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육Vol.226.봄호

교육과정 해외 동향 –
핵심역량의 설계에서 실천으로

|이근호


미래를 예단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 이다. 그러나 앞으로의 학교 교육 환경은 변화가 크고 감당하기 어려운 속도로 빠르게 이루어질 것이다. 현재 많은 국가들이 그러한 변화에 대비하여 학생의 적응력을 신장하고
더 나아가서 자신들이 기대하는 변화를 이끌어내는 실질적인 힘을 키워주기 위해 ‘핵심역량’이라는 기치 하에 다양한 교육과정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2015 교육과정 개정을 통해 창의·융합형 인재 양성과 역량 반영 교육과정을 추진한 바 있다. 이 개정은 무엇보다도 미래 사회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러나 동시
에 2015 개정 교육과정의 동력으로 간주되는 ‘역량’ 개념이 일선 학교 현장에서는 결코 낯익은 것이 아니라는 점도 사실이다. 비록 21세기 사회에서 역량 교육이 필요하다는 당위성에 대해서는 공감한다 하더라도, 실제 어떻게 역량 함양이 가능한지에 대해 학교 현장은 혼란스러움을 경험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2015 개정 교육과정이 성공을 거둘 수 있기 위해서는 막연히 역량 교육을 강조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역량 교육을 실천할 것인가를 보다 구체적으로 안내하고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는 우리보다 앞서 역량 교육과정을 실천하고 있는 외국의 학교 사례를 살펴보고, 그로부터 우리 학교가 참조할 수 있는 몇 가지 시사점에 대해 논의해 보고자 한다.

역량 기반 교육과정의 현장실천 사례 1

: 캐나다 퀘벡 주 클리어포인트 초등학교

퀘벡의 대도시 몬트리올 외곽에 자리 잡은 클리어포인트 초등학교(ClearpointElementary School)는 영어와 불어의 이중언어 교육을 제공하는 것을 기본 사명으로 하고 있으며, 사고력 증진과 문제해결력 함양에 교육의 중점을 두고 있다. 이 학교의 교장이 우선적으로 필자를 데려간 곳은 6학년 교실이었다. 역사 수업 중인 학생 20여명은 네다섯 명씩 둥근 책상에 모여 한창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학생들은 각자 노트북 컴퓨터로 정보를 찾아가며 몬트리올의 역사에 대해 공부하는 중이었다. 왁자지껄한 분위기지만 제지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교사는 아이들과 뒤섞여 크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교사는 “교사가 모든 걸 다 알려줄 필요는 없다.”며 “아이들이 스스로 정보를 찾고 이야기를 나누도록 돕는 역할을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고 말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니 학생들이 저마다 조금씩 다른 일을 하고 있었다. 어떤 학생은 몬트리올의 역사에 대한 에세이를 쓰고 있었고 또 다른 학생은 오랜 역사를 지닌 교회 건물을 그리면서 배경 설명을 적고 있었다. 한 학생은 몬트리올에 대한 영어 설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데 열중하고 있었다. 교사는 ‘역사지식을 아는 것은 기본’이라며 ‘지식을 표현하고 활용하기 위한 다양한 역량을 키워주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

다음으로 방문한 곳은 4학년 실과 수업이 한창 진행되고 있던 교실이었다. 여기서는 자수 놓기 수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각자 표현하고 싶은 생각을 자수를 통해서 자유롭게 드러내고 있었다. 아이들의 수준도 천차만별이었다. 자신의 작품이 엉성하든, 정교하든 아이들에게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모두 즐겁게 수업에 참여하며,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자긍심이 더욱 중요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담당 교과 선생님은 “저도 아이들의 작품 수준에 차이가 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습니다. 아이들이 할 수 있고 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할 뿐이지요. 자수를 못해도 다른 일들을 훨씬 잘하는 아이들이 많다는 점을 늘 명심해야 합니다.”고 말한다.

