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혁(서울특별시교육청 정책안전기획관, 장학사)
학교란 무엇인가
학교는 학생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학교는 미래역량의 계발에 힘써야 한다. 학생에게 동기부여가 될 수 있도록 노동시장과 사회의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학생의 복지와 안전에 만전을 기해야 한다. 증거 기반 교육을 실시해야 한다. 기회균등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 (…) 부분적으로는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어떤 맥락에서는 이 명제들이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뜻도 된다.
가히 학교에 대한 요구 과잉의 시대다. 최근에는 ‘돌봄’이 화두다. 학교가 돌봄의 공간인 것은 맞다. 그것은 예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것이 곧 학교가 돌봄 기관이어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이는 학교가 안전한 공간이어야 하지만 안전교육 기관이 아닌 것과 마찬가지다. 학교의 돌봄 기관화는 학교의 입시 기관화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우를 범하는 것이다. 학교가 가족과 사회를 대체할 수는 없다. 얀 마스켈라인과 마틴 시몬스는 『스콜라스틱 교육: 학교를 변론하다』에서 가족과 사회로부터 학교를 분리시켜야 하며 이를 통해 학교는 역설적으로 학교를 학교답게 하는 교육의 장소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본질적인 의미의 교육. 그것이 저자들이 이 책에서 일관되게 말하고 있는 ‘스콜라스틱 교육’의 의미이다.
학교(school)란 무엇인가. 학교의 기원을 살피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에 한 가지는 어원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스어 ‘schole’는 공부하고 연습하기 위한 자유시간을 의미한다. 즉, 학교는 자유시간의 원천인 것이다.
“문제는 학교가 이 자유시간을 당대 신분 질서 상 아무런 권리가 없던 이들에게도 부여하여 지식과 경험의 원천이 되는 공공재(common goods)가 된 점이다.” 마스켈라인과 시몬스는 바로 이 점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귀족들)로부터 시작하여 끊임없이 ‘스콜라스틱 교육’으로서의 학교가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구세계의 유지를 바라는 이들이나 신세계의 비전이 명확한 이들에게 스콜라스틱 시기는 우려의 대상이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어린 세대를 이용하여 기존의 세계를 유지하거나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려 한다. 때문에 이들은 학교, 교사, 교육과정에 아무런 기회를 허용하지 않으며, 학교를 통해 어린 세대를 기존 세대의 의도에 맞게 길들이려 한다.” (1장 「들어가며」)
학교를 위한 변론
마스켈라인과 시몬스의 말처럼 우리 사회 역시 교육자를 불신하는 분위기가 명확히 존재하며, 학교가 사회의 (일관성이라고는 전혀 없는) 요구에 복종하지 않을 때, 학교는 암묵적으로 유죄로 간주된다. 정죄定罪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근거 1. 학교는 학생들의 ‘진짜 인생’을 준비시키지 못하는 고립된 섬이다.
근거 2. 학교는 자본 및 권력과 결탁하여 사회 불평등을 은밀하게 재생산한다.
근거 3. 청소년이 학습 동기를 상실했다. 학교는 ‘즐거운 학습’이 이루어져야 한다.
근거 4. 학교는 ‘학업성취’와 그 결과로서의 ‘취업(진학) 가능성’에 있어서 무능력하다.
마스켈라인과 시몬스는 오늘날 우리가 학교라고 부르는 것은 ‘탈학교화된de-schooled 학교’이며, ‘스콜라스틱 교육’의 규명을 통하여 ‘자유롭고 비생산적이며 규정되지 않는 시간’이라는 학교 본연의 역할을 변론하고 있다.
첫째, 교육과 학습으로 학생이 경험하는 세계와 사회 전체가 명시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발상에 반대한다. 오히려 학교는 단절되고 유예된 시공간이어야 하며 이를 통해 학생은 오히려 현재의 세계와 흥미롭고 매력 있는 방식으로 만나게 된다고 말한다. 그동안 많은 이들이 사교육의 병폐를 말해왔다. 무수히 많은 문제점들이 있지만 가장 큰 해악은 학생이 본질적 의미로서의 ‘학업 學業’을 수행할 수 없게끔 끊임없이 간섭하고 조정하며 학부모의 욕망이 투영된 ‘특정한 미래’를 상기시킨다는 것이다.
둘째, 조르주 아감벤의 논의를 빌려 시간과 공간과 사물의 신성 모독, 즉 세속화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눈치챘겠지만 이것은 권력과 자본으로부터의 세속화를 뜻한다. 학교를 커먼즈(commons,공공재)의 공간으로 전환하는 것이 곧 세속화의 의미인 것이다. 학교는 권력과 자본의 ‘견습생’을 양성하는 곳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을 가지고 노는 ‘주권자’로서의 학생을 키우는 곳이어야 한다.
