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교육20182018 겨울호 (233호)

통일독일의 동독청소년 사회통합을 통해 보는
21세기 통일한국의 청소년 사회통합

이민희 평택대학교 아동청소년교육상담학과 교수

통일독일의 청소년 사회통합 배경과 의의

제2차 세계대전 후 1949년 동독과 서독으로 양분되었던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40년 만에 마침내 하나의 독일로 통일되었다. 통일되기 전 분단되었던 동독과 서독은 1961년 베를린 장벽이 세워져 인적교류가 중단되기 전까지 이미 수백만 명이 동·서독을 왕래할 수 있었다. 이후 서독 수상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의 새로운 동방정책(Die neue Ostpolitik)에 의해 양국은 1972년 12월 역사적인 10개조의 ‘기본조약’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 따라 서독과 동독은 상호 독립성과 자주성을 인정하고, 평화를 위해 서로 존중하는 것을 토대로 군비축소와 경제, 학술, 문화, 스포츠, 통신, 환경 등의 각 분야에서 다양한 교류와 협력을 통일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추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김학성, 1996:7∼49).

갑작스럽게 통일을 맞게 된 독일은 그동안 인내하며 준비해 왔던 민족적 통일은 이루었지만 이로 인한 사회적 혼란과 통일비용을 감당하기에는 실로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무엇보다도 통일 전 각기 다른 사회체제에 익숙해 있던 서독과 동독 국민들의 사회적 통합이 가장 어려웠다. 그 중에도 서독청소년과 동독청소년 간 젊은 세대들의 사회통합은 더욱 많은 문제점들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독일 통일 이후 동독지역의 청소년들이 정치, 사회, 가정, 교육, 고용, 여가 및 문화와 같은 영역에서 갑작스럽게 겪어야만 했던 사회통합의 진통이 가장 컸는데, 이는 한반도가 통일되었을 때에 북한청소년이 부닥칠 어려움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본 글은 이러한 통일독일 동독청소년의 사회통합 과정을 반면교사로 삼아 21세기의 어느 시점에 맞게 될 수도 있는 통일한국의 청소년 사회통합을 선제적 대응 차원에서 다각도로 고찰해 봄으로써 미래 통일한국의 사회통합을 준비하고자 하는 데 그 의의를 가지고 있다.

동독청소년의 정치·사회적 영역에서의 사회통합

독일의 재통일이 공식적으로 이루어진 것은 1990년 10월 3일이었다. 하지만 이에 앞서 1989년 가을, 동독에서 있었던 집회와 시위들은 독일 통일의 전주곡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시위에는 청소년의 참가도 적지 않았는데, 10월 7일과 8일 양일 간 베를린(Berlin)에서 있었던 시위에서는 참가자의 40% 가까이가 청소년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당시 동베를린을 넘어서 서베를린으로 행진하며 외친 이들의 구호는 “고르비(Gorbi)2)”, “우리는 여기 머물겠다.”, “지금 우리는 간다.(통일로)”와 같은 외침들이었다(Jugendwerk der Deutschen Shell, 1992:207∼208). 통일 전 서독은 지금과 같이 자유민주주의 이념을 바탕에 두고 자본주의 경제체제로 움직이는 사회였고, 동독은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정치이념으로 삼고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기본으로 하는 국가경영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 통일 전까지 서독의 언론은 매년 동독에서 서독으로 장벽을 넘어오다가 사살된 젊은이들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보도해왔다. 이는 동독의 사회주의 독재체제에서 교조적인 교육과 통제를 통해 비록 외면적으로는 사회주의 체제에 잘 통합된 것 같아 보이는 동독청소년들이지만, 그들의 실제 내면에는 서독의 자유민주주의 사회체제에 대한 갈망이 적지 않았던 것을 보여주는 단초이다. 결국 40년 간 전체주의적인 사회주의 체제로부터 이들의 사고와 행동양식에 지배적으로 형성되었던 정치·사회적 장벽도 실제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함께 무너져 내렸다.

