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와 나눔Vol.225.겨울호

[미니픽션] 반타작

h_1_1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말짱했던 고구마 밭이 털린 것을 김 노인이 알아차린 것은 초가 을 안개가 자욱이 내린 새벽녘이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새벽잠을 잃은 김 노인이 행여 마나님이 잠에서 깰세라 조용히 자리에서 빠져나와 텃밭을 돌아볼 때였다. 밤새 관절염 통증으로 끙끙거리다가 겨우 새벽녘에야 잠이 든 아내에 대한 김 노인의 배려였다 .
어제 캐다 만 고구마 밭 세 이랑이 밤새 고스란히 털린 것이었다. 어제 저녁, 남은 세이랑을 마저 캐고 저녁밥을 먹자고 성화를 부리는 마나님의 등을 떠밀어 집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못 캘 것도 아니지만 올 들어 더욱 심해진 아내의 무릎 관절염이 걱정스러워 그랬던 것이었다. 늦은 저녁을 먹고도 초막의 툇마루에서 한참 동안이나 모처럼 따라 내려온 마나님과 말동무를 하며 바깥바람을 쐬다 들어갔으니 고구마 도둑은 한밤중에 와서 쥐도 새도 모르게 저 짓을 해 놓은 것이 분명했다. 귀신이 아니고서야 달도 없는 이 축령산 산골짜기 외진 밭에서 어찌 저렇게 고구마 넝쿨을 잔뜩 헤집어 놓 고 캐 간 것인지 김 노인은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
어제 김 노인 부부가 캐다 남긴 이랑을 마구잡이로 초토화시키고 싹쓸이를 해 간 것 이었다. 고추 도둑, 인삼 도둑, 벼 도둑 이야기는 초막을 다니러 오거나 소설 따위에서 듣고 읽기는 했지만 아닌 밤중에 고구마 도둑이라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어느 놈의 몹쓸 짓인지 발자국이라도 확인할 양으로 밭고랑으로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사람 발자국은 간데없고 웬 짐승 발자국만 어지럽게 나 있었다. 구덩이를 깊게 판 본새를 보니 다름 아닌 멧돼지 일가족의 소행이었다. 어미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것에 새끼의 발자국으로 보이는 것 여러 개가 뒤섞여 밭의 고랑과 이랑에 선명하게 찍혀 있었다 .
몇 곳을 헤쳐 보았지만 고구마는 눈을 씻고 봐도 보이질 않았다. 군데군데 씹다가 뱉어 놓은 고구마만 눈을 어지럽힐 뿐이었다. 참으로 탄복해 마지않을 놀라운 솜씨였다.
이놈들이 어제 고구마 캐다 남긴 것을 지켜보다가 한밤중에 가족이 떼로 몰려와 서리를 해 먹은 것이 분명하다고, 고구마 넝쿨을 헤집으며 김 노인은 중얼거렸다. 김 노인이 고구마 밭에서 머뭇머뭇 혀를 차고 있을 무렵, 매일 새벽이면 건너 교회의 종 치는 시각보다 더 정확히 나타나는 수동마을 토박이 박 씨 할아버지가 밭 언덕을 올라오고 있었다.

“김 선생, 간밤에 별 일 없었어요?”

언제나 첫 인사로 묻는 말이었지만 오늘따라 마치 별 일이 일어났기를 예견이라도 한듯한 목소리로 들렸다. 김 노인의 입에서는 ‘네, 어르신.’ 하는 답이 나오질 않았다 .

“어르신, 오늘은 별 일이 있는 걸요.”
“별 일? 이 산골짜기에서 별 일은 무슨 별 일? 뭐 간첩이래두 나타난 게유?”
“ 그게 아니고요, 간밤에 멧돼지란 놈들이 떼로 몰려와 고구마 밭을 다 헤집어 놓았습니다. 이래 가지구서야 어디 농사를 지어 먹을 수 있겠습니까?”
“ 아니, 김 선생! 학교에서 정년하고 이 동네로 들어와 농사짓기 시작한 것이 벌써 몇 년인데 그런 투정을 다 하슈?”
“ 해마다 그렇지 않습니까? 콩을 심어 놓으면 싹이 나자마자 꿩이란 놈이 와서 반은 파 먹고, 옥수수며 과일이라고 심어 놓으면 열매 맺자마자 까치며 온갖 새들이 와 거지 반 다 쪼아 먹고, 무 배추며 고추라두 심어놓으면 무름병이네 탄저병이네 뭐네 때문에 절반 건져 먹기도 어려우니 어디 농사지을 맛이 나겠습니까?”

새벽안개를 가르며 두런두런 오가는 두 노인의 말소리에 김 노인의 마나님이 잠에서 깨어 밖으로 나왔다.

“ 아이구, 아주머니도 내려와 계셨군요. 김 선생, 간밤엔 잠자리가 쓸쓸하지는 않았겠수? 아주머니, 김 선생이 뭐 교장 교감 욕심 다 버리구 정년하자마자 이 산골짝으루 들어왔다 했는데 아직 욕심 비우려면 한참 먼 것 같우.”
“ 영감님,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욕심을 비우려면 먼 것 같다는 말씀이 무슨 말씀이신지요?”
“ 아 그깟 고구마 몇 이랑을 멧돼지들이 캐 먹었다구 새벽부터 저렇게 혀를 끌끌 차고 계시지 않우? 나는 팔십 평생 이 산골짝에서 땅 파먹구 살면서 씨앗을 뿌릴 때마다 반타작이나 해 먹게 해 주십사 하고 저 축령산 산신령께 빈다우.”

