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2019 가을호 (236호)

제4차 산업혁명 시대,
학교와 교사가 과연 필요할 것인가

제4차 산업혁명은 미래시제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이다

세계경제포럼 의장인 클라우스 슈밥은 다보스포럼에서 ‘인류가 새롭게 협력하지 못하면 인류는 비극을 맞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해 내려는 듯이, 미국과 중국의 경제 주도권, 일본의 무역 질서 파괴는 지구촌을 긴장시키고 있다.

과연 제4차 산업혁명은 인간을 파멸의 길로 몰아갈 것인가? 페이스북의 설립자 마크 저커버그(Mark Zuckerberg)는 4차 산업혁명이 결국은 ‘인류를 돕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하였다. AI가 인간 일자리의 상당 부분을 대신하게 되겠지만, 잃은 일자리보다 더 많은 일자리가 새롭게 생겨나고 인공지능이 할 수 없는 일도 존재하며, 또한 기술의 발전과 비례하여 이 세상은 아날로그적 감성이 더욱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류는 미래에 대한 지나친 걱정을 거두고 긍정적 마인드로 문제 해결에 전념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필자는 얼마 전 어느 사범대학에서 주최한 ‘제4차 산업혁명과 미래교육’ 워크숍에 발표자로 참가했데, 대학생들의 가장 많은 질문은 제4차 산업혁명 시대에 과연 ‘학교와 교사가 필요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범대생으로서 교사가 되기 위한 준비에 온 힘을 쏟아도 되는지, 지금이라도 다른 방향으로 길을 바꾸어야 하는지 결정하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필자는 두 가지 길 모두 옳다고 답했다. 교사가 되기 위한 길이든 새로운 일을 준비하는 길이든, 미래의 세상에 맞설 수 있는 역량을 스스로 높이도록 전력을 다하면 될 것이라고 결론을 맺었다.

교육혁명과 교실혁명의 길은 무엇인가

혁신은 끝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시간이 정지하지 않는 한 진행형이다. 그러므로 ‘혁신’이란 말이 이제는 진부한 느낌마저 주지만, 언제든 맞닥뜨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 사회가 혁명 수준의 혁신을 해야 하는 이유는 때를 놓치면 영원히 퇴보의 길을 걷게 되기 때문이다. 특히 교육은 선도적으로 미래사회를 이끌어 나가야 하므로 어느 분야보다 더욱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은 타이밍이 중요하다. 그러나 타이밍이 곧 조급성은 아니다. 우리 사회는 과정을 제쳐두고 결과를 빨리 보려는 조급성에 차 있다. ‘빨리빨리’라는 사회의 풍토가 교육에서도 예외 없이 적용되고 있다. 하지만 교육은 긴 호흡이 필요하다. 교육 혁신은 선제적이어야 하나 먼 곳까지 바라보는 일관성을 유지해야 한다. 결과에 연연하지 않고 느긋하게 기다려 주면서 올바른 길로의 성장을 기대하는 것이어야 한다.

단위학교에서의 교육혁명은 학교관리자의 혁신적 사고와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민주적인 학교 문화 정착, 교사들의 관심과 의지, 학생들의 적극적인 참여, 학부모들의 학교에 대한 대승적 이해, 지역사회의 풍부한 지원 등이 미래지향적으로 혁신되어 나가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각각의 혁신을 넘어서서 이런 요소들이 조화롭게 어울리는 가운데, 각자의 향기를 내면서도 환상적인 맛을 내는 비빔밥과 같은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 바로 교육혁명이 아닐까 생각한다.

