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나눔2016 봄호 (222호)

인문학의 출발, 나를 찾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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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윤상철 / 경희여자고등학교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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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의 사전적 의미는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정의는 인문학을 특정 학문 영역으로 제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하지 못하다. 이 보다는 ‘인문(人文)’의 축자적 의미인 ‘사람[人]의 무늬[紋]’가 더 포괄적이라 좋다. 여기서 사람의 무늬란 삶의 흔적이다. ‘삶의 흔적’은 다른 사람과의 만남, 즉 관계에 의해 만들어진다. 따라서 인문학은 관계 속에서 형성된 우리의 가치관, 도덕, 제도,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을 탐구하고자 한다.
‘사람의 무늬’인 인문학을 하는 이유는 『주역』’비괘(賁卦)’의 “천문을 살펴 때의 변화를 알아내고, 인문을 살펴 천하의 교화를 이룬다[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는 말처럼 ‘천하를 교화하기 위해’, 즉 인간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은 의미와 목적을 갖고 있는 인문학의 출발점은 ‘성찰(省察)’이다. 성찰은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많은 것들에 관해 진짜 당연한지, 왜 그래야 하는지 따져 보는 반성적·비판적 사고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이처럼 성찰은 사람들에게 생각의 필요성과 계기를 만들어 준다는 점에서 인문학의 방법론이기도 하지만, 인문학 자체가 인간의 삶과 행위에 관한 끊임없는 성찰이라 말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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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은 나와 나를 둘러싼 인간 세계에 관해 성찰하고자 한다. 이 중 가장 기본이 되는 출발점은 ‘나’에 대한 성찰이다. 자신의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서 인문학적 사유는 시작된다. 내가 없다면 나를 둘러싼 ‘인간세계’나 ‘자연세계’가 나에게는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에 관한 성찰은 쉽지 않다. 나를 살펴보기 위해 백지를 펼쳐놓고 ‘나는 누구인가’에 관해 써보면, 나를 소개하고 설명하는 일이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를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듯하지만 ‘나’에 관해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모르는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는 한 대중가요의 가사처럼 잘 안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잘 모르는 것이 바로 나 자신이다.
김광규 시인의 시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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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규 시인은 ‘나’를 관계 속에서 규정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 파악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양한 관계에 따라 각기 다른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진정한 내가 누구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현실을 고민하고 있다. 또한 시인은 이런 질문과 고민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자신에 관한 성찰을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인문학의 핵심적인 주제 중 하나인 자아정체성의 문제이다. 나를 살피는 일은 자아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다. ‘나’를 찾기 위해 ‘나는 누구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질문에 대한 답과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답은 거의 같다. 이처럼 자아정체성의 확립은 현재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결정하여 미래의 나를 만드는 토대가 된다. 이러한 까닭에 끊임없이 ‘나’를 찾으려 노력해야 한다.
이 글을 읽는 대부분의 사람은 교사이다. 그래서 당신 누구요라고 물으면 ‘저는 교사입니다.’라고 답할 것이다. 나의 직업이 교사라는 이유만으로 ‘나는 교사다.’라고 쉽게 말하기 전에 ‘나는 교사다운 교사인가’를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를 위해 진정한 교사란 어떤 존재인지에 관해 먼저 따져봐야 한다. 나를 교사로 규정하기 전에 어떤 사람이 훌륭한 교사인지를 고민하는 일은 좋은 교사가 되기 위한 기준을 설정하는 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 속의 위대한 사상가와 스승들은 항상 자신에 관한 성찰을 했다. 자신을 성찰했기에 위대한 스승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나의 정체성을 교사에서 찾고자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왜 교사가 되고자 했는지, 지금 담당하고 있는 과목을 통해 무엇을 가르치고자 했는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지금 교사로서 나의 모습이 바람직한지 되돌아 봐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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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찾는 일도 어렵지만, 찾은 나를 지키는 일은 더욱 어렵다. 우리는 살면서 나의 뜻과 어긋난 일을 하는 경우가 있다. 나를 찾으면서 바람직한 나를 만들기 위해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이를 보듬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아름답고 바람직한 나를 만들 수 있다.
다산 정약용의 글을 살펴보자.

