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23 봄호(250호)

[서평] 어느 날 갑자기 생긴
작지만 다정한 초능력에 대하여
– 정세랑의 『재인, 재욱, 재훈』을 읽고

권경진(당곡고등학교, 사서교사)

평소에 히어로물이나 초능력을 다룬 영화와 책을 즐겨보는 편이다. 사서교사지만 편독이 심한 편이라 장르도 따지고 작가도 따진다. 학교도서관 신간 도서를 구입하기 위해 서평집들을 살펴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초능력이 생긴 삼 남매의 이야기’라는 대목에서 눈길이 멈추었다. 초능력인데 정세랑 작가라니. 날 위한 책이 새로 나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인, 재욱재훈』은 2014년에 나왔던 책이 2021년 하반기에 리커버되어 나온 책이었다. 취향에 맞는 재밌는 책이겠다 싶어 가볍게 시작했는데, 내용은 생각보다 깊고 따뜻했다. 새 학기를 맞은 선생님들께도 작은 다정함과 친절함이 불러온 더 큰 기쁨을 공유하고자 한다.
『재인, 재욱재훈』은 삼 남매가 휴가를 보내고 집으로 돌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휴가를 마치고 배고픔에 국도로 내려와 식당을 찾던 삼 남매는 우연히 발견한 칼국수 집에 들어가게 된다. 조개가 묘하게 형광빛이다 싶었지만, 칼국수는 누구나 알 법한 평범한 칼국수였다. 형광빛 조개를 먹은 삼 남매는 각각 현재 자신의 불편함과 관련된 조금은 소소하지만 특별한 능력이 생겼음을 알게 되고, 그 무렵 익명의 소포와 메시지를 하나씩 받는다. 재인에게는 손톱깎이와 ‘save 1’이 적힌 메시지, 재욱에게는 빛이 아주 강렬하고 곧은 레이저와 ‘save 2’가 적힌 메시지, 재훈에게는 사용처를 알 수 없는 열쇠가 달린 목걸이와 ‘save 3’이 적힌 메시지를. 삼 남매는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이 누구를, 어떻게 구하라는 것일까 고민하게 된다.

기업연구소에서 근무하는 첫째 재인은 화학제품을 늘 만지는 탓에 손톱이 성할 날이 없다. 그런데 매번 갈라지고 부서지는 손톱이 조개를 먹게 된 후 아주 강하고 튼튼하며 빨리 자라게 되었다.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가 꿈이었으며 늘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사고하는 재인은 택배를 받자마자 자신이 누군가를 구해야 한다면 어떻게 구할 것인지, 손톱깎이로 자른 자기 손톱을 어떻게 사용할 수 있을지 실험하기 시작한다. 최근 사고를 당해 뇌수술을 한 둘째 재욱은 자신의 신경이 많이 무뎌지고 둔해짐을 느껴 누군가 중요한 말, 중요한 일에만 다른 색깔로 표시를 해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형광빛 조개를 먹은 이후 위험과 문제 상황을 감지할 수 있는 시야를 갖게 되고, 위험한 건설 현장에서 일하던 탓에 새로 생긴 능력을 삼 남매 중 가장 많이 활용한다. 머나먼 아랍 땅에서 잠이 오지 않을 때마다 익명에게 받은 레이저를 창문 밖으로 쏘아보기도 한다. 평소 지각이 잦은 셋째 재훈은 자신이 지각하는 이유를 노후화된 아파트의 느린 엘리베이터 때문이라고 이야기한다. 형광빛 조개를 먹은 이후 엘리베이터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겨 지각하지 않게 되었지만, 엄마가 강제로 신청한 해외 교환학생 프로그램 때문에 엘리베이터가 하나도 없는 미국 남부의 농장마을로 가게 된다.

삼 남매에게 생긴 이 초능력들은 하찮게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것이 이 소설의 포인트다. 영화에서 나오는 초능력과 히어로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다. 나와 관계가 없는 픽션, 허구라고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이 책의 주인공들은 작은 능력으로 일상 속에서 누군가를 돕게 된다. 판타지 소설이라고 하기엔 너무 평범한 일상들의 나열이고 작가의 문체나 어휘도 화려하진 않지만, 삼 남매의 이야기가 번갈아 가면서 나와 지루하지 않고 흡입력이 있다. 주변 인물들이 등장할 때마다 ‘이 사람이 주인공이 구조해야 할 인물인가?’ 주의 깊게 보게 된다. 사건들이 발생할 때마다 어디서 초능력이 사용될지, 사건이 어떻게 해결될지 계속 궁금증을 자아내며, 해결되었을 때 쾌감이 있어 짜릿하고 속 시원한 기분마저 든다.

