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은 (금호고등학교, 교사)
여러 개의 우주가 공존하는 교실
“선생님 자리 제비뽑기해요.”, “자리 마음대로 앉고 싶어요!” 학교에서 하루 중 절반 가까이 되는 시간을 보내는 학생들에게 자리배치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그렇다고 해서 교실에 있는 모든 학생을 만족하게 하는 자리배치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교사가 임의로 자리를 정했다가는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학생에게 원망의 대상이 되기도 하고, 심지어는 컴퓨터가 무작위로 배치해 준 자리가 불만족스러워도 자리배치 방식을 정한 교사에게 불만의 화살이 돌아오기도 한다.
자리배치 뿐만 아니라 교실 안에는 함께 생활하는 학생들의 수만큼 다양한 요구사항이 존재한다. 이는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갈등, 학생 간 갈등 상황을 불러오기도 하는데, 함께 해결해 나가야 할 과제가 있을 때는 갈등 상황을 피하기보다는 적극적으로 과제 해결에 참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므로 학교에서는 갈등 상황에 닥쳤을 때, 효과적인 해결 방법을 배울 기회를 제공하고 갈등 상황을 적극적으로 해결해 나가려는 태도를 길러주어야 한다.
학급에 문제 상황이 발생하면 이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안건으로 학급 회의를 하곤 한다. 불만을 잘 이야기하던 학생들도 해결책을 물어보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학급 회의는 순조롭게 흘러가지 않는다. 학급회장과 부회장은 의견을 내지 않는 학급구성원에게 불만을 느끼게 되고, 소극적인 학생은 자기 의견을 내세우지 못해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지 못한 경험이 그 반대의 경우보다 더 많았다. 어떻게 하면 학생들의 의견을 최대한 반영하여 만족스러운 의사 결정을 할 수 있을까? 그 방법을 찾던 중 퍼실리테이션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은 이미 퍼실리테이터이십니다!
퍼실리테이션(Facilitation)의 사전적 의미는 ‘촉진’, ‘용이하게 함’이고, 퍼실리테이터(Facilitator)의 사전적 의미는 회의나 교육 등의 진행을 원활하게 하는 사람이다. 퍼실리테이션이라는 용어는 생소하지만, 수업과 학급 운영을 하는 교사는 이미 퍼실리테이터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처음 학급자치 연수에서 퍼실리테이션을 접했을 때, 회의를 진행하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내가 연수 이틀 만에 퍼실리테이터로서 회의를 이끌어나가는 경험을 하면서, 누구나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고 주변 선생님들께도 알리고 싶어졌다. 퍼실리테이션의 규칙과 기법을 적용한다면 목표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교사 혼자서 하거나 학급회장, 부회장이 모든 부담을 짊어지지 않고 구성원 모두가 참여하여 공동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적절한 훈련을 통해 학생이 퍼실리테이터로서의 역할을 할 수도 있다. 퍼실리테이션을 배운 한 학생은 퍼실리테이션 기법을 배우고 이를 활용하여 학급 회의를 진행하면서 이제껏 반 친구들이 회의에 참여할 의사가 없어서 의견을 내지 않은 것이 아님을 알게 되고, 더욱 의미 있는 결과를 도출해 내었다는 소감을 이야기했다.
퍼실리테이션, 무엇부터 시작해야 하나요?
퍼실리테이션을 활용한 회의의 첫 번째 단계는 회의 설계이다. 아래 4가지 조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퍼실리테이션의 단계별 기법을 선정하고, 시간 배분을 하여 주어진 시간 내에 효율적으로 회의 목표에 도달하도록 한다.
[1] 목표
회의를 통해 얻고자 하는 목표가 무엇인가?
→ 목표 달성을 위해 가장 적합한 기법 적용하기
(예 1) 올해 학생회 활동을 돌아보고 내년 계획을 세울 때는 ERRC 기법1 을 활용하여 잘한 점과 부족했던점을 종합적으로 파악 후 앞으로의 계획 세우기
(예 2) 학급 규칙을 정할 때는 역브레인스토밍 기법을 활용하여 ‘우리 반이 망하려면?’이라는 주제로 아이 디어를 발산하고 그로부터 반대로 생각하여 필요한 규칙 만들기
[2] 참여자
회의에 참여하는 구성원이 누구인가?
→ 구성원의 특성에 따라 목표 달성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그룹 구성하기
[3] 시간
주어진 시간은 얼마인가?
→ 목표 달성을 위해 적절한 시간 배분하기
[4] 공간
회의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어디인가?
