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Vol.229.겨울호

추억을 저금할 때

김일환 미얀마 띨라와미타사학교 한국어 자원봉사자
(전 서울특별시동부교육지원청 교육장)

 

미얀마에서 한국어 교육 자원봉사를 한 지 10개월 되었다. 3, 4년 산 것처럼 길게 느껴진다. 그러나 돌아갈 날이 되면 한두 달 지낸 것처럼 짧게 느껴지리라. 원래 인간 심리가 그렇다.

지인들이 묻는다. “그 더운 나라에는 뭐 하러 갔어?” “글쎄, 딱히 대답할 수 없네요. 좀 길어요.”

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인성진로연구부장으로 있을 때였다. 학생상담자원봉사제를 운영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남성자원봉사자 한 분을 만났다. 이런 저런 이야기 끝에 묻고 싶은 것을 꺼냈다.

“근무 시간 중일 텐데, 이렇게 봉사 활동하러 다녀도 되나요?”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봉사가 제 직업입니다.”

돈이 얼마나 많기에 봉사를 직업으로 택할까? 그러나 그는 부자도 아니었다. 그는 말을 보탰다.

“미래의 직업은 봉사 밖에 없습니다.”

그와의 만남은 그렇게 끝났는데, 그의 마지막 말은 화두가 되어 내 기억 속에 남아있었다.

“어, 그래? 그럼, 그 사람 때문에 미얀마에 간 거네?”

“시작은 그랬어요. 그러나 다른 이유도 많아요. 그 중 하나는 추억이에요.”

성공한 인생이란 어떤 것일까? 젊었을 때는 남들이 부러워할 일을 찾는다. 업적을 쌓고 돈을 모은다. 남에게 자랑할 일이 필요하다. 나이를 먹으면 가슴 속에 떳떳한 추억, 가슴에 사무치도록 그리운 추억을 필요로 한다.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곱고 아름다운 추억을 갖고 싶어진다. 나를 세우는 이야깃거리 대신 나를 데워주는 추억거리를 차곡차곡 쟁기고 싶어진다.

훗날 손주들이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할 때, 남을 돕고 살라고 훈화하는 대신, 내가 미얀마에서 겪었던 일을 말해주고 싶다. 봉사한 일은 아주 조금만 말하고 싶다.

 

“내가 봉사했던 학교는 양곤 중심에서 동남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이야. 30년은 족히 넘어서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는 시내버스에서 내리면 3km를 걸어 들어가거나 사람 배달 오토바이를 타야 했지. 한 번은 아리랑을 가르쳤어. 첫 음악 시간이었지. 그렇게 못 부를지 몰랐어. 두어 번 따라 부르면 될 줄 알았지. 웬걸? 스무 번을 불러주어도 못 따라 하는 거야. 내가 1976년에 교사가 되었는데, 그때도 한국에는 오르간이 있었어. 그런데 미얀마 학교에는 악기가 한 개도 없었어. 음악 수업을 해 본 적이 없대. 그 날 세 반을 가르쳤는데, 내 평생 하루에 아리
랑을 백여 번 부른 날은 그 날밖에 없을 거야. 나중에는 목에서 쇳소리가 꺽꺽 나왔어.”

“그게 추억이야? 기껏 그런 걸 찾으러 미얀마를 갔단 말이야?”

“네, 나는 추억이 많은 사람이 잘 산 것으로 생각하니까요. 뜻하지 않게 인생 지침을 얻기도 해요.”

 

슈바이처처럼 병자를 고치러 밀림으로 간 것도 아니고, 오드리 햅번처럼 죽어가는 어린이를 구하러 사막으로 뛰어든 것도 아니다. 미얀마가 무덥고 풍토병도 있지만, 싼 음식 재료가 사시사철 풍족하여 굶을 염려가 전혀 없다. 또 미얀마가 한국보다 훨씬 못 살지만 가족 유대가 강하고, 아무리 가난해도 나보다 못한 사람을 도우며, 현실 만족 의식이 커서 한국보다 행복하게 살고 있다. 나도 덩달아 행복해진다.

