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2022 봄호(246호)

시작, 만남, 그리고 교육

고효선 (서울특별시교육청, 교육정책국장)

세 번째 새해, 새 학기

서울교육 봄호를 어떤 이야기로 열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학교 이야기를 하기로 했습니다. 봄과 시작이라면 자연히 학교가 가장 먼저 떠오르니까요.

학교와 관련된 사람들은 해마다 세 번의 새해를 맞는 것 같습니다. 1월 1일과 설날, 그리고 3월 개학이지요. 학교의 생체리듬은 3월 개학에 맞춰 시작되니까 실상 가장 영향력 있는 새해가 아닐까 합니다. 새 학년의 시작을 맞이하면서 선생님들은 어떤 마음이 드는지 여쭤본 적이 있습니다. “아… 또 시작하는구나.”라는 대답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설레고 기대에 부풀기만 하겠습니까. 또다시 수많은 아이들을 새로 만나고, 한 해 동안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 상처를 주기도 받기도 하면서 조금씩 성장해 나가는 가장 ‘짠내 나는’ 삶이 바로 학교 교육의 일상일 것입니다.

게다가 올해도 코로나19는 잦아들 것 같지 않습니다. 코로나19와 함께 입학했던 아이들은 학교의 본모습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채 3학년이 되었습니다. 아이들이 집 이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며 가장 본받을만한 어른의 집단인 선생님들과 관계를 맺으며 또래들과 함께 사회적 존재로 성장해 나가는 곳인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한 것은 아이들 일생에 큰 공백을 남깁니다. 학력격차가 커지는 정도의 문제가 아니지요. 특히 가정의 여건이 나쁘거나 방치되는 아동의 경우 학교에서 그 결핍을 채울 기회를 많이 놓쳤습니다. 이 공백이 얼마나 큰지 가장 잘 알고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이 바로 교사들이기에, 코로나19 시기의 교사는 또 다른 고통을 가지고 교육을 합니다. 어떤 형태로 만나든지 만남이 있어야 교육은 시작됩니다. 그리고 교육을 통해서만 좋은 만남, 성장이 동반되는 만남이 지속될 수 있겠지요.

이런 상황에서 2022년의 세 번째 새해인 새 학기가 시작됩니다.

귀하게 대하겠습니다

올해는 어린이날 100주년이자 서울특별시학생인권조례 10주년이 되는 해입니다. 1923년 방정환 선생을 비롯한 ‘색동회’가 주축이 되어 5월 1일을 ‘어린이날’로 정하고 ‘어린이 선언’을 합니다. 이 선언문의 ‘어른에게 드리는 글’에서는 “어린이에게 경어를 쓰시되 늘 보드랍게 하여 주시오.”, “어린이를 책망하실 때에는 쉽게 성만 내지 마시고 자세히 타일러 주시오.”라고 당부하고 있습니다. 독립된 인격체로서의 어린이에 대한 존중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리고 2012년 1월 26일에 선포된 「서울특별시학생인권조례」가 올해 열 돌을 맞았습니다. 이 조례에는 제1절 차별받지 않을 권리, 제2절 폭력 및 위험으로부터의 자유, 제3절 교육에 관한 권리 등을 포함한 10개 영역에서 보장받아야 할 학생인권을 명시하고 있습니다.

전에 근무했던 어느 고등학교에서의 3월 학부모총회에서 자녀들을 귀하게 대하겠다는 약속을 했었습니다. 학교에서 귀하게 대접을 받아야 나중에 사회에 나가서도 귀하게 대접받을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귀하게 대접받은 경험이 있어야 다른 사람을 귀하게 대하는 법을 배운다고도 했습니다. 공부나 외모나 성격이나 가정 형편에 관계없이 서로 존중하는 것을 몸으로 익히는 것이 우리 학교의 교육목표라고 말씀드렸지요.

100년 전과 10년 전의 선언이, 그리고 오늘 우리가 학교에서 실천하려고 하는 일이 서로 똑 닮아있습니다.

얼마 전 ‘무명성 지구인’1이라는 노래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런 가사로 되어 있습니다. 샘이 숨겨져 있지 않은 사막이라도 언덕과 바람과 달그림자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이 있군요. 각각은 존재 그 자체로 존엄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 이런 눈이 떠지기를 저 자신부터 소망합니다. 2년을 보내고도 아직 끝나지 않은 감염병 시대를 겪으며 학교라는 존재가 훨씬 더 간절하게 다가옵니다. 다시 학교로 돌아와서, 만남을 통해 배움을 시작하는 시작 지점에서 우리 모두가 첫 번째로 다시 새겨야 할 가치가 아닌가 합니다. 그냥 편하게 말씀드리자면, 아이들은 그 전보다 더 힘들어지고, 동료들 간의 관계는 더 단절된 힘든 상황에서 새 학기를 시작하더라도 서로를 붙잡고 함께 견디면 좋겠다는 말씀이었습니다.