클리어포인트 초등학교에서 특히 인상깊었던 것은 교장이 제공한 학업성취도 평가 문제지였다. 가령 클리어포인트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이 치르는 ‘문제해결력’ 평가지는 단 한 개의 질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세계 여행을 하려는데 가장 좋은 경로를 만들어 보라.”는 것이다. 이 평가지는 총 4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세계지도에 방문할 주요 도시가 표시돼 있고 각 도시에서 하루를 머물기 위해 얼마가 필요한지 표로 제시했다. ‘비행기는 8시간 이상 날 수 없다.’ ‘대륙을 건널 경우 비행 요금이 더 비싸다.’ ‘총 여행거리는 3만5000km 이상 5만km 이하여야한다.’ 등 다양한 제한 조건도 있다. 교장은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지도의 거리를 실제거리로 바꿀 수 있는 능력, 정확한 계산 능력, 각 대륙과 국가의 문화에 대한 이해가 동시에 필요하다.”고 말했다. 얼마나 그럴듯한 여행계획을 세우는지에 따라 교사는 학생의 성취도를 평가한다. 학생은 자신이 세운 여행계획을 다른 학생들 앞에서 발표한다. 학생은 이 도시를 왜 방문해야 하는지도 설명해야 한다. 교장은 “규칙을 잘 따랐는지, 계산에 실수는 없는지, 논리적인지, 다양한 문화에 관심이 있는지를 한꺼번에 평가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학교의 교장은 역량 중심 교육과정을 적용한 결과로 나타난 변화에 대해서 한마디로 “학생들의 학습 양태가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러한 변화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수동적이고 기계적인 학습이 아니라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학습’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을 든다. 그에 의하면,

• 학생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발견하고, 실험하고, 문제를 해결하며,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측면에서 능동적인 학습자가 된다. 이는 학생들이 교사들의 전통적인 역할을 나누어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 학습은 구체적이고, 즉각적이며 실생활의 문제들과 직결된다.
• 학생들이 이미 알고 있는 것으로부터 혹은 그것과의 적극적인 연계를 통해서 새로운 시도가 이루어진다.
• 학습은 학생들이 자신이 생각하는 바를 다른 학생들에게 설명하고, 가설을 함께 검증하고, 다른 학생들로부터 무언가를 배운다는 측면에서 경쟁이라기보다는 협동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역량 기반 교육과정의 현장실천 사례 2

: 영국의 레이븐스본 학교

레이븐스본 학교(Ravensbourne School)는 1,400여 명의 재학생이 있는 대규모 중등 학교로서 인문계 및 직업계 과정까지 두루 갖춘 종합학교이다. 우선 필자는 이 학교의 중학교 3학년 음악 시간을 관찰하였다.

이 수업은 타 문화를 이해하기 위한 활동의 일환으로 아프리카 타악기를 직접 연주해 보는 시간이었다. 아프리카 타악기 연주 전문가가 음악 선생님을 보조하여 수업을 진행하였으며, 연주와 관련된 부분은 이 전문가가, 그리고 악기 소개나 아프리카의 생활 방식 등에 관해서는 음악 선생님이 나누어 맡는 체제로 수업이 진행되었다. 네 벽면을 둘러싸듯이 자리한 학생들은 각기 다른 악기를, 각기 다른 리듬으로 연주하였고, 한 차례 연주가 끝나면 돌려가며 옆면에 자리하고 있던 아이들이 연주한 가락과 리듬을 재현해보는 방식으로 수업이 이루어졌다.동석한 교감 선생님은 이와 같이 다양한 형태의 팀 티칭이 점차로 보편화되어 있음을 강조했다. 아직도 전통적인 강의식, 설명식 수업의 잔재가 남아 있기는 하지만, 최근 들어 학생들의 활동과 체험을 강조하고 다양한 수업 방법을 적용하기 위한 노력이 계속 되고 있다고 한다.