내가 정세랑 작가 책을 찾아 읽게 되는 이유 중 하나는 여성에 대한, 여성을 다루는 시선과 방식이 마음에 들어서이다. 이 책은 대한민국 사회의 통념적인 성 역할, 성 고정관념, 그리고 전형적인 가부장제 가족의 모습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하지만 여자가 주변 인물이 아닌 주인공으로서 목소리를 내며 통념적, 전형적 사회상에 반하는 작가의 생각을 뚜렷하게 전해준다. ‘여자아이가 대부분의 이야기에서처럼 누군가에게 구해지지 않고 다른 사람을 구하는 이야기, 여자아이가 다른 여자아이를 구하는 이야기.’(132쪽)를 좋아하는 첫째 재인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는 듯하다. 그리고 성희롱하는 직장 상사에게 “팀장님, 그거 성희롱이에요. 완전 싫어요.”(95쪽)라고 똑 부러지게 말하는 재인의 대사를 통해 대한민국 사회 속의 흔한 젠더 이슈들을 일부러 꼬집어 주는 듯하다. 이외에도 작가는 가정폭력, 데이트폭력, 인신매매, 마약 · 총격 사건 등 무겁지만 드물지 않게 발생하는 사회 문제들을 배경 사건으로 집어넣어 관심을 두고 생각하게 만든다.

소설을 읽으면서 나에게 내가 알아차리지 못한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봤다. 당연한 것이라 크게 인식하지 못했지만,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어 뿌듯했던 경험을 되짚어 보다가 장점 하나를 발견했다. 나에게는 주변을 이미지화해서 기억하는 능력이 있는 것 같다. 예를 들면 지인들과 길을 찾을 때 누구보다 간판을 빨리 발견한다거나, 지나온 간판의 위치를 기억해내 길을 잘 찾는 것, 도서관 이용자가 책을 찾을 때 서가를 쳐다보고 그 책이 자리에 없다는 것을 바로 알아차려 대출 중임을 알려주는 것. 실제로 얼마 전에 외부 독서 모임 때문에 어떤 책이 꼭 필요한데 제자리에 없다고 문의한 교사 이용자가 있었다. 시스템에서도 대출 가능한 책이라고 나와 책을 꼭 찾고 싶다고 했는데, 순간 책이 분명 서가 어딘가에 꽂혀 있었던 것을 본 기억이 났다. 실제로 내 기억 속 자리를 가보니 그 책이 있었다. 엉뚱한 자리에 꽂혀 있던 것이다. 선생님은 어떻게 찾았냐며, 어떻게 기억했냐며 신기해하셨다. 더불어 꼭 읽어야 하는 책이었는데 정말 고맙다고, 다행이라고 거듭 인사까지 하셨다. 없어진 책을 찾는 것뿐 아니라, 이용자의 레퍼런스에 대응해 줄 때도 나의 이 기억력은 아주 많은 도움이 된다. 실제로 읽지 않은 책이었지만 책의 표지와 뒷면, 목차가 기억나 이용자에게 쉽게 권해줄 수 있다. 이 능력을 삼 남매가 가진 ‘능력’이라고 생각하니 사서교사인 나를 구한 너무나 도움이 되는 고마운 능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이 스스로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아직도 세계의 극히 일부인 것 같아. 히어로까지는 아니라도 구조자는 많을수록 좋지 않을까?”(163쪽)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힘을 주면 기쁨과 보람이 생긴다. 주인공들에게는 작은 초능력이 생겼고 그 능력을 이용해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왔지만, 사실 그 능력 자체만으로는 사람들을 구할 수 없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재인과 같은 주변 관찰력과 재욱과 같은 다정함, 재훈과 같은 친절함이 있었기 때문에 능력을 적재적소에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지 않을까?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은 늘 있다. 어쩌면 구해지는 쪽은 구조자일지도 모른다는 재욱의 말처럼 우리도 작은 다정함, 친절함으로 누군가를 구하고 더 큰 구원을 받게 될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교사로서 고등학생인 재훈이 형광빛 조개 사건으로 인해 진로를 정하게 되었다는 맨 마지막 장의 결말이 그렇게 마음에 들 수가 없다. 어떤 진로일지는 책을 읽고 직접 찾아보시길! 선생님들께도 이 쾌감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