가르치는 사람은 배우는 사람입니다

교육자인 우리는 교육을 통해서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이런 생각이 문득문득 듭니다. 교육을 어떻게 정의하건 결국 사람의 ‘변화’를 일으키는 일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데 ‘바람직한 방향으로의 변화’라는 것은 인간이 자발적으로 불편함을 감수하는 태도를 갖도록 하는 굉장히 어려운 과정입니다. 내 마음대로 하면 편한데 다른 사람을 생각해서 하고 싶은 것을 참도록 만드는 것은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심지어 생태전환교육 같은 것은, 지금 알지도 못하는 미래의 대상을 위해 에너지를 아끼고 일회용품을 줄이는 불편을 자발적으로 해내도록 만드는 숭고하기까지 한 태도를 갖도록 하는 것입니다. 하고 싶은 것을 스스로 억누르고 불편을 견디도록 가르치는 일은 그 대상에게 별로 인기가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도 아이들이 선생님을 따르고 좋아하는 것을 보면 ‘참 대단하게 해내고 계시는구나’라는 감탄이 듭니다.

교육을 업으로 삼는다는 건 참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위에 말한 것 같은 일을 가르치기만 해선 마음이 편치 않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이것을 실천해야 한다는 스스로의 압박감에 늘 눌려있기 때문이지요. 게다가 교육은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 사이에 일정 정도 비대칭성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가르치는 내용에 관한 한 우위에 있어야 교육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교육이 잘 일어나면 배우는 사람이 빨리 성장해서 가르치는 사람과의 차이는 점점 좁혀지게 되겠지요. 이때 가르치는 사람은 말로 설명할 수 없는 큰 보람을 느낍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계속 반복되다 보면 내 안의 것이 텅 비는 느낌, 소진되는 느낌이 들게 됩니다. 그래서 계속 배우지 않으면 제대로 가르침을 줄 수 없게 됩니다.

권재원(2020), 『교육 그 자체』, 도서출판 우리학교.

글이 말하듯이 배움은 어느 순간에나 일어나고 있습니다. 새로운 자극과 마주칠 때 그것을 배움으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가르치는 사람이 가져야 할 매우 중요한 덕목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일 할아버지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손녀에게 가르치고 싶어서 다른 나라 국민이나 외국인 노동자를 낮추어 말했다고 합시다. 그 말을 들은 손녀가 이제는 세상이 변했으며 외국인들도 함께 살아야 하는 우리 공동체의 일원이라고 항변을 했다고 합시다. 서로 다른 역사를 경험하며 살아온 할아버지가 화내지 않고 이 말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그렇게 하신다면 매우 존경받을 분이시지요.

우리 교실에서도 커다란 가치에서부터 아주 소소한 단어의 사용에 이르기까지 선생님들은 수시로 이런 장면과 맞닥뜨릴 것입니다. 선생님들 간에도 세대와 가치관의 차이가 있으니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이때가 배움의 기회이기도 합니다. 책이나 연수를 통해 배우는 것 말고도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귀와 마음을 열고 듣는 데서 배움은 일어납니다. 그런 배움이 우리를 소진되지 않도록 채워 준다고 생각합니다. 확신에 찬 태도보다 종종 자신을 의심하고 성찰하는 태도가 교육자로서 더 적합한 자질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입니다. 소위 말하는 ‘팔랑귀’의 미덕이라고나 할까요. 이재무 시인은 그의 시 ‘침묵’에서 “침묵은 말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교육자인 도널드 L. 핀켈은 『침묵으로 가르치기』라는 책에서 학생에게 생각하고 말할 여유를 주라고 합니다. 보통 유창하고 열정적인 말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영감을 불어넣는 교사를 훌륭하다고 합니다. 열정적인 강의를 듣고 나면 감동이 밀려오고 자기도 그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을 할 것입니다. 하지만 마음 한쪽에서는 아무리 열심히 해도 저렇게 되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도 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무엇을 배웠는지 까맣게 잊어버리지요. 연수에서 너무 훌륭한 강사의 강의를 듣고 난 뒤의 허전함은 우리 자신도 종종 느끼는 일입니다. 새 학기에는 동료들과 아이들과의 새 만남 속에서 소소한 배움을 발견하는 기쁨을 나누면 좋겠습니다.