수오재(守吾齋), 즉 ‘나를 지키는 집’은 큰형님이 자신의 서재에 붙인 이름이다. 나는 처음 그 이름을 보고 의아하게 여기며, “나와 단단히 맺어져 서로 떠날 수 없기로는 ‘나’보다 더한 게 없다. 비록 지키지 않는다 한들 ‘나’가 어디로 갈 것인가. 이상한 이름이다”.라고 생각했다. … 어느 날 이러한 의문점에 대해 환히 깨달을 수 있었다.
천하 만물 중에 지켜야 할 것은 오직 ‘나’뿐이다. 내 밭을 지고 도망갈 사람이 있겠는가? 내 집을 지고 달아날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니 밭과 집은 지킬 필요가 없다. …
그러나 유독 ‘나’라는 것은 그 성품이 달아나기를 잘하며 출입이 무상하다. 아주 친밀하게 붙어 있어 서로 배반하지 못할 것 같지만 잠시라도 살피지 않으면 어느 곳이든 가지 않는 곳이 없다. 이익으로 유혹하면 떠나가고, 위험과 재앙으로 겁을 주면 떠나간다. … 그런데 한 번 떠나가면 돌아올 줄 몰라 붙잡아 만류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천하 만물 중에 잃어버리기 쉬운 것으로는 ‘나’보다 더한 것이 없다. 그러니까 꽁꽁 묶고 자물쇠로 잠가 ‘나’를 굳게 지켜야 하지 않겠는가? 2)

정약용은 나를 잘 지키기 위해서는 자신을 꽁꽁 묶고 자물쇠로 잠그는 일을 잘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런데 이에 앞서 지켜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구분하고, 머물러야 할 곳과 떠나야 할 곳에 관한 정확한 앎이 필요하다. 아무거나 묶고 잠그면 안 되기 때문이다. 말이 쉽지 이를 실천하기는 어렵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교사로서 지켜야 할 덕목은 무엇이고 버려야 할 욕망은 무엇인지, 교사로서 머물러야 할 곳과 떠나야 할 곳은 어디인지 따져봐야 한다.
‘성공’이라는 목표를 설정하고 뛰면서 황폐해지는 학생들의 삶을 어찌해야 하는가?
앞만 보고 달리도록 경주마의 눈에 씌우는 차안대를 쓰고 좋은 대학, 좋은 학과에 진학하기 위해 달려가는 학생들, 그렇게 달리도록 채찍질하는 교사와 학부모가 있다. 이것이 현실이기에 우리는 이를 거부할 수 없는가? 그런데 삶에서 ‘성공’이란 무엇인가? 내가 교사로서의 명을 다하는 순간 제자들과 후배 교사들에게 무엇을 남겨주길 원하는가? 이 시대의 교사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해 던져야 할 질문들이다.
이러한 성찰을 통해 내가 지키고 실천해야 할 덕목과 버려야 할 것을 좀 더 쉽게 찾을 수 있다. 조심할 것은 욕망을 덕목으로 미화하거나 착각하면 안 된다는 점이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삶을 살아서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호랑이는 가죽 때문에 죽임을 당하고, 사람은 이름을 남기려하기 때문에 오명(汚名)을 남기게 된다. 버려야 할 것을 붙잡으려 할 때 일어나는 일이다. ‘잘 살다’와 ‘잘살다’는 띄어쓰기 한 칸의 차이이지만 삶에서는 큰 간격이 발생하는 것처럼 무엇이 교사로서 아름답고 명예로운 삶인지 고민이 필요하다.
인문학을 통해 나를 찾고 지키되 반드시 바람직한 나를 찾아 꽁꽁 묶어야겠다. 이를 위한 방법으로 『중용』 20장에 나오는 말을 제안하고자 한다. “넓게 배우고[博學], 자세하게 묻고[審問], 신중하게 생각하고[愼思], 명확하게 분별하고[明辯], 신실하게 행동하라[篤行].”


1) 출처: 김광규 「반달곰에게」 (1981. 민음사)
2) 박혜숙 편역, 『다산의 마음 : 정약용 산문 선집』 (돌베게,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