만, 어쨌거나 그것은 하나의 인상 깊은 그림이 되어야 했다.
그런 강박이 수업에도 적용됐다. 마치는 종이 치는 그 순간의 그림이 학생들 머리에 박힌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멋지게 마칠까를 고민했다. 시간에 쫓겨서 부랴부랴 “오늘은 여기까지…….”라고 말하는 게 싫었다. “반장, 어디까지 했지?”라고 묻는 건 더 싫었다. 그래서 한 시간 단위로 기승전결을 갖춘 수업을 구성하려고 애를 썼다.
그러려다 보니 두 가지 준비가 필요했다. 시간 계획과 공간 설계다. 50분에 딱 맞춰서 시간을 계획하고, 그것을 체계적으로 판서하기 위해 설계도를 그렸다. 그래서 한 시간의 수업이 끝날 때면, 그 시간에 함께 이야기한 내용들이 칠판에 일목요연하게 정리될 수 있도록 했다. 아래 그림은 방과후수업으로 ‘비문학 베껴 쓰기’ 강좌를 열었을 때, 첫 시간에 판서한 내용이다.
베껴 쓰기가 왜 도움이 되는지를 한 시간 동안 안내했는데, 고등학교 수업이라 어쩔 수 없이 수학능력시험과 연관지었다. 설명 내용을 위의 그림처럼 판서하고, 마치기 전에 이 판서를 활용해서 이렇게 정리했다.
이번 시간에 살펴본 것처럼, 독서(비문학) 영역의 문제를 잘 풀기 위해서는 두 날개가 필요합니다. 푸는 힘과 읽는 힘입니다. 여러분은 조급한 마음에 푸는 힘부터 기르고 싶겠지만, 먼저 읽는 힘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읽는 힘을 기르기 위해서는 어휘력, 독해력, 배경지식이 골고루 필요한데 이것들은 서로 시너지를 발휘해서 점점 더 성장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건 한 번 봤다고 머리에 기억되지 않습니다. 날마다, 주마다, 달마다 되풀이해야 합니다. 그렇게 가로 세로로 꼼꼼하게 되풀이한다면, 여러분은 더 촘촘하고 튼튼하고 넓은 그물을 갖게 됩니다. 그런 그물이 있다면 지문을 한 번 읽더라도 더 많은 물고기를 잡게 될 것이며, 그래야 푸는 힘을 마음껏 펼칠 수 있습니다. (팔을 크게 휘저어 판서 내용 전체를 가리키면서) 이런 것이 바로 (손가락을 뻗어서 학습목표를 가리키면서) 여러분이 갖추어야 할 그물입니다. (순간, 마치는 종이 친다.)
나는 수업 중에는 판서를 지우지 않기에 수업이 끝나면 판서한 내용이 그대로 남게 된다. 위에서 보듯이 팔을 크게 한 번 휘저어 칠판에 가득 찬 판서 내용을 잡은 다음, 손가락으로 학습목표를 가리키면서 “오늘 배운 이러한 내용이 바로 이 목표와 연결이 됩니다.”라고 말하는 순간 마치는 종이 치는, 그런 수업을 꿈꾸고 있다. 판서의 핵심은 치밀한 설계이다.
Ⅱ. 다른 사례들은 어떤 것이 있나요?
사실 내가 하는 판서는 크게 내세울 것은 못된다. 구글 이미지 검색에서 ‘판서’를 찾으면 정말로 놀라운 그림들을 볼 수 있다. 그런 분들에 비하면 내 판서는 참으로 어설프다. 그래도 몇 가지 사례를 더 보여드린다면 이런 것이 있다.
학생들은 고전 작품을 어려워한다. ‘상춘곡’을 수업할 때는 낱말과 구절 풀이가 적힌 자료를 미리 나눠주고, 칠판에 위와 같이 그림을 그리면서 함께 읽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상춘곡 전체를 암송하면서 칠판에 있는 그림을 하나씩 짚어가며 정리했다. 칠판에 이미 판서를 해 놓았으니, 외우는 일은 사실 그리 어렵지 않다. 하지만 효과는 대단하다. 그렇게 한 번 하고나면 학생들이 교사를 보는 눈빛이 상당히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업을 하면 좋은 점이 또 있다. 상춘곡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게 된다. 작가는 봄을 맞이하여 여기저기 다니면서 감상한다. 그런데 처음에 마당에 있을 때도 석양이었고, 정자를 지나 시냇가에서 술을 한 잔 하고, 다시 산 위로 올라가도 역시 석양이다. 공간으로 상당히 먼 거리를 이동하는 동안 시간은 멈춰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그림의 왼쪽 위에 있는 것 처럼 작가는 방 안에 앉아있다. 그리고 ‘지금쯤 여기에 가면 이렇고, 저기에 가면 저렇겠지.’라면서 상상을 더해서 창작한 글일 것이다.