단위학교로 한정해서 보면 교육혁명이 곧 교실혁명이다. 교육의 시작과 끝은 모두 교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교육부나 교육청이 아무리 훌륭한 교육정책과 프로그램을 쏟아내도 교실에까지 스며들기가 어렵다. 교실에서 실천되지 않으면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간다. 조희연 서울특별시교육감은 제2기 취임 1주년을 맞아 미래역량 강화를 위한 교실혁명과 학교 중심 행정 지원을 강조했다. 특히 하나의 정답이 아닌 상상력을 가르치는 수업이 교실혁명이라고 했다. 교실혁명은 학생 자치의 교실 문화, 학생 주도적 수업 및 평가 혁신을 위한 다양한 방법과 절차, 이를 지원하기 위한 각종 시스템과 프로그램 등, 실제로 교실에서 최종적으로 이루어진 것들을 의미한다.

지난해 도입한 ‘우리가 꿈꾸는 교실’은 초등학교 3~6학년 대상 프로젝트 중심 수업이고, 이를 중학교에서 자유학년제로, 고교에서는 학점제로 이어지도록 할 계획이라고 했다. 배움이 느린 학생에 대한 체계적 지원 체계를 위한 서울학습도움센터의 권역별 확대 설치, 제 4차 산업혁명 시대에 필요한 지능정보 기술 도입, 인공지능 기술 기반 영어 학습 플랫폼 구축, 인문 역량 강화를 위한 독서 교육, 메이커 교육 등도 교실혁명을 위하여 진행되는 것들이다. 또한 시민 참여형 숙의민주주의 제도 운영, 혁신자치학교와 혁신미래학교를 통해 교육 자치의 이상 모델을 현실로 만들어 가는 일에도 적극적 투입이 필요하다고 했으며, ‘학교가 가르치는 일에 집중함으로써 배움의 기쁨을 느끼는 성장의 공간이 될 수 있도록, 비록 느리더라도 일희일비하지 않고 묵묵히 교육의 내일을 꿈꾸며 나아가겠다는 약속을 드린다.’고 말했다.

바로 이런 교육의 내용과 방법들이 교실혁명, 나아가 교육혁명의 구체적인 길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길을 완성해 갈 교실혁명의 주체와 객체는 과연 누구인가? 학생인가, 교사인가, 학교 또는 교육청인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교실혁명은 어느 한 개인이나 집단이 아니라 교육공동체 모두가 주체와 객체다. 학생·교사·학부모 중 어느 한 축이 무너지면 교실혁명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각각의 집단이 협력과 소통을 통하여 조화로운 화음을 낼 때, 교육혁명과 교실혁명은 가능하다고 하겠다.

래에도 학교는 필요할 것인가

‘학교’란 무엇을 하는 곳인가? ‘학교(學校)’라는 말을 풀이하면 ‘배우는 곳’이다. 그렇다면 ‘배움’은 무엇인가?’ 배움을 정의하기에 앞서 ‘왜 배우는가?’라는 질문을 먼저 던져 보자. 공부를 하는 이유로는 ‘명문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서’라는 대답이 대부분이다. ‘배움’이란 오직 진학, 취직을 위한 지식이나 조건으로만 믿고 싶은 것이다. 대학입시에서 요구하는 내용들만 배움의 대상이 되고, 입시 제도의 틀에서 벗어나는 것은 배움의 대상이 아니라고 여긴다. 그러니 창의성이니 협력적 인성이니 하는 것이 학교 현장에 뿌리내리기 어렵다. 토론 학습, 과정 중심 평가 등의 배움의 방법도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다. 교육은 그동안 근본 목적에서 벗어나 실질적으로 신분 상승의 사다리나 부와 권력을 획득 또는 계승하는 기제로 작동되어 왔다. 인류의 윤리적 가치, 사회 공동체와의 조화와 공존 같은 것에는 애초에 관심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어느 글에선가 ‘학교는 학부모들이 교육을 위해 자식을 맡긴 외주업체’라는 표현을 본 적이 있다. 학교는 학부모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지 끊어버릴 수 있는 외주업체라는 것이다. 생각만 해도 오싹해진다.