동독청소년의 정치·사회적 사회통합에서 동독청소년이 어려움을 가졌던 원인은 무엇보다 그들에게 두려움과 불안을 가져다주었던 대량 실업의 문제였다. 사실 청소년들에게는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보다 통일을 통한 자유의 획득과 민족의 동질성이 회복된 것이 정치·사회적 사회통합의 가장 긍정적 측면이었다. 반면에 그들에게 주어진 당시의 혹독한 경제적 어려움은 외국인 노동자들을 향한 극우적 폭력을 행사하는 등 이들로 하여금 통일을 긍정적으로만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는 사회주의 인간형으로 사회화되었던 이들이 동독 지역의 대량 실업에 직면하여 자본주의 인간형으로의 변화를 요구받으면서 겪은 심한 사회·심리적 갈등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전성우, 1995: 23). 특히, 사회주의 체제에서는 개인의 정체성보다는 집단의 정체성이 강조되어 사회화되기 때문에 통일 후 혼란한 정치·사회적 변화 속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개체를 온전히 유지하는 것이 그들에게는 매우 어려운 과제였을 것이다.

이러한 통일독일에서 동독청소년의 정치·사회적 사회통합의 어려움을 통해 우리가 현재의 시점에서 배워야 할 것은 무엇보다 정치교육이다. 서독이 통일을 바라보며 1963년 연방정치교육센터(Bundeszentrale für politische Bildung)를 설립해서 통일을 준비해왔듯이 대한민국도 비록 늦었지만 국민 전체를 대상으로 제대로 된 정치교육과 평화교육을 시켜야 된다. 현재 독일의 연방정치교육센터와 같은 기능을 하고 있는 대한민국의 기구는 통일교육원이다. 하지만 통일교육원의 교육내용은 통일을 준비하는 역할과 기능을 수행하는 것보다는 북한에 대응하여 남한의 정치·사회적 체제와 이념을 선전하고 북한체제를 비판하는 일에 치우쳐 왔던 것이 사실이다. 지금부터 통일을 준비하는 차원에서 거시적, 장기적 목표를 가지고 우리 청소년들에게 학교의 교과과정을 통해 평화로운 통일을 준비하는 민주시민교육을 시켜야 한다(최영돈, 2014: 105∼107). 이와 함께 현재 대한민국에 거주하고 있는 북한이탈자유민과 그들의 자녀들을 대상으로, 이들이 어떻게 정치·사회적으로 사회통합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실험적 이론 연구와 그의 실천적 적용을 위한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노력들이 있어야 하겠다(맹영임, 길은배, 2013).

동독청소년의 가정에서의 사회통합

통일 전 동독 사회의 가정은 자연스럽게 생성된 전통적인 가정의 개념과는 달리 사회주의 이념을 배경으로 동독 사회를 보충하는 기능3)을 가진 사회구조로서의 의미가 더 컸다(BmfFSFJ4),1994a:30). 동독청소년들은 그들의 발달과정에 있어서 가족의 구성원들로부터 공급받을 수 있는 중요한 사회화의 긍정적 요소들인 애정, 관심, 소통, 놀이, 여가, 도덕성, 사회성 등을 가정을 통해서 공급받을 수 있었다. 이러한 안정된 동독청소년의 가정생활에는 동독의 사회구조와 가족정책이 깊이 관련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사회주의 체제는 여성의 노동력을 통한 생산성을 중시하여 교육, 고용, 노동 정책 등에 있어서 여성의 권리를 남성과 동등하게 인정한다. 당시 동독의 가정은 가부장적인 문화가 지배적이기는 했지만 여성취업률이 높아 소득이 안정되면서 단란하게 소시민적 삶을 유지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통일 직후 동독의 경제가 붕괴되면서 동독청소년의 삶과 사회화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기관이었던 가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국가인 동독에서 비교적 안정된 일자리와 근로시간으로 여유가 있었던 가정의 삶은 통일 직후 상대적인 소비물가의 상승과 대량실업, 일자리의 불안정 등으로 심하게 흔들렸다. 통일 직후인 1992년 동독 지역 실업률은 16%에 달했다(BmfFSFJ, 1994a: 274). 동독청소년들은 그들의 부모가 실업자가 될까봐 전전긍긍하였다. 실제로 통일 후 동독 지역에 몰아닥친 대량 실업으로 인해 부부 사이의 잦은 다툼과 별거, 이혼 등으로 부모와 청소년의 관계도 여러 방면으로 나빠지게 되면서 동독청소년의 가정에서의 사회통합은 과거보다 더 어려운 시기를 맞게 되었다. 통일 자체에 대하여는 부정적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통일 전에는 안락했던 가정이 통일 후 흔들리는 것을 겪으면서 동독청소년들은 점차 통일에 대한 회의와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다.

