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홍길 선정고등학교 교사
엄지족들의 독서?
다문화중점학교를 운영하면서 주말을 이용해 학생들과 같이 체험학습에 나선다. 교
학생들은 버스에 오르자마자 휴대전화를 만지기 시작한다. 남학생들은 주로 게임 에 몰두하고, 여학생들은 이어폰을 꽂은 채 음악을 듣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이다. 휴대전화가 없는 학생 몇은 창밖을 응시하며 자연을 감상한다. 책이나 단어장을 드는 학생은 거의 없다. 수행평가 때문에 마지못해 책을 읽어야만 하는 이른바 엄지족 이다.
2015 개정 교육과정의 총론에 ‘독서교육 강화’라는 말이 보인다. 자라나는 학생 들에게 독서교육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그러려면 우선 읽어야 한다. 그 후 토의하고 느낀 점을 글로 적으면 더욱 효과적이리라.
‘한국어의 힘’
지난 2학기 때 가르친 과목은 ‘독서와 문법’이었다. 다양한 읽기 자료도 있지만, 국어문법 위주로 수업이 진행된다. 품사와 문장성분, 음운변동, 문장의 구조 등 머 리가 아픈 내용들로 가득 찼으나, 내신은 물론이거니와 수능에서도 간과하면 안 되는 과목이다. 그러다보니 어떻게 하면 학생들에게 문법에 대한 흥미를 줄 수 있 을까 고민하게 된다.
교과서에 ‘한국어의 힘’이라는 수필이 읽기 제재로 등장한다. 중국의 동북삼성 을 다녀온 국어학자 한 분이 한국어의 높아진 위상에 대한 체험을 쓴 글이다. 그는 한국어의 신장속도가 대단하다며 ‘신천지가 전개되도다.’라는 표현을 써서 그 감흥 을 술회하고 있었다. 이 말은 기미독립선언서에 나오는 것으로, 광복의 염원을 담 고 있는 표현이다.
지은이는 다롄[大連] 외국어대 한국어과에 강의하러 간 경험을 언급했다. ‘안녕 하세요.’라는밝은소리로합창인사를한뒤,특강90분내내주의를기울여집중 하는모습을보면서한국어가깊게뿌리를내린게분명하다고말했다.전세계에 서 한국어를 배우는 사람들이 점차 많아지고 있음을 보면서 모국어의 영광이 지속 되기를 갈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교과서에 나온 ‘한국어의 힘’은 10여 년 전에 쓴 글이다. 그때와 지금을 비교하면, 한국어의 전파속도가 특히 동남아에서는 광풍이 일 정도이다. 중·고교에서 한국어 수업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태국은 대학입시에 서 제2외국어로 한국어를 추가했다. 1년에 1백여 명씩 선발된 한국어교사들이 태 국으로파송된다는기사는이제그리낯설지않다.베트남또한한국어열풍이거 세다. 베트남 현지에서 치러지는 ‘삼성고시’가 단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교과서 위주의 1차시 이후, 2차시에는 국가별 한국어능력시험(TOPIK) 응시 현황 표와 한국어 열풍의 근원지인 태국 소식 등을 소개하는 PPT를 수업자료로 만들었 다. 더불어 2016년 9월부터 3개월 동안 베트남의 현지 중학교에서 한국어와 한국 문화 등의 수업을 하면서 보고 들은 바를 수업자료에 넣었다.
‘성정기’ 오빠의 의미
전국에서 선발된 26명의 교사가 수도 하노이의 13개 학 교에 배치되었다. ‘응우옌 주’ 중학교는 관광지 호안끼엠[환 검(還劍)의 베트남어 발음]에서 엎드리면 코 닿을 데에 자 리했다. 많은 관광객들이 몰려오는 곳이기에 호수의 벤치에 앉아 있으면 여러 나라의 외국어를 자연스레 접할 수 있다. 2천여 명이 다니는 이 중학교에서 2주 동안 수업참관을 하면서 책상 위에 적힌 ‘성정기 오빠, 리영석 오빠’라는 낙서 를 보았다. ‘오빠’라는 단어는 이제 K-pop을 좋아하는 세계 젊은이들이 알아야 할 필수단어로 자리매김했다.
‘성정기’는 유명인사라 쉽게 유추할 수 있었는데 ‘리영석’이 문제였다. 처음에 북한청년이 아닌가 오해했다. 지인들에게 물어본 결과, 탤런트 겸 영화배우인 이종 석으로 판명됐다. 학교에서 한국어를 전혀 배우지 않은 학생들이 드라마를 좋아한 나머지 그려서 쓴 것이었다. 수업시간에 한글을 공부한 적이 없지만 관심이 많은 이 학교 학생들에게 먼저 한글날의 의미를 설명한 다음, ‘전 세계에서 가장 단순한 글 자이며 가장 훌륭한 글자’, ‘전통 철학과 과학 이론이 결합한 세계 최고의 문자’라는 외국학자들의 한글 예찬을 소개했다. 하노이의 문묘(文廟) 비석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듯이 한글 또한 올라갔다고 설명하자 집중도는 더해졌다.
세종학당에서 동영상으로 제공한 자음과 모음의 발음을 따라하게 했고, ‘한글자 모표’를 칠판에 붙인 채 유인물을 만들어 자모쓰기에 이어 단어쓰기까지 하게 했 다. 그러는 사이 통역선생님이 일일이 돌아다니며 자기 이름을 한글로 유인물 위 쪽에 써주기도 했다.