오직 대학 입시와 좋은 직장의 취직이 배움의 주목적이 된다면 미래 시대에 과연 학교가 필요할 것인가? 물론 학교의 존재에 대한 회의감이나 부정적 견해는 지금에서야 나타난 것은 아니다. 오래 전부터 홈스쿨링 제도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고, ‘학교는 죽었다.’ 등의 극단적인 주장들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학교의 존재를 부정하는 이런 생각들이 현실로 고착되기는 어렵겠지만, 그냥 흘려들을 것만은 아니다. 학교가 본래의 교육적 기능을 지켜내지 못하면, 학교는 존재할 의미를 상실하고 없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학교는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

학교는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변할 것이다. 우리가 지금 교육혁신에 몰두하고 있는 것도, 미래 시제에 어울리는 교육의 새로운 정체성을 확립해야 하는 절대 절명의 단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미래 사회의 일자리는 창의적 사고를 더욱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학교는 단편적 지식을 중시하는 주입식 교육, 교사 중심의 수업, 객관성만 요구하는 평가, 이런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하는 대학입시 제도 등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구축해야 할 시대적 소명을 안고 있다.


소통과 협력의 인간관계 유지, 정의로운 가치관의 사회화 과정 등은 학교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학교교육은 개인의 성장만 생각하기보다는 공동체의 유지 및 발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 기본적으로 합리적 사고와 가치를 담아내고 차이의 소중함, 배려와 존중의 유익함 등을 공감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교육과정 편성과 운영의 측면에서도 대변혁이 따라야 한다. 국가 수준의 교육과정이 아니라 개인의 관심·흥미 중심의 맞춤식 교육과정으로 나가야 한다. 다양성이 존중되는 지금 사회에서, 아무리 교육과정을 촘촘하게 만들어도 개인이 지향하는 관심이나 다양한 목표를 반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제는 ‘무엇을 어떻게 공부하느냐.’라는 것을 넘어서서 ‘공부한 것으로 무엇을 하느냐.’의 문제 접근이 더 필요하다고 한다. 지식의 활용 역량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무엇을 하느냐.’의 판단에 앞서 전제되어야 할 것은 올바른 인성이다. 사회의 초고속 대변혁에 따르는 혼란이 커질수록 올바른 인성이 필요하고, 그것을 가장 잘 키울 수 있는 곳이 학교다. 제4차 산업혁명으로 대표되는 인공지능이 이런 역할을 하기는 쉽지 않다. 따라서 교육의 목적이 이런 방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학교는 더욱 필요한 존재가 될 것이다.