통일독일은 이러한 동독청소년의 가정에서의 사회통합 문제를 단기적, 중장기적 과제로 나누어 해결하고자 노력했다. 먼저 독일 정부는 동독의 가정이 살아남고 유지되기 위해서는 동독 여성의 취업과 직업보장에 대한 지원이 단기적으로 필요하다고 보고 이에 서독의 여성 수준에 맞추어 교육비, 교육휴가, 탁아소 자리 등에 많은 지원을 하였다(BmfFSFJ,1994c:Ⅷ∼Ⅹ). 이와 함께 독일정부는 중·장기적으로 동독 지역의 가정 수준을 서독 지역의 수준으로 맞추기 위하여 동독 지역 여성의 취업과 여성청소년의 직업교육에 더욱 노력을 기울였다. 이를 통해 서독 지역보다 가정경제 수준이 떨어지는 동독 가정 구성원들의 여러 문제들을 동시에 해결하고자 하였다. 통일독일의 이러한 단기적, 중·장기적 정책 방향과 실천은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통일 직후 북한 지역 가정을 안정시키고 북한청소년의 가정에의 사회통합에 타산지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동독청소년의 교육영역에서의 사회통합

동독의 교육체제는 청소년 세대를 그들의 사회주의적 노동사회 체제로 유입시키려는데에 최우선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동독청소년들은 일찍부터 학교에서 가꾸는 정원에서 노작교육을 받고, 공업과 관련된 지식들을 습득하며, 이후에는 ‘사회주의 생산 개론’과 같은 교과나 ‘사회주의적 생산 현장수업’을 통해 잠재적 미래 노동자로서 노동교육을 받았다.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뒤 한 달 후인 12월 13일, 1,000명이 넘는 동독의 청소년들은 새로운 교육적 권리와 요구를 관철시키려는 교육시민단체들의 베를린 시위에 함께 참여했다. 당시 시위참가자들은 SED로부터 독립된 자유로운 학교를 요구하며 “빨갱이 학교는 더 이상 그만”, “SED 교사5) 없는 학교”, “러시아어 수업 폐지”와 같은 정치·교육적 구호들을 외치며 시가를 행진하였다(Kirchhöfer, 1992: 209∼210). 이들의 구체적인 교육실천적 요구들은 “학교의 비군사화, 민주화, 인간화”의 구호로 압축되어 대변되었는데, 주5일 수업, 국가시민교육 수업과 생산수업의 폐지, 대안학교인 발도르프 학교(Waldorf Schule)등에 자유로운 입학, 국가 아동단체인 Pionier와 청소년단체 FDJ6)의 해체, 급식의 개선, 교과서 개정과 같은 것들이었다.

1990년 봄에 수행된 연구에 의하면 놀랍게도 당시 동독 주민들은 그동안의 전근대적 교육환경과 교조적 국민교육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음에도 동독 교육의 정체성에 대해 높은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는 조사결과가 나타났다. 조사결과, 당시 학부모의 10%, 학생의 17%, 상급 고교교사의 19% 정도만 학교의 민주주의적 개혁에 찬성을 했기 때문이다(Dudek & Tenorth, 1994:306∼307). 이 결과는 당시의 인문계고등학교로의 쏠림, 사립학교에의 지대한 관심과 같은 현상들과는 일치하지 않는 모순적인 사실이었다. 이러한 이율배반적인 교육적 상황의 전개는 통일 직후 동독 주민들이 겪은 경제적 어려움이 취업률이 높았던 과거의 교육체제에 신뢰감을 갖게 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독의 교육체제는 점차 서독의 교육체제로 변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독에서의 가장 주목할만한 공통적인 변화는 10학년까지 일반기술 교육을 받게 되는 통합학교(Einheitsschule)의 해체로, 이는 3종류의 학교 형태인 인문계 학교 김나지움(Gymnasium), 직업계 실용학교(Realschule), 직업훈련학교인 주요학교(Hauptschule)로 진학할 수 있는 서독의 교육체제를 따라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새로운 교육체제로의 변화 과정에서 동독은 새로운 외국어 교과에 대한 교사 충원, 새로운 교과목들의 요구에 따른 교실 수와 학교시설의 확보, 교사 인력에 대한 전문성과 정치적 성향에 대한 검증, 모든 전공들에 준비되어야 하는 많은 양의 새로운 교안들과 관련 자료들의 단기간 확보, 새로운 학교행정 구축 등과 같은 산적한 공통 과제들을 해결해야만 했다(BmfFSFJ,1994a:113∼114).