나의 대답이 시원찮다고 느꼈는지 어떤 이는 본인이 나 대신 대답해 주려고 애쓴다.

“인생 이모작을 하러 간 거지. 그것도 봉사하러 말이야. 그게 바로 진정한 인생 이모작이야.”

“아유, 그게 아닙니다. 그냥 기회가 주어져서 미얀마에 온 것뿐이에요. 음성 미타사에서 미얀마에 학교 건물 기부 사업을 시작하는데 적임자가 없대요. 이왕이면 봉사와 관련된 추억을 찾고 있던 터라 한달음에 온 거라구요.”

이모작이라 하면 일모작 다음의 농사인데, 일모작을 지은 기간 만큼 이모작을 할 생각이 눈꼽만큼도 없고, 그만큼 열정을 들일 여력도 없다. 애초에 이모작을 할 생각은 없었다.

한 가지 염두에 두었던 것은 열심히 하되 보답을 바라지 말자는 것이었다. 길에서 만난 강아지를 쓰다듬는 사람이 강아지가 자신에게 무언가를 보답할 것이라고 기대하며 먹을 것을 나누어 주지 않는다. 개도국에서의 봉사는 그들에게 바랄 것이 하나도 없다. 그저 그들이 잘 되기를,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내 것을 나누어 주기만 하면 된다.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또 묻는다.

“그렇게도 좋았어? 별로 고생스럽지 않단 말이지? 나도 좀 불러주면 안 될까?”

“불러주긴요. 오고 싶으면 그냥 오세요. 할 일은 참 많아요. 하지만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으려구요?”

객관적인 기준으로 본다면 딱히 어렵지는 않지만 아주 쉽지도 않은 일이다. 밥하고 청소하고 빨래하는 일상생활이 어렵다. 김치와 깍두기도 시도했는데, 성공 확률은 딱 50%이다. 그 실력으로 학교에서 깍두기 담그기 실습까지 시켰다.

그러나 대체로 변화 없는 일상생활이다. 갈 데도 없다. 지루하다. 나 같은 경우에는 이 나라 말을 배우고, 동화를 쓰는 데 빈 시간을 보낸다. 각오를 해야 한다.

고생스러운 것이 하나 더 있다. 아프면 안된다는 강박관념이다. 병원 수준이 낮아서 혹 떼러 갔다가 혹 붙여서 오는 수가 있다. 조직의 일원이 아니라 나처럼 홀로 온 사람은 그 강박관념이 유달리 클 수밖에 없다.

나 홀로 정착 과정도 아주 쓰리다. 식재료나 생필품을 구하는 문제, 가구를 사는 문제, 얼마 주고 사야 적합한 것인지, 모기를 어떻게 없애는지, 프린터가 고장 나면 어디로 가야 하는지……. 초기에는 이래저래 뜯기는 돈도 꽤 된다. 정착 수업료를 지불했다고 생각하며 잊으려 하지만 마치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다. 그래서 말인데, 혹시 해외 봉사활동을 한다면 조직체를 선택하는 것이 좀 낫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런 불쾌한 기억마저도 모두 추억거리가 될 것을 안다. 몇 년 후 어느 날, 불현듯 미얀마 제자들이 그리워지면 홀연 방문해보려 한다. 한국어를 배운 것이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었을까? 학생들에게 꿈을 주겠다고 늘 말해 왔는데, 정말 꿈을 준 것인지 물어보고도 싶다. 교수 방법을 혁신하라고 부담 주던 선생님들은 그 때까지도 계실까? ‘사랑해 당신을’ 노래를 기억할까?

내가 새벽마다 장을 보는 띤간준 재래시장은 어떻게 변할까? 나와 수인사를 하고 지내는 상인들은 그때도 나를 알아볼까? 그들은 반가워서 팔고 있는 채소, 과일, 꽃 등을 공짜로 싸주려할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한국 립스틱 하나씩을 선물해야지.

오늘도 추억을 돼지 저금통에 집어넣는다. 마음이 마르면 열어봐야지. 한두 개만 꺼내도 봄비처럼 촉촉해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