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나눔Vol.225.겨울호

[기행수필]용서의
페르돈 언덕

h_2_1  산티아고 순례길은 헐벗은 자신과 만남의 길이다. 가식과 위선으로 무장해 온 삶에서 누구와도 타
협 없이 하나씩 벗어버리는 훈련이다. 대지의 기운을 받아 한 발자국 씩 옮기며 쏟아내는 땀 속에서 외면의 노폐물이 걸러지는 가뿐함을 느낀다. 마음과 영혼의 변화를 찾아 나선 길에서 뜻하지 않은 자기성찰로 고백을 쏟아내기도 한다. 오늘은 어떤 마음하나를 벗어낼 준비가 되어 길을 나서는가.
스페인의 대도시 팜플로나 시내를 빠져나오니 노란 화살표는 산티아고 길 중에 위험한 지역이라는 시수르 메노르 평원으로 이끈다.
남들이 출발하는 시각을 놓치고 홀로 걷는다. 나무도 그늘도 없는 벌판이다. 예전에는 순례자 주머
니를 노리는 도적들이 창궐해 성 요한 기사단의 활동이 활발했다는 들판. 양쪽으로 거대하게 펼쳐진 밀밭 사잇길로 들어선다. 길은 끝없이 이어져 있어 소실점 끝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다. 거대한 자연속의 나는 한 점 뿐인 미미한 존재이다. 작열하는 태양 아래 느릿느릿 발걸음을 옮긴다. 누가 덮쳐도 아무도 모를 것 같은 두려움이 온몸을 휘감는다. 배낭은 왜 이리 무거운 것인가. 잔돌들이 무수히 깔린 언덕길에서 눈이 감겨지고 정신도 혼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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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묵과 기도 속에서 딸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린다. 큰딸 미가 나를 지켜주고 있음인가. 눈앞에 작은 십자가 무덤이 나타난다. 돌무더기에 세워진 십자가 가운데 벨기에 남성의 사진이 걸려있다. 순례자임을 뜻하는 조가비도 보인다. 아, 지쳐 스러져 갔나보다. 돌아오지 않는 가족을 찾아 이곳에서 배낭을 열어보고 가족임을 확인하는 순간 오열했을 모습을 상상해 본다. 십자가 무덤을 세우고 이 길을 걷는 이들의 기도를 부탁했을 그들의 마음이 되어본다. 정신이 번쩍 들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른다. 두 손 모아 순례자의 안식을 위한 화살기도를 드린다. 그 순례자의 마음으로 한 걸음 더 나갈 수 있는 용기를 청한다.

가파른 언덕길을 오른다. 언덕 위로 풍력발전기의 프로펠러가 거친 바람을 받아 위용을 자랑하듯 힘차게 돌고 있다. 해발 770m 고지의 알토 델 페르돈(Alto del Perdon)이다. 알토는 언덕, 페르돈은 용서라는 뜻으로 ‘용서의 언덕’이다. 과거 순례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철제조형물이 바람을 가르며 서 있다.
말을 타고 가는 이, 나귀를 끌고 가는 순례자도 보인다. 서로의 잘못을 용서하고 용서받으며 사람과 동물이 함께 천상으로 향하는 순례길 모습이다. 뒤쳐져서 따라 가느라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걷는 여성순례자 형상이 내 모습 같다. 용서의 언덕에 세찬 바람이 휘몰아친다. 천여 년 전 용서를 구하며 오르던 여성 조형물 사이에 서본다. 큰 딸 미도 옆에 서 있는 듯하다. 그날의 대화가 떠오른다. 늘 쾌활하던 미의 얼굴에서 웃음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이 밀려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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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자신의 일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해 온 미.
10년 동안이나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그 힘든 일에 묵묵히 뛰어들어 최선을 다하고 있는 미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딸이 진정으로 원하는 세상의 작은 변화가 무엇인지 들어주었어야 했다. 하는 일이 미약해 보이고 딸이 아깝다며 마음을 열지 않은 냉정한 모정. 후회가 밀려오고 눈물이 폭포수처럼 쏟아진다. 딸에게 진심어린 용서를 청한다. 딸이 받아줄 것인가.h_2_5h_2_4

공부 잘하고 말을 잘 듣는 학생들을 가르치기는 쉽다. 어려운 환경에서 비뚤어진 길로 치닫는 아이들을 나는 진정으로 받아주고 사랑으로 가르쳤는가.
나의 자아실현만을 위한 교단의 삶은 아니었을까.
아픔이 많은 제자들의 가슴을 어루만져 주기보다는 야단을 치며 하나라도 더 가르치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이런 제자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진 몫을 딸이 채워주고 있음을 깨닫는다. 딸의 거칠어진 손을 잡고 진정으로 응원해주리라. 가족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미의 환한 웃음을 되찾아 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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