독일의 교육학자들은 독일 통일 후 정치·경제적으로 급변하는 사회체계 속에서 교육체계는 상대적으로 완만하게 변화했고, 다른 사회체계 영역보다 혼란이 덜 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러한 판단의 이유는 통일 직후 대량 실업으로 인한 불안한 심리로 인해 학교에서 고용에로의 이동이 비교적 안정적이었던 옛 교육체계에 대한 신뢰와 기대를 쉽게 버릴 수 없었던 것과 동독의 전체적인 교육체계와 인프라가 서독의 교육체계를 급히 따라가기에는 그 수준이 못 미쳤기 때문이다. 두 원인 모두 교육체계 스스로가 해결하기에는 시간을 많이 필요로 하는 문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반도가 통일 되었다고 가정했을 때 북한청소년의 교육영역에서의 사회통합은 통일독일의 동독청소년보다 훨씬 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된다. 이에 대비하여 우리 정부는 교육영역에서 적극적인 남북한 청소년의 교류를 모색하고, 이와 함께 현재 대한민국에서 실시되고 있는 통일교육과 교과내용을 개선할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통일교육이 학교 중심의 통일교육뿐만 아니라 지역사회와 시민단체 등 민간영역에서 전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민주시민 차원의 통일교육이 활성화될 필요가 있다.

동독청소년의 고용영역에서의 사회통합

독일 통일 직후 고용 영역은 사회의 다른 영역들보다 가장 주목을 받았다. 특히 동독 지역의 사람들에게 고용은 그들의 생존이 걸린 모든 것이었다. 동독청소년의 사회통합에 있어서도 고용 영역은 그들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영역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통일 후 동독 지역에서는 많은 혼란과 불안, 위기감이 도처에 있었지만 동독청소년의 고용영역에서의 사회통합은 성인보다는 그나마 충격이 덜 했다. 독일의 연방가정·노인·여성·청소년부가 1994년 연방의회에 제출한 제9차 청소년보고서7)는 이에 대한 원인을 독일의 오랜 전통에서 유래된 직업 준칙에 대한 사전교육, 노동현장에서의 생산 집약적 교육, 전통적인 도제교육으로부터의 일터와 직업학교의 이원성(duality)과 같은 동·서독 공통의 구조적 특성 때문인 것으로 말하고 있다(BmfFSFJ, 1994a: 143).

1992년 동독지역에서 24세 이하 동독청소년의 실업률은 18.7%에 달했고, 1993년 10월에는 12.3%로 낮아졌는데, 이는 같은 기간 이 지역의 전체 실업률인 1992년의 24.8%와 1993년 10월의 16.0%보다 낮은 수치였다(BmfFSFJ,1994b:22). 독일의 연방정부는 이러한 동독청소년의 실업문제 원인은 무엇보다 일자리가 부족한 데에서 기인한다고 판단하였다. 따라서 정부는 일반적인 경제정책과 재정정책의 대책들을 통한 노동시장에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동독청소년의 실업문제에 대처하였다. 하지만 독일 정부는 이러한 대책이 단기적으로 실업자 수를 줄일 수는 있겠지만, 장기적으로는 재정의 부족과 법제도적인 제한으로 효과가 그리 오래갈 수가 없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독일정부는 동독청소년의 실업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중·장기적인 직업교육의 강화를 통한 고용영역 상황 개선 정책을 꾀하였다. 이를 위해 정부는 먼저 현재 가동될 수 있는 직업과 노동시장의 상황에 대한 정확한 정보를 수요자들에게 제공하기 위하여 직업, 근로, 직업훈련 및 일자리에 대한 상담 네트워크를 동독 지역에 촘촘히 구축하여 지역주민과 청소년에게 서비스를 확대 실시하였다. 당시 이러한 정부의 판단과 정책은 비록 시간이 걸리더라도 가장 효과적으로 청소년 실업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결정이었다.

한반도의 통일을 가정해 보면 동독청소년들이 독일 통일 직후 취업과 직업교육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보다 북한청소년들은 더 극심한 혼란과 어려움을 겪을 것으로 예측된다. 비록 뒤늦게 도입되었지만 현재 교육부가 독일과 스위스를 모델로 하여 시작하고 있는 기업과 연계한 산학일체형 도제학교 제도를(교육부·고용노동부, 2016) 현행 진로교육법에 관련 조항으로 확정하여 확대하고, 점차 마이스터(Meister)고와 특성화고도 도제학교 체제로 일원화하여 그 수를 대폭 확대하여야 한다. 이와 함께 교육부는 학교 내에 직업 및 진로 상담을 위한 시설과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여성가족부는 전국의 상담복지센터를 통해 위기청소년들을 위한 진로 및 취업 상담서비스를 더욱 확대하면서 통일을 준비하는 프로젝트도 연구 개발하여 관련 인프라를 갖추어야 할 것이다.