한국어 수업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을 넘어 이제는 학교 선생님들의 반응이 미 세하게 감지되었다. 수업에 참여한 담임교사는 학생들과 같이 발음을 하고 단어를 쓰면서 재미있다고 반응했고, 이를 전해들은 동료교사들은 통역과 내가 하는 대화 를신기하다는듯이들은후,어느정도의시간을투자하면한국어를배울수있느 냐는 질문도 스스럼없이 할 정도였다.
대한민국·떡볶이·짜장면
수업이 없는 날에 찾은 동쑤언 시장의 식당가에서는 ‘하루하루’라는 음악이 흐르고, ‘대한민국’이나 ‘안녕하세요’가 적힌 티셔츠를 입고 다니는 학생들도 간간이 눈에 들어왔다. TV의 영향으로 한글을 창제한 사람이 세종대왕임을 알고 있는 중학생도 있었다. 학교 매점에서 김밥은 불티나게 팔렸고, 교문 밖 가게에서는 ‘떡볶이’와 ‘짜장면’을 한글로 크게쓴후,그밑에베트남어로작게표기해학생들에게팔고있었다.
어느 날, 한 학생이 수업시간에 예상보다 글씨를 멋들어지게 쓰기에 물었더니 인터넷을 통해 한국어를 배웠다는 것이다. 그 학생은 부모와 함께 서울과 제주도 를 다녀왔다고 자랑스레 얘기했다. 다른 학생들은 한국에 가서 드라마 속에 나오 는 예쁜 언니와 오빠들을 만나고 싶고, 제주도에 가보는 것이 꿈이라고 스스럼없 이 말했다. 짱띠엔 백화점 부근의 대형서점에도 몇 번 갔다.
어학 코너에는 영어 서적이 대부분이었고, 프랑스어와 일본어 관련 책이 그 뒤를 이었다. 한·베사전과 관련 서적도 몇 권 보였으나, 일본어의 그것에 비해 현저하 게 차이가 있었다. 오래전부터 세계 곳곳을 두드리며 자국어를 전파한 일본사람들 의 치밀함이 여실히 드러났다.
한류의 첨병은 케이팝
파견근무를 마치기 며칠 전에 K-pop 경연대회를 개최하게 되었다. 짧은 공고 기간에도 8개 팀이 접수를 했다. 최고상인 대상 상품으로는 ‘초코파이’ 몇 상자가 고작이었다. 이른바 급조된 대회였다. 그러나 1백명 정도가 들어갈 수 있는 학교 대강당에 2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들었다.
학생들은 무대에 등장해 ‘뱅뱅뱅’과 ‘파이어’, ‘치어업’, ‘픽미’ 등을 불렀다. 특히, ‘픽미’ 공연 때는 대부분의 학생이 따라서 불렀는데 그 소리가 강당을 삼킬 정도였다. 다른 학교에서 온 심사위원들은 우열을 가리기 어려울 정도로 대단하다면서 마치 한국의 중학교에서 열린 대회 같다고 소감을 말했다. 40분의 시간으로 끝났으나 평생 잊을 수 없는 행사로 각인될 것만 같았다.
누가 뭐래도 K-pop은 한류의 첨병 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세계의 젊은이들을 더욱 역동적으로 만들어 주는 뭔가가 여기에는 스며들어 있다. 현재 베트남에는 20여 개 대학에서 수천 명의 학생들이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데 한국어과 졸업생은 100%의 취업률을 보여 지원자 수가 해마다 늘어나고 있다. 외국어 선호도에서 식 민지 언어였던 프랑스어를 이미 제쳤고, 최근에는 일본어를 뛰어넘을 정도다.
한편 미국에서는 주로 공립학교에서 정규과목으로 또는 방과후 희망자를 대상으로 한국어반을 개설해 오고 있으며, LA세종학당의 경우 초급반 수강생의 90%가 다른 인종들로 이뤄져 있다고 한다. 프랑스 파리의 한국문화원 앞은 한국어 를 배우려는 학생과 직장인들로 붐비고, 한국어가 정식학과로 개설된 대학 또한 적 지 않은데다 제2, 제3 외국어로 채택하는 고등학교까지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누리 세종학당(www.sejonghakdang.org)’과 ‘세종학당재단(www.ksif. or.kr)’에도 해외에서 접속하는 사례가 빈번하다고 한다.
독서를 통한 진로 찾기
교사가 체험한 사례로 수업을 진행하기에 학생들은 졸지 않고 화면에 집중하고 비슷한 체험을 한 학생은 즉석에서 소감을 발표하기도 한다. 그래서 이런 수업은 역동적일 수밖에 없다.
수업의 말미에서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20년 후쯤 지구촌 곳곳을 누비는 세계 인이 되라고 역설한다. 태국·베트남·인도네시아의 중·고교에서 한국어 교사를 할 수도 있고, 아프리카의 오지에서 인술(仁術)을 펼칠 수도 있으며, 남미 등지에서 한식당 등의 사업을 할 수도 있을 거라고 예까지 들어 설명한다. 좋은 대학에 가야 한다는 말만 매일 듣다가 모처럼 생뚱맞은 얘기를 들어서인지 학생 가운데 일부는 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한류로드’, ‘세계 각국 문화와 한류열풍’, ‘한국인만 모르는 다른 대 한민국’ 등 관련 분야의 참고도서 몇 권을 소개해 준다. 도서관이나 서점으로 가서 더 관심을 가져보라는 의도이다. 학습한 내용을 바탕으로 독서를 통해 다양한 지 식을 습득한 후, 새로운 가치를 생성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서 미래사회에 대비하 면 좋겠다면서 수업을 마친다.
수업시간에 공부한 내용이 자신의 진로·진학과 관련되어있다면, 독서를 통해서 보다 이와 관련된 깊고 다채로운 내용을 습득할 수 있기에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 둘 수 있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