만나시지요

수업에 관한 고민과 연구를 가장 깊이 하는 연구자 중 한 사람인 이혁규 교수가 최근에 낸 책 『한국의 교사와 교사 되기』2에는 미국과 일본 교사의 수업 연구 문화를 비교한 자료가 실려있습니다. 양국의 교사들이 교수 활동을 개선하기 위해서 어디에 시간을 많이 쓰고 있는지를 비교한 자료입니다. 미국 교사들은 ⓐ‘교육과정을 작성하거나 문해’하는 데 시간을 가장 많이 쓰고, 다음으로 ⓑ ‘혼자서 수업을 설계한다’, ‘ⓒ협력해서 수업을 설계한다’, ⓓ ‘서로 교실 수업을 관찰하고 토론한다’의 순으로 나타났습니다. 반면 일본 교사들은 ⓓ ‘동료의 수업을 함께 관찰하고 토론’ 하는 데 시간을 가장 많이 쓰고 있으며, 흥미롭게도 미국과 완전히 반대의 순서로 나타났습니다. 그렇다면 위의 네 가지 목록 중에서 한국 교사들은 어디에 시간을 가장 많이 사용할까요? ⓑ ‘개인적으로 수업을 설계’하는 데 시간을 가장 많이 쓴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미국 교사로부터는 교육과정을 분석하는 문화를, 일본 교사로부터는 수업을 함께 공유하는 문화를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훌륭한 자질에 더해 헌신성까지 갖추고 있는 우리나라 선생님들이지만, 협력해서 교육과정과 수업을 만들어가는 일에는 아직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 같습니다. 최소 16년 이상 자신이 교육 받아온 환경이 ‘사면이 막힌 교실 안’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일지 모릅니다. 교사가 된 이후에도 다른교사의 수업에 들어가는 것을 조심스럽게 여기는 문화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예전에는 아주 심했습니다. 심지어 교장 선생님이 수업 중에 뒷문을 열고 들어오시길래 수업하다 말고 분필을 놓고 나와버렸다는 무용담이 통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당연히 지금은 그렇지 않지요. 동료 교사와 교장, 교감, 심지어 학부모에게도 수업을 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 스스로 나서서 일상의 수업을 열거나, 수업 준비를 여러 교사가 함께하는 경우가 많지는 않습니다.

수업, 그러니까 배움의 장에서 만남이 자유롭게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교육의 본질에 가까워질 수 없습니다. 교사는 동료와 협력해서 연구하지 않으면서 교실에서 학생들과 협력 수업을 진행한다는 것이 가능한 일일까요. 협력의 기술은 설명을 통해서가 아니라 교사의 태도와 가치를 통해, 그리고 학교의 문화를 통해 학생들에게 전수됩니다.

최근 교원학습공동체가 자리 잡아가고 있습니다. 일본의 교육학자이자 사회학자인 우치다 다츠루가 교육청이 주관하는 연수가 많아지면서 교사들이 스스로 운영하던 연구회가 줄어들고 있다고 십수 년 전에 어느 책에서 한탄한 것을 읽었습니다. 연수도 중요하지만, 교육현장에서 교사들의 연구와 협력이 왕성해지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협력을 이론으로 배운 교사는 학생에게 협력하는 배움을 줄 수 없습니다. 교원학습공동체는 이런 면에서 매우 소중한 자산입니다.

교원학습공동체의 주제가 반드시 엄숙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첨단 에듀테크, 깊이 있는 교육이론, 새로운 수업 방법을 만나서 함께 배워가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습니다. 하지만 수다 마당이라도 괜찮지 않을까요? 선생님들은 거의 직업병처럼 모든 이야기가 아이들로 수렴하는 증세가 있지 않습니까. 교육을 모티브로 하는 어떤 만남에서도 좋은 배움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전에 근무했던 학교에 교사 우쿨렐레 동아리가 있었습니다. 취미 모임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어느 정도 기량이 높아지자 학교 축제 때 공연을 해서 아이들의 환호를 받았지요. 그러더니 학생 우쿨렐레 동아리를 지도하기도 하고, 정서적으로 보살핌이 필요한 아이들을 데리고 악기를 연주하면서 사제 멘토링도 하고 그러시더군요. ‘배움의 연쇄’가 일어나고 있는 거지요.