그런 이야기까지 덧붙이고, 종이 치면 이 그림을 복사한 인쇄물을 학생 수만큼 교탁에 남겨 놓고 나온다. “수업을 잘 들어서 주는 선물입니다. 가져가세요.” 그리고 종소리의 여운이 끝나기 전에 교실 문을 열고 유유히 나온다.
좀 독특한 사례도 있다. 2010년부터 했던 수업인데, 일 년 동안 수업 시간에 많은 글을 쓰고 그걸 엮어서 각자 한 권의 책으로 만드는 활동이다.1) 학생들이 글쓰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잘 알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들은 각자 평균 70쪽 정도의 책을 만들었다. 많이 쓴 아이는 230쪽을 쓰기도 했다. 그렇게 하려면 동기 부여가 중요한데, 아이들과 만나는 첫 시간에 ‘배울 수 있는 용기’라는 학습목표로 다음과 같은 수업을 했다.
글쓰기에서 가장 힘든 점은 ‘용기’이다. 글을 쓰려면 필연적으로 자신의 삶을 고백할 수밖에 없는데, 아이들은 그걸 무척 힘들어한다. 그래서 용기가 필요하다. 아이들의 용기를 이끌어 내기 위해서, 먼저 교사가 용기를 내야한다. 그래서 한 시간 동안 줄곧 내 이야기를 했다. 그때 들려 준 이야기는 대체로 다음과 같다.
•첫 번째 가지: 어릴 때 풀죽을 끓여먹을 만큼 가난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산으로 들로 싸돌아다니며 먹거리를 찾아 다녔다. 그때 거친 음식을 먹고 부지런히 뛰어다닌 덕분에 튼튼한 체력을 갖게 되었다.
•두 번째 가지: 초등학교 때 기능직 공무원으로 일하시는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다녔다. 새파랗게 젊은 초임교사가 아버지에게 반말을 하는 것을 목격했고, 그 선생님에 대한 복수심 때문에 선생이 되겠다고 결심했다.
•세 번째 가지: 학창 시절에 몹시 게을렀다. 공부하기 싫어서 꾀를 부리다가 수업 내용을 그림으로 정리하는 방법을 생각해 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마인드맵이었다. 교단에 서 있는 지금까지도 마인드맵은 큰 힘이 된다.
•네 번째 가지: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두메산골에서 해가 지도록 혼자서 지내야 했고, 그 기억 때문에 외로움에 대한 공포가 생겼다. 교사가 되고 나서 수업에서든, 학급에서든, 선생님들을 상대로 하는 연수에서 강의를 하든, 정말로 열심히 노력한다. 외롭지 않으려고……. 버림받지 않으려고…….
이처럼 삶의 부끄러운 장면들과, 그것이 오히려 어떻게 힘이 되었는지 이야기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송곳을 들어 보이고 이렇게 말했다.
이게 뭘까요? 이건 부끄러움이요, 상처입니다. 누구나 삶의 부끄러움과 상처가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모두들 저마다 부끄러운 상처를 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이 부끄러움과 상처란 녀석은 품에 품고 숨기려고 하면 할수록 여러분을 더욱 아프게 찌를 겁니다. 하지만 이걸 밖으로 내놓으면 더 이상 여러분을 아프게 찌를 수 없습니다. 더군다나 이걸 글로 쓰면 상대방의 심금을 울릴 수 있는 힘이 됩니다. 오늘은 한 시간 동안 내 이야기를 했습니다. 정말 부끄럽고 상처가 많은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들으니 어떤가요? 앞에 있는 내가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나요? 나를 비웃으려는 마음이 생기나요? 그렇지는 않을 겁니다. 그 부끄러움과 상처들이 바로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는 걸 여러분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움과 상처가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이걸 평생 가슴에 품고 아파하며 살아갑니다. 누군가는 드러내고 벗어납니다. 또 어떤 이는 글로 써서 다른 사람에게 감동을 줍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건 여러분의 선택입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가슴에 꽂힌 송곳을 빼낼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변할 수 있습니다. 용기 있는 사람만이 삶의 부끄러움과 상처를 통해 소중한 깨달음을 배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학습목표는 ‘배울 수 있는 용기’였습니다.