→ 주어진 장소에서 활용 가능한 기법으로 설계하기
퍼실리테이션의 과정
[1] 아이스 히팅(Ice Heating)
얼음처럼 차갑게 얼어붙어 있는 분위기를 따뜻하게 데워 회의에 참여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도록 분위기를 조성한다. 회의 주제나 목표에 맞는 아이스 히팅도 좋지만, 주제와 전혀 관계없는 가벼운 게임도 좋다. 게임을 하며 자연스럽게 말을 하게 되고 구성원과 대화를 나누는 분위기가 만들어지면 회의 중에 의견을 제시하고 회의를 진행해 나가는 것이 훨씬 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2] 기본 규칙 공유
퍼실리테이션에는 3가지 기본 규칙이 있다.
첫째, 모든 의견은 동등하게 귀중하다. 20명의 학생이 있는 반에서는 20가지의 서로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회의에 참여하는 구성원 모두의 의견이 동등하게 귀중하다는 첫 번째 규칙을 회의 시작 전에 소리 내어 같이 읽으며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긴다. 회의 중 나와 다른 의견을 내는 사람의 의견은 틀렸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회의에 참여한다면 다른 사람의 귀중한 의견을 들을 기회를 놓칠 수 있다. 그러므로 목표 달성까지의 회의 과정에서 나오는 모든 의견에 대해 비난하지 않고 존중하는 태도로 참여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포스트잇 하나에는 하나의 의견만 적는다. 회의에서 포스트잇을 활용할 때의 좋은 점은 무엇보다 참여자 모두가 회의에 참여하게 만들어준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동시에 각자의 포스트잇에 자기 의견을 적어 붙이기 때문에 직접 말을 하며 참여하는 회의에 비해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한 의견을 확인할 수 있고, 소극적인 사람도 잘 참여할 수 있게 된다. 포스트잇을 활용할 때의 또 다른 좋은 점은 비슷한 의견끼리 모아 보기가 편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포스트잇 하나에는 한 가지의 의견만 쓰되 멀리 떨어져 있는 참여자에게도 잘 보일 수 있도록 굵은 펜을 이용하여 큰 글씨로 쓰게 한다.
셋째, 침묵 신호이다. 회의는 4~5명의 모둠을 구성하여 진행한다. 모둠 내에서 열띤 의견 교환을 하다 보면 정해진 시간을 초과하기도 하고 퍼실리테이터가 다음 단계를 진행하기 어려워질 때도 있다. 이때 침묵 신호를 사용한다. 퍼실리테이터가 조용히 한쪽 손을 어깨까지 들어 올려 참여자들을 바라보면 참여자들도 하던 것을 멈추고 손을 들어 침묵 신호를 따라 만든다. 이 간단한 동작 덕분에 소란스러웠던 교실이 조용해지면서 순간적으로 집중도를 높여주어 퍼실리테이터가 다음 단계를 설명할 때, 잘 듣고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어 굉장히 유용한 방법이다. 수업에서 우리 반만의 독특한 수신호를 침묵 신호로 정해 사용하면 수업의 집중도를 높이는 방법으로 아주 좋을 것이다.
[3] 목표 확인
본격적으로 회의를 시작하기 전 달성하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정하고 참여자 모두가 함께 확인한다. 퍼실리테이션의 전체 과정은 구성원 모두의 참여를 통해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임을 인지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한다.
[4] 발산
주제에 해당하는 아이디어를 마음껏 생각해 내는 단계이다. 보통의 회의 과정을 떠올렸을 때 가장 중심이 되는 단계이자 많은 사람들이 회의를 힘들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단계이기도 하다. 퍼실리테이션에서는 다양한 아이디어 발산 기법 중 회의 주제에 맞는 기법을 활용하여 아이디어 발산을 보다 쉽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브레인스토밍은 가장 일반적인 아이디어 발산 기법인데 이를 응용하여 6명의 모둠 구성원이 아이디어 3개를 5번 연속으로 떠올려 적어보는 6-3-5 기법,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의 반대 목표를 설정하여 아이디어를 발산한 다음, 다시 거꾸로 생각하여 원래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을 떠올려보는 역브레인스토밍과 같은 기법이 있다. 아이디어 발산 단계에서는 내용의 질보다는 양에 초점을 두어 최대한 많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도록 하고, 허용적인 분위기 속에서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를 비난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포스트잇에 생각을 적어 붙이는 것이기 때문에 다른 친구가 붙인 아이디어에서 힌트를 얻어 조금 수정하거나 개선한 아이디어를 생각해 내는 것도 쉽다.
[5] 수렴 및 의사결정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아 정리하는 단계이다.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것들끼리 모아 적절한 제목을 붙이는 그룹핑, 한 사람이 여러 개의 의견에 투표하는 다중투표, 몇 가지 평가 요소를 다중으로 평가하여 최종적인 점수를 산출하는 의사결정표 등 다양한 기법을 활용할 수 있다.