미래에도 교사는 필요할 것인가

우리나라의 직업군은 대체로 400여개로 분류된다는데, 그 중에서 AI의 자동화 대체 확률이 높은 직업군은 단순하고 반복적이거나 정교함이 떨어지고 사람과 소통하는 일이 낮은 것들이라 한다. 예측할 수 없는 직업군이 빠른 속도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고, 대체 확률이 높은 직업군은 자연히 인간의 일에서 소멸되는 운명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인공지능과 로봇, 빅데이터를 활용한 정보의 활용 등이 일상화 되는 시기에 ‘과연 교사가 필요할 것이냐?’는 의구심은 이런 사실을 토대로 볼 때 당연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아무리 인공지능이 인간을 대신해 나가도, 인간의 윤리적 선택의 문제를 인간만큼 잘 해결해 내지 못할 것이다. 예를 들어, 무인자동차가 갑작스럽게 충돌할 경우 운전자를 보호해야 될지, 주변의 사람을 먼저 보호해야 될지를 결정하는 것조차도 인공지능의 힘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는 하나, 무한대로 벌어지는 삶의 가치의 선택지를 다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에 미치지 못한다. 학교와 교사들은 인간을 교육하고, 그런 교육은 인간들에게 무한대의 윤리적인 선택을 가능하게 한다. 학교와 교사는 그래서 필요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구촌에는 언제나 불평등, 불공정이 상존해 있고, 그것들에 대한 비판의 강도가 점점 높아져만 가도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더욱이 인공지능 시대에는 자본과 정보, 기술의 독점으로 국가 간, 지역 간, 개인 간에 다양한 영역에서 편차를 보이며 경제적 불평등이 심화될 것이다. 따라서 약소국가, 소수민족, 경제적 빈곤층, 소외계층 등에 대한 배려는 더 필요하다고 하겠다. 우리의 교육 현장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교육에서도 소외된 자와 뒤처진 자 중심의 불평등은 언제나 부담으로 작용해 왔다. 그런 교육 불평등을 극복해 나가는 조화로운 인간 중심 교육이, 학교와 교사들에 의하여 이루어질 때 가장 효과적이고 의미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세계적인 경영학자인 피터드러커(Peter Drucker)는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스로 미래를 만드는 것’이라고 하였고, 프랑스 계몽시대의 철학자이며 작가인 볼테르(Voltaire)는 ‘의심은 불쾌한 일이지만, 확신은 어리석은 일’이라고 하였다. 이제는 뉴칼라의 시대라고 한다. 이 시대의 조건으로 제시되는 다섯 가지는 ‘기술이 바꿀 미래를 내다보는가?, 디지털리터러시가 있는가?, 세상을 바꾸고 싶은가?, 끊임없이 변화하는가?, 손잡고 일하는 법을 알고 있는가?’라고 한다. 미국의 작가 다니엘핑크(Daniel H. Pink)도 미래 인재의 여섯 가지 조건으로 의미, 디자인, 스토리, 공감, 조화, 놀이를 들었다. 그러므로 각자 자기 자신이 가장 좋아하고 잘 할 수 있는 것이 미래에는 유망한 일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학생들에게 심어주고, 위와 같은 조건들을 꾸준히 길러주는 것이 학생들의 올바른 미래를 만들어가는 교
사들의 역할이자 길이다.

교사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미래 사회가 요구하는 역량을 길러내기 위한 교사의 역할 변화는 무엇보다 중요하다. 과거에는 교사들이 학생들에게 물고기를 잡아주는 역할을 주로 해 왔다면, 지금은 물고기를 잡는 방법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잡은 물고기를 가지고 어떻게 할 것인가?’를 가르치는 일이 더 중요해진다고 한다. 그렇게 된다면 창의성, 감성, 협동성과 더불어 정의로운 가치, 더불어 사는 사회를 만드는 인성 교육에 더 열정을 쏟아야 한다. 어느 시대 어떤 일이 세상의 중심을 좌우하게 되더라도 이를 이겨낼 수 있는 창의성과 도전정신을 길러주는 교육 또한 필요하다 하겠다. 인공지능이 인간지능을 앞설 수는 있으나, 결코 이런 가치나 인성을 기르는 일에는 앞서지 못할 것이다.


어느 시대에서나 미래는 늘 불안하고 불안에 대한 도전적 행동은 필요했다. 미래에는 입시 중심의 단편적 지식을 가르치는 학교와 교사는 소멸되고, 창의성, 감성, 협동성 등의 미래 역량을 길러내는 학교와 교사가 그 자리를 대신할 것이다. 즉, 혁명에 가깝도록 혁신하지 않는 교사들은 존재하기 어려운 시대가 될 것이므로, 교사들은 긍정적 마인드로 문명사적 변혁의 물결을 도전적으로 헤쳐 나가는 적극적인 역할을 모색해야 한다.


미래 역량을 기르는 교육은 사회의 어떤 집단이나 공간에서도 이루어질 수 있으나, 집단지성을 발휘하여 미래 역량을 준비할 수 있는 곳은 학교만한 곳이 없다. 따라서 교사는 학교라는 공간 속에서 학생들의 미래 역량을 가장 잘 길러낼 수 있는 안목과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미래에는 폭주하는 정보와 초고속 기술의 발전으로 그 복잡하고 많은 것을 교사가 다 가르치기는 어렵다. 교사는 그것들을 분석하고 종합하여 미래지향적으로 학생들에게 안내하는 역할을 해야 하며, 훌륭한 안내자가 되기 위해서는 교사도 끊임없이 함께 배우는 자세가 필요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