학기말 평가로 실시했던 수업도 있다. 수업 평가는 어떻게 받고 있는가? 종이에 써서 내도록하면 교사가 그걸 일일이 읽어야 하니 번거롭고, 또 학생들로서는 다른 친구들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발표를 하면 내용이 날아가 버린다. 그래서 마인드맵 판서를 활용해 봤다.
먼저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얘기를 5분 정도 생각하도록 했다. 그리고 칠판에 마인드맵 몇 마디로 간단히 적고 발표하게 했다. 그렇게 한 명씩 채워나가면, 발표가 끝날 때쯤 칠판이 가득 찬다. 그럼 나는 그걸 가지고 전체적인 평을 한다. “이번 1학기 수업에서는 이런 점은 이랬고, 저런 점은 저랬군요. 이걸 바탕으로 2학기에는 이렇게 하면 더 좋겠네요.”라고…….
Ⅲ. 모든 수업을 이렇게 해야 하나요?
결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나도 늘 이렇게 수업하지는 않고, 학생들이 되도록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수업을 구성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하지만 내가 주도해서 이끌어 나가야 하는 수업에서는 이렇게 정리하곤 한다. 그리고 학생들 활동 중심의 수업을 할 때도, 되도록 그 길잡이가 될 수 있도록 판서로 정리를 하려고 애를 쓴다.
다음은 고려 말에 이규보가 쓴 ‘이옥설’이라는 글이다.
행랑채가 퇴락하여 지탱할 수 없게 된 것이 세 칸이었다. 나는 마지못하여 이를 모두 수리하였다. 그중의 두 칸은 앞서 장마에 비가 샌 지가 오래되었으나, 나는 그것을 알면서도 이럴까 저럴까 망설이다가 손을 대지 못했던 것이고, 나머지 한 칸은 비를 한 번 맞고 샜던 것이라 서둘러 기와를 갈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 수리하려고 보니, 비가 샌 지 오래된 것은 그 서까래, 추녀, 기둥, 들보가 모두 썩어서 못 쓰게 되었던 까닭으로 수리비가 엄청나게 들었고, 한 번밖에 비를 맞지 않았던 한 칸의 재목들은 완전하여 다시 쓸 수 있었던 까닭으로 그 비용이 많지 않았다.
나는 이에 느낀 것이 있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라는 사실이다. 잘못을 알고서도 바로 고치지 않으면 곧 그 자신이 나쁘게 되는 것이 마치 나무가 썩어서 못 쓰게 되는 것과 같으며, 잘못을 알고 고치기를 꺼리지 않으면 해(害)를 받지 않고 다시 착한 사람이 될 수 있으니, 저 집의 재목처럼 말끔하게 다시 쓸 수 있는 것 이다. 그뿐만 아니라 나라의 정치도 이와 같다. 백성을 좀먹는 무리들을 내버려 두었다가는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나라가 위태롭게 된다. 그런 뒤에 급히 바로잡으려 하면 이미 썩어 버린 재목처럼 때는 늦은 것이다. 어찌 삼가지 않겠는가.
짧고 쉬운 글이라 설명은 거의 하지 않았고, 그와 같은 형식으로 학생들도 자신의 경험을 담아서 한 편의 글을 쓰도록 했다. 그때 아래와 같이 간단하게 판서를 했는데, 이런 길잡이가 있으면 학생들이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끝으로 한 말씀 덧붙이자면, 교사는 결코 판서를 자랑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그것은 다른 영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토론을 열심히 공부한 선생님이 “내가 토론의 진수를 보여주겠어.”라고 작정하고 토론의 규칙을 철저하게 적용하려고 든다면, 그건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학생과 수업을 죽이는 일이다. 그래서 토론을 배운 분들은 토론을 버려야 한다. 다만 이것 하나만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학생들에게 토론을 가르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학생들에게 어떤 변화를 이끌어야 하는가? 그 알맹이만 살리고 토론의 기술 자체는 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판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깔끔하고 멋지게 판서하는 것 자체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것에만 매달린다면, 판서는 살지만 수업은 죽게 된다. 이 판서를 통해서 수업을, 그리고 학생들을 어떤 방향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가? 그것만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세상이 빠르게 변하고 있다. 매체와 기법이 넘쳐나는 세상에 웬 판서 타령이냐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매체와 기법이 넘쳐날수록, 오히려 판서가 더욱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판서는 수업의 지도이며, 학습목표는 나침반과 같기 때문이다. 지도가 명확하고 나침반이 정확하다면, 길을 잃을 염려는 없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