다음으로 친환경 소품 공정무역(fairtrade) 행사를 참관했다. 이 행사의 목적은 환경의 중요성을 다시 인식하고, 더불어 자연스럽게 사고파는 과정에 참여함으로써 구매자와 판매자의 경험을 갖게 하는 데 있다. 이 행사가 끝난 후에는 자연스럽게 토론을 통해서 그들이 무엇을 느꼈고, 무엇을 경험했는가를 나눈다. 그런데 이 토론 과정이 상당히 흥미로웠다. 토론의 주제는 일부 아이들이 할당한 가격이 지나치게 비싸서 행사의 취지를 무색케 했다는 쪽의 입장과 그 수익금을 건전한 방향으로 활용한다면 조금 비싼 가격은 문제가 되지 않으며, 구매자의 편에 서도 이미 그것을 염두에 두고 있을 것이기 때문에 상관없다는 측의 주장이 팽팽하게 맞서 있었다. 동석한 국제 프로그램 코디 네이터 선생님은 이와 같은 토론 문화가 영국학교들에서는 보편화되어 있으며, 수업의 중요한 기제가 되고 있다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주목할 만한 것은 교사들의 협의가 다양한 방식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수업의 내용과 방식을 결정하는 것뿐만 아니라 앞서 살펴본 행사 등을 기획하고 진행하는 것 등도 협의의 대상이 되고 있었다. 영국의 교사들은 자생적으로 교과 교육 협의회, 수업 연구회, 학습자료 발굴과 개발을 위한 협의체를 조직·운영하고 있으며, 그 결과 다른 어느 나라에서보다 활발한 교사 조직, 교사협의체 등을 가진 나라가 되었다. 이러한 자율적 교사 조직이 학교 교육의 견인차 역할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역량 기반 교육과정의 현장실천 사례 3

: 캐나다 알버타 주 마이클 스트렘빗스키 학교

이 학교(Michael Strembitsky School)는 알버타 주로부터 핵심역량 실천과 관련하여 시범학교로 지정되고 재정지원을 받고 있으며, 유치원부터 9학년까지 총 1,050명의 재학생, 67명의 교원과 13명의 지원인력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징적인 것은 학교의 전반적인 미술 및 디자인을 담당하는 비 교수 요원을 채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디자인 전담 요원은 학교 전체의 시설에 대한 설계 부터 교실 및 도서관 등의 설비 및 배치 등에 대한 전문적 의견 제시를 통하여 학생 친화적인 교육환경 구축을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교사 채용 등에 있어서 학교장의 재량이 전적으로 용인되는 등 자율성에 기반을 둔 학교 운영이 이루어지고 있다. 학교장은 다양한 삶의 경험들을 소유한 교사들을 충원하여 학교 교육에 다양성과 생생함을 더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학교가 추구하는 궁극적 목적은 학생 참여에 기반을 둔, 참 학습(authentic learning) 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고, 이를 위해 특히 역점을 두는 부분은 교사의 역량강화 부분이다. 교육과정 구성은 알버타 주에서 제시하고 있는 교과 교육과정(programsof study), 학교가 추구하는 교육목적과 철학, 핵심역량 등의 세 축을 바탕으로 교과별, 학년별 모임을 통해 큰 틀에서 아이디어를 추출한 후 이를 이미지화하는 작업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 교사들 간의 협력, 그리고 교사들의 다양한 삶의 경험과 전문적 식견이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이 학교에서는 핵심역량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학교나 교사 수준에서의 적극적이고 자율적인 해석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학교에서는 핵심역량과 관련하여 학교에서 생각하는 정의를 작성하고, 이에 기반을 두어 교사와 학생 편에서의 핵심역량 지표(competencies indicators)를 개발하는 작업을 수행하였다. 이 지표들을 개발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교사와 학생들이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활발한 참여를 독려하였다.

이 학교에서는 프로그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프로그래밍 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다양한 교수·학습 방법, 가령 프로젝트 중심 학습이나 탐구 기반 교수·학습 모델들을 적용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다. 핵심역량의 핵심키워드는 ‘협력’과 ‘참여’이며, 이를 통해 교사와 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어 교육과정에서부터 소외되는 것이 아니라 주인의식을 가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종합 논의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세계 여러 나라들은 현재 다양한 방식으로 핵심역량 교육과정을 실천하고 있다. 이제 관심의 초점은 핵심역량을 어떻게 교육과정 속에 설계해 넣을 것인가의 문제를 떠나서 이를 어떻게 실천할 것인가의 방향으로 전환하고 있다. 위에서 살펴본 사례들이 핵심역량 교육과정을 실천하는 방식 전부를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중요한 교훈 하나를 시사하고 있다. 즉, 핵심역량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 학교와 교사에게 폭넓은 자율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나라들이 핵심역량의 공통적 의미에 대해서 제시하고 있지만, 그러한 역량들의 구체적 해석은 지역이나 단위 학교의 상황을 고려하여 다양한 방식으로 실천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다. 핵심역량 교육과정은 다양성을 기반으로 하는 미래 사회를 대비하기 위한 것이며, 다양성을 촉진하는 길은 자율성과 자발성에 기초한 선택이 이루어질 수 있을 때 가능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