또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학교의 보직교사를 줄이면서 부서를 재편하기로 했습니다. 작은 학교는 부장교사 수가 많으면 담임 맡을 분들이 줄어들어서 힘이 듭니다. 회의를 거듭하면서 교육과정 재구조화, 수업 공개와 연구, 기초학력 지도 일을 묶어서 ‘교육과정부’를 만들었습니다. 일이 무척 많은 부서가 되어버렸지요. 일은 많았지만 부서원들이 함께 일을 설계하고 실천하면서 배우는 만족감이 컸던 모양입니다. 다음 해 교육과정부장 선생님이 떠날 때 젊은 선생님 세 분이 교육과정부장을 지원했습니다. 요즘같이 보직교사를 꺼리는 이 마당에 말입니다.무슨 일을 할 것인가, 어떻게 할 것인가, 교육적으로 의미 있는 일인가를 함께 고민하며 일하는 과정이 고달프면서도 성장하는 기쁨이 있었던 것이지요. 만나서 같이하다 보면 이렇게 되지 않겠습니까. 바쁘더라도 서로 꼭 만납시다.

일단 열어보자구요

학교 이야기를 하나 더 하겠습니다. 교장실이 있는 1층에는 교무실, 행정실, 회의실이 쭉 이어져 있었습니다. 아이들이 수업을 마치고 집에 갈 때 이 복도를 지나갑니다. 아이들은 도대체 왜 그렇게 복도에서 달리는 건지, 달리면서 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지, 소리를 지르면서 왜 또 그렇게 욕을 해대는지, 그 시간이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어느 해 창호 공사를 했고, 창문을 모두 투명유리로 바꿨습니다. 그리고 블라인드를 내리지 않고 안팎이 환히 보이도록 투명창 그대로 두었습니다.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아이들이 마구 뛰다가 교장실을 흘깃 들여다보곤 머쓱해하면서 살살 걸어가는 겁니다. 친구들과 나란히 걷다 보니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서로 얘기가 들리게 되구요, 가끔은 안에 있는 교장 선생님과 눈을 맞추며 인사를 하기도 합니다. 그때 깨달았습니다. 교장실이나 교무실은 닫힌 공간이고 복도는 밖이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복도는 긴 폐쇄 터널이었던 거지요, 아이들의 질주 본능을 불러일으키는. 그리고 아무와도 눈이 마주치지 않는 밀폐공간이었고요. 창을 투명하게 바꾸고 서로의 시선이 마주치자 생활 습관이 달라졌습니다.

교실도 마찬가지입니다. 복도 창문은 간유리로 되어 있어서 교실 안팎이 서로 보이지 않고, 앞뒤 출입문에 있는 작은 투명창(‘빼꼼이 창’이라고 부르기로 하지요)마저 막아버린 교실이 많이 있습니다. 아이들의 시선이 분산되면 수업에 집중이 안 된다는이유를 듭니다. 그런데 수업하다 가끔 바깥도 내다보고, 복도를 오가는 사람에게 잠시 한눈을 판다고 해서 정말 집중력이 떨어질까요? 선생님들이 학생들의 그런 모습을 참기 어려워서 그런 것은 아닐까요? 시간이 좀 지나고 나면 투명창에 익숙해져서 누가 오가는지 별로 신경을 쓰지 않게 됩니다. 무엇보다 교사 입장에선 자신의 수업이 반쯤은 늘 공개되어있는 느낌이 들 것 같습니다. 그래서 창의 시야가 열려야 하는 게 아닐까요? 여러 교사가 함께 수업을 진행하거나, 일상적인 수업 공개가 아직 부담스럽게 여겨진다면 우선 수업 장면을 열린 공간으로 만드는 것으로도 수업 공개의 작은 지름길을 만들게 되지 않을까 합니다. 다행히 요즘 새로 짓는 학교는 창이 모두 투명하다고 합니다. 여기에 더해 코로나19로 인해 원격수업을 하면서부터 폐쇄공간에서의 수업은 조금 개방되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대도 해 봅니다. 어떤 모양으로든 열고, 만나고, 협력하는 교육으로 한발씩 다가가면 좋겠습니다.

위에서 인용했던 이재무 시인의 시 ‘동사를 위하여’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많은 이야기들은 사실 ‘명사’일지 모릅니다. 어떤 이야기라도 읽고 덮어버리는 순간 ‘명사’로 박제되어 버리니까요. 이야기를 하는 저 역시 저의 자리에서 실천하지 않는다면 그럴듯한 ‘명사’를 나열하고 있을 뿐이라는 반성을 합니다.

그렇다면 이번 새 학기에는 ‘동사’ 하나 다 같이해 보면 어떨까요. 교실 출입문의 ‘빼꼼이 창’을 가리고 있는 무언가를 떼어내는 겁니다. 테이프를 떼어내는 ‘찌지지이익’ 소리로 다같이 새 학기를 열어보자구요!

  1. 이승윤, ‘무명성 지구인’, 2018 발표, 수록 앨범 ‘달이 참 예쁘다고’.
  2. 이혁규(2021), 『한국의 교사와 교사 되기』, 교육공동체 벗, 60~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