“반타작이요?”
“ 그래요, 반타작. 어디 농사뿐이우? 나는 마누라와도 반타작만 했다우. 스무 살에 결 혼해서 쉰에 마누라 잃고 올해 팔십이니 함께 산 세월 삼십 년, 혼자 산 세월 삼십 년, 그래 이렇게 혼자 살지 않우? 어디 마누라와 산 것만 반타작인지 아시유? 자식 농사도 반타작이라우. 아들딸 모두 여덟을 낳았는데 글쎄 어려서 셋이나 잃어다우. 남아 있는 자식들 중에 제밥 제대로 먹는 놈이 반, 이 늙은 애비 뒤주만 쳐다보는 놈이 반, 그저 인생은 반타작 정도 하면 그런 대로 산 것 아니겠수?”
“영감님, 자식들이 영감님 뒤주만 쳐다보다니요?”
“김 선생네는 자식이 둘이라구 했지요?”
“네, 딸 하나 아들 하나, 둘입니다.”
“둘 다 여의었수?”
“아닙니다. 아들놈은 여의었는데 딸년은 사십이 낼모레인데도 갈 기색조차 없습니다.”
“ 허허, 그 댁도 반타작이구려. 나는 셋 잃고 다섯 자식을 살렸는데 그 중 셋은 제 밥벌이를 해서 그런대로 먹고 살아요. 그런데 둘째 아들놈과 막내 딸년이 사는 게 좀 궁색하다우. 그러다 보니 이 늙은 애비 눈치를 슬슬 봅니다. 딸년은 그래두 눈치만 보고 있지만 아들 메누리는 아주 노골적이에요. 이 근처가 개발된다는 것은 어떻게 알아 가지구 아 글쎄 땅값 오른 김에 한 뙈기 팔아달라고 생떼를 부려요. 새끼들 공부 시키는 데 돈이 숱해 든대나 뭐래나. 김 선생께서는 교육자였으니까 잘 아시겠지만 아, 이 세상에 이름 없이 생겨난 풀 없구 먹을 것 가지구 타고나지 않는 애 없는 것 아니겠어요?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다 나중에 먹구 살 텐데 뭔 그리 할애비 땅까지 팔아 공부를 시켜야 하는지 모르겠소이다. 말이 자식 공부시킨다는 것이지 애비 뒤주며 땅 모두 털어먹겠다는 것 아니겠어요?”
“ 어쩌겠습니까? 영감님이라도 땅을 잘 지키고 계셨기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자식들이 찾아오기나 하겠어요? 그나마 가지고 계시니 자식들이 와서 손을 벌리는 것이지요. 있을 때 조금씩 나누어 주세요. 잘못하면 돌아가신 뒤에 자식들 싸움판 됩니다.”
“ 나두 그 생각 안 하는 것이 아니지요. 그래두 늙은 애비라두 남아 있어 저것들이 찾아와 조르는 것이지요. 지 어멈이 있었으면 이것저것 잘 챙겨 주었을 텐데 말입니다.”
“ 잘 생각하셨어요. 영감님 말씀 들으니 반타작도 감지덕지로 받아들여야 맞긴 하지만 그래도 밭 갈고 씨 뿌리고 한 것이 너무 아까워서 그렇지요. 서울에서 멀지 않은 길을 오르내리며 애지중지 가꾼 것이 너무 속상해 올 가을을 끝으로 그만 두라고 저 양반께 그러는 걸요.”
“ 아, 무신 소리요? 그래도 김 선생 같은 사람이 이곳까지 내려와 초막이라두 짓고 씨도 뿌리구 과일낭구도 심어 놓으니까 이 축령산 산짐승들이 살맛나는 것 아니겠수?
산짐승 숫자는 해마다 늘어나는데 산속에 먹을 것은 약초꾼인지 뭔지 하는 사람들이 몽조리 캐가고 주워가니 산속에 먹을 것이 없어요. 그러니 저것들이 목숨을 걸고 새끼들 데리고 예까지 내려온 것 아니겠수? 김 선생, 그저 산짐승들과 나눠 먹고 반 건져 먹는다 하구 나와 예서 계속 지냅시다. 손주놈들도 이젠 시집장가 가서 밥벌이에 바쁜지 즈이 할멈 제사 때도 제대로 못 와요. 여간 쓸쓸하지가 않아요. 이렇게 쓸쓸하던 차에 김 선생이 내려와 말동무를 해 주니 여간 고마운 게 아니라우. 나 같은 농투사니두 가끔 서울 소식두 얻어 듣고 세상 물정도 배우잖우? 어디 그것뿐이우, 종
종 공자맹자 같은 문자두 얻어듣잖수? ”

그 사이 수수밭에는 벌써 산새들이 내려와 맛있는 아침을 쪼아 먹고 있었고, 김 노인 마나님은 막대기를 들고 산새를 쫓으러 아픈 다리를 끌고 수수밭으로 달려갔다. 김 노인은 박 씨 할아버지의 말을 귀담아 들으며 멧돼지가 달아났음 직한 골짜기를 먼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불현듯 굶주림에 고구마 밭을 마구 헤집었을 멧돼지 새끼들이 보고 싶었던 것일 게다. 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