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혜경(서울대치초등학교, 교감)

누구나 가끔, 배가 고픈 것처럼, 훌쩍 일상을 벗어 나고프다. 한바탕 소나기 그친 오후, 느닷없이 미지의 불안감에 흔들리고 싶은 유혹에 사로잡힌다. 생소한 먹거리에 입맛을 다시며, ‘죽어도 좋을’ 짜릿한 공포를 견뎌보고도 싶다. 그래서 낡은 배낭에, 달랑 카메라 하나 메고서 훌쩍 길을 나서기도 한다. 고즈넉한 둘레길을 걷기도 하고, 군중 속의 나를 확인하기도 한다. 이렇게 세상이 온통 회색빛이라 여겨질 때, 갈 수 있는 곳이 하나쯤 있으면 참 좋겠다.

때 이른 태풍과 폭우가 지나고 나면, 쏟아지는 햇볕에 마당의 꽃들이 백기를 든다. 팔뚝만한 백옥잠화가 화단을 가득 덮으며 담장 너머 너른 들녘을 바라보고 섰다. 찔레꽃 하얀 향기가 콧등을 간질이고, 늦장꾸러기 수국이 달처럼 동그란 꽃송이를 둥실 올렸다. 꽃을 보러 나가서 하릴없이 시든 꽃잎을 떼어 낸다. 잡초도 생명이려니 하나, 언제부터인가 날카로운 시선과 거친 손으로 낚아채듯 뽑아낸다.

손은 부지런히 풀들을 향해 움직여도 귀는 하늘로 열려있다. 북쪽 하늘로부터 쌔액거리며 비행기가 날아간다. 반사적으로 하늘을 우러러 소리의 흔적을 찾는다. 분명 바로 머리 위에서 나는 소리인데, 새털구름 때문인지, 강렬한 햇빛 때문인지 보이지 않는다. 너무 높게 날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아마 남녘으로 가는 것일 테지.

이 복잡한 거리에서 벗어나 혼자가 되고 싶어서, 물영아리 습지 오름에서 숨바꼭질하는 고라니들이 그리워서 비행기를 탔는지 모른다. 에메랄드빛 바다에 저린 발목을 적시고 싶어서일까? 친구가 기다리는 바람 부는 언덕이 보고파서일까? 30년 만에 눈가 짓무른 노모를 찾아가고 있을는지, 어쩌면 병상의 환우가 ‘가족과 함께 하는 여행’을 소원하였는지도 모르지. 저마다 사연을 안고 하늘을 날고 있을 것이고, 그들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것은 또 하나의 떨림이다. 그래서 비행기 지나는 소리는 작은 설렘이다. 마음 쿵쾅거리는 아픔이다. 그래서 그곳 바닷가 마을이 내 마음에 꼭 들었다. 하늘길이 환해지면 바닷길도 열린다. 멀리 고깃배 엔진 소리가 다가왔다 멀어져가는 사랑스러운 풍경이 있다. 온종일 크고 작은 파도가 윤슬 춤을 춘다. 그들의 은빛 술래놀이를 바라보는 것을 참 신비한 일이다. 어부의 낯은 뜨거운 태양의 열정에 그을렸다.

두꺼운 밧줄에 손마디가 굵어지고 굳은살이 박였다. 우리네 삶이란 그리 녹록한 것이 아니어서, 살다 보니 어깨가 늘어지고 허리도 굽었다. 가끔 흐린 시선을 멀리 밀어낸다. 모래 해안에는 갈매기 무리가 서쪽 해를 향해 해바라기 하다가 밀물에 밀려온 조개를 쪼아 먹는다. 종종거리며, 물결을 쫓는 새들의 발짓이 앙증맞다. 비상하는 날개에 반사되는 뿌연 햇살도 몽환적이다.

이제, 세월을 드리우던 낚싯대를 걷어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다. 거친 한낮을 달려온 해가 주홍 구름을 만들고, 물결마저 붉게 찰랑인다. 둥근 달이 동쪽 하늘에 고개를 내밀기 전, 서서히 다가오는 진보랏 빛 밤하늘을 맞이하는 것도 가슴 떨리는 일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고깃배를 몰며 어부는 하늘을 올려다 본다. 비행기가 보드라운 소리를 내며 불빛을 반짝 참인다. 아스라이 멀어져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이 쫓는다. 보드라운 모래가 맨발을 간질이는 해안사구, 해당화 향기 가득한 언덕에 편한 마음으로 걸터 앉는다. 칠흑의 어둠 사이로 게딱지 같은 집 몇 채가 올망졸망 어깨를 견주는 모습이 경이롭다. 빨간불 켜진 창가엔 도란거리는 웃음이 흘러나온다.

희망을 만드는 태양이 있고, 별빛 와글거리는 즐거움이 있어 참 고마운 일이다. 설렘으로 가득한 오늘, 그들 또한 내 인생에 엮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