[6] 공유
가장 대표적인 공유 방법은 활동 결과물을 발표하는 것으로 구성원 모두에게 모둠의 활동 결과물에 대해 설명하고 질의응답하는 것이다. 다른 공유 방법으로는 갤러리 워크, 월드 카페, 배·느·실, 의미 카드 등이 있다. ‘갤러리 워크’의 자세한 기법은 활용 사례를 통해 설명하였다. ‘월드 카페’는 모둠별로 서로 다른 주제를 정하고 논의를 거친 후 모둠원 중 일부는 모둠에 남고 일부는 다른 모둠을 도는 방식으로 구성원이 바뀌면서 논의를 계속하여 의견을 심화시키는 방법이다. ‘배·느·실’이란 각각 머리로 배운 점, 가슴으로 느낀 점, 몸으로 실행할 점을 의미한다. 회의를 마무리할 때뿐만 아니라 수업에서도 활용할 수 있는 방법이다. ‘의미 카드’는 사진이나 단어 등을 나타내는 여러 카드 중 주제에 가장 잘 어울리는 카드를 골라 주제와 연관 지어 설명하는 방법이다. 카드가 없을 때는 휴대전화에 있는 사진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하거나, ‘과일’, ‘색깔’ 등의 특정 주제를 주고 떠올려보게 할 수도 있다.
퍼실리테이션 활용 사례
◼︎ 학급 행사 주제 정하기
학교 축제는 학생들이 스스로 계획하고 책임지고 운영하는 대표적인 학생 주관 행사이다. 학생의 자율성이 큰 행사인 만큼 자발적으로 참여하게 되어 보다 책임감을 갖고 행사 준비 및 진행에 참여하게 된다. 어려움이 생기거나 구성원 간 갈등을 해결해 나가는 과정에서 서로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고 협력, 소통, 존중과같은 민주시민으로서의 역량을 키울 수 있다.
◼︎ 방학 계획 세우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목표 25가지를 적는다. 목록 중 가장 원하는 목표 5개에 동그라미 표시를 한다. 동그라미 표시한 5가지 목표를 이룰 수 있는 방법을 계획한다. 나머지 20가지의 목표는 버린다. 5가지의 목표를 모두 이루기 전까지는 20가지의 목표는 생각하지 않는다. 투자의 귀재로 유명한 워런 버핏의 목표 설정 방법이다. 새해가 되면 연초에 많은 계획을 세우지만, 연말에 1년을 되돌아보면 하나의 목표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경험이 있다. 정말 중요한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는 것도 필요하다. 핵심 찾기는 9개의 요소 중 최종 1가지만 남기는 기법으로 방학 계획 세우기, 진로 목표 세우기 등의 활동에 활용할 수 있다.
◼︎ 간단한 의사결정 하기
언뜻 보면 거수를 하여 수를 세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할 수 있는데, 주먹오는 의사 표현의 가짓수가 손을 들거나 말거나 두 가지가 아니라 0에서 5까지 여섯 가지의 의사 표현이 가능하다. 숫자가 커질수록 해당 의견에 동의함을 나타내는 것이고, 이때 주먹을 쥐어 0을 표현하는 사람은 절대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므로 어떤 이유인지에 따라 해당 의견의 전체 점수가 높더라도 최종 결정에서 배제할 수 있다. 주먹오는 학급 회의 중 빠르게 결정해야 할 때 사용하면 좋다. 학급 단합 대회에서 메뉴를 고를 때 가장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는데, 특정 메뉴에 알레르기가 있는 학생은 주먹을 쥐어 0을 표시하는 것만으로 쉽게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퍼실리테이션은 만남이다
요즘 SNS에서는 간이 MBTI 검사 결과로 성격 유형에 따른 분석을 하는 것이 하나의 놀이가 되었다. 인터넷에서 무료로 할 수 있는 MBTI 검사가 정식 검사가 아니라 결과가 정확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MBTI 유형별 성격이 유행한 덕분에 사람마다 성격, 생각이 이렇게나 다를 수 있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알게 되고 나아가 사람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졌다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크다. 학교는 한 공간 안에서 많은 학생들이 오랜 시간 함께 생활하는 환경이므로 갈등 상황이 자주 생긴다. 다른 친구의 생각을 들을 기회가 많지 않기 때문에 서로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도 갈등의 한 가지 원인이다. 퍼실리테이션은 다른 사람의 의견을 귀중하게 생각하며 나의 의견을 말하고 서로 소통하는 것을 돕는 수단이다. 상대방에 대한 존중과 배려, 이해를 바탕으로 대화하고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민주시민 교육의 첫걸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