셋째, 학교가 세속화와 유예의 공간이 될 때 그 안에서 세계가 열린다. 살고 있는 지역이나,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 등 학생의 가능성과 잠재력을 구속拘束하는 현실로부터 유예되어 세속화된 ‘나’가 될 때, 비로소 세계를 형성(form)하고 나를 알리게(inform) 된다. 형성되는 세계는 우리 ‘사이에 존재’하기 때문에 누구의 소유물도 아닌 함께 나누는 것(common goods)이 된다. 이로써 사이에 존재하는 시간이자 공간으로서 학교는 나와 너, 우리 사이에 놓인 ‘삶’에 집중하게 만든다.
넷째, 연습, 공부, 훈육으로서의 테크놀로지(암송, 받아쓰기, 시험 등)에 대한 성찰과 재발명이 필요하다. 테크놀로지란 ‘학 學’과 ‘습 習’을 연결해 주는 장치이자 “학생 스스로가 특정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처음 다루어 본다는 의미에서 ‘자기형성의 테크닉’이다.” 예를 들면 받아쓰기는 청취-녹화-재생으로 이어지는 고난도의 테크놀로지이자 교사와 학생 사이의 일종의 게임이다. 사실 모든 창작은 받아쓰기로부터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송은 어떠한가? 그것은 반복적으로 집중하여 마음의 지도를 새기는 일이다. 또한 시험에 대해서는 “핵심은 시험 준비이며, 학생이 시험을 준비하는데 들인 노력이 실제 시험 결과보다 중요하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시험을 준비하며 자신이 정한 기대 수준에 이르기까지 훈련하는 과정은 수도자의 삶과 닮았다. 이는 시험이라는 것이 훈육의 테크놀로지일 수 있음을 의미한다.
코로나19 시대의 학교
마스켈라인과 시몬스는 이외에도 스콜라스틱 교육의 특징으로서 평등, 사랑, 준비 그리고 교육적 책무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모두 주옥같은 이야기들인데, 한정된 지면에 모두 소개하지 못해 아쉬울 따름이다. 다만 앞에서 말한 네 가지(유예, 세속화, 세계와 집중, 테크놀로지)는 후반부 네 가지(평등, 사랑, 준비, 교육적 책무)를 학교에서 일궈내기 위한 필수조건이라는 것을 언급하고 싶다.
코로나19시대의 학교를 생각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한복판에서 우리는 학교의 본질을 묻기 시작했다. 그러나 거꾸로 질문하고 싶은 것이 있다. 왜 우리는 항상 재난 앞에서만 본질을 묻는가? 그것은 우리 사회의 치부를 감추기 위한 또 하나의 레토릭1은 아닌가? 바이러스가 학교를 멈추게 했을 때, 우리는 어떤 교훈을 얻은 것일까. 많은 석학들이 코로나19 이전과 이후는 질적으로 다른 세계가 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이를 어떻게 교육의 언어로 표현할 수 있을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는 그동안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온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이후의 교육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세월호가 차가운 바다 속으로 침몰하는 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것, 그 ‘불능’과 ‘무능’의 어두운 심연 속에 무엇이 있는지 질문하고 고백하고 선언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판단을 중지하고 기억을 왜곡시키려고 한 것은 아닌가. ‘세월호 사건’을 단지 사고일 뿐이라고 말했던 이들은 ‘코로나19 팬데믹’ 역시 불가항력적인 천재지변이라고 말할 것이다.
코로나19 이후의 교육은 ‘세월호 이후의 교육’을 명료하게 정립하지 못한 기성세대의 무능과 불능에 대한 반성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세월호 참사 이후 학교에 들어온 것은 ‘안전교육’이었다. 이는 미래세대(학교)에 대한 정죄이자 기성세대(사회)에 대한 면죄부였다. 똑같은 실수가 반복되어서는 안 된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원인과 그것이 초래한 결과들을 성찰해야 한다. 학교를 평등의 시간, 환대의 공간이 되게 하라. 아이들로 하여금 앞날에 대한 걱정 없이 한계를 시험하게 하라. 그럼으로써 그들을 공존의 삶과 존엄의 세계로 인도하라. 이것이 학교의 유일무이한 책무이다.
“우리의 ‘공부 못하는-앞날이 없다고 여겨진-학생’들은 학교에 결코 홀로 오지 않는다. 교실에 들어서는 것은 한 개의 양파다. 수치스러운 과거와 위협적인 현재와 선고받은 미래라는 바탕 위에 축적된 양파. 수업은 그 짐이 땅바닥에 내려지고 양파 껍질이 벗겨져야만 진정으로 시작될 수 있다. 설명하긴 어렵지만, 단 하나의 시선, 호의적인 말 한마디, 믿음직한 어른의 말 한 마디, 분명하고 안정적인 그 한마디면 충분히 그들의 슬픔을 녹여 내고 마음을 가볍게 하여, 그들의 직설법 현재에 빈틈없이 정착시킬 수 있다. 물론 그 호의는 일시적이며, 양파는 밖으로 나서는 순간 다시 겹을 두를 것이고, 당연히 내일 또다시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 하지만 가르친다는 게 바로 그런 것이다. 선생이라는 직업이 필연적으로 사라질 때까지 다시 시작하는 일.”
다니엘 페낙, 『학교의 슬픔』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