동독청소년의 여가와 문화영역에서의 사회통합

동독청소년의 여가와 문화 영역에서의 사회통합 문제는 동독청소년의 일상과 관련이 깊다. 당시 통일 직후 동독청소년에게 주어졌던 주변 환경의 갑작스러운 변화는 그들의 일상에서의 행동과 사고 및 심리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독일통일 후 동독청소년의 여가와 문화 영역에서의 사회통합은 충격이 그리 크지 않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완만한 변화는 학계의 연구에서도 나타났는데 심지어 동독청소년의 문화와 서독청소년의 문화 간 “연합(Union)”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이들 문화 간의 유사성이 언급되고 있다(Bock & Pfaff, 2003:97,107). 이러한 동독청소년과 서독청소년 간 문화적 연합이나 유사성은 그들이 발달심리학적으로 청소년 시기에 가질 수 있는 청소년만의 공통적 특성에 기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통일 직후 동독청소년의 여가와 문화 영역에서의 사회통합을 보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문화지체 현상이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실제로 동독과 서독 지역의 청소년 문화 간에는 차이가 존재했었다. 연방정부는 제9차 청소년보고서에서 동독청소년의 문화지체 현상을 기대와 현실 사이의 괴리로 보고하고 있다(BmfFSFJ, 1994a: 171). 즉, 동독청소년의 여가 및 문화 영역에서의 사회통합은 서독청소년의 문화와 여가 행태를 점차 따라가는 경향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왜냐하면 통일이 되어서 동독청소년도 서독청소년과 같은 문화를 향유하고 싶은 욕구는 많았으나 그들에게 그것이 현실로 이루어지기에는 주변의 여건과 환경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통일 후 동독청소년의 여가와 문화 영역에서의 사회통합을 보면서 한반도의 통일을 상상해보면 걱정이 앞서는 것이 사실이다. 독일 통일이 비록 구소련에서 시작된 동유럽 사회주의 체제의 갑작스러운 붕괴로 인해 편승된 통일이었지만, 서독과 동독의 청소년들은 이미 1982년부터 동·서독 청소년교류를 통하여 서로 왕래하면서 상대에 대한 지식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고 소통의 기회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상호 교류를 통하여 서로 다른 여가와 문화를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통일 후 문화지체 현상을 보이면서 지금까지 동·서독청소년이 통합하는 데 적지 않은 시간과 노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지금이라도 대한민국 정부는 정치적으로 중립적인 영역에서부터 남·북한 청소년 간 청소년교류의 물꼬를 틀 수 있는 기회를 만들도록 노력해야 하겠다(이민희, 2005: 218∼226).

통일독일 사회통합의 야누스(Janus)

2015년 통일이 된 지 25주년을 맞아 독일의 연방정치교육센터는 기관지 《정치와 시대사》에 “독일통일 25년”이란 제목을 가지고 특집편을 마련하였는데, 여기에 동독지역 대학의 한 퇴임교수의 고별 강연 글 “동독의 종말8) 5주년을 맞아 독일”이 게재되었다. 에세(Jesse) 교수는 이 글에서 베를린 훔볼트(Berlin Humboldt)대학의 동독 출신 교수였던 리하르트 슈뢰더(Richard Schröder)의 “동독 지역에는(…) 이류계급 시민의 감정이 널리 퍼져있다(Schröder, 2009:32).”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독일이 통일된 지 25년이 지난 시점에서 동독 지역 사람들이 상대적으로 가지는 위화감과 박탈감을 전하고 있다. 그는 또한 같은 글에서 우왕좌왕하면서 조급했던 독일 통일의 과정에 많은 실수들이 있었고 이를 피할 수는 없었음을 인정하면서 통일이 된 지 2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가시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황폐한 동독 지역의 상황을 우회적으로 비판하였다(Jesse, 2015:23∼24). 독일은 현재 유럽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가장 강한 나라이다. 독일의 통일을 우려했던 주변의 강대국들이 보는 독일 통일은 성공적이었고, 그들이 우려했던대로 통일독일은 지속적인 발전을 통해 유럽에서 더욱 강해지고 있다. 하지만 모든 역사의 사건에는 양면이 있는 것처럼 위에서 보듯이 독일 통일을 바라보는 비판적인 시각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통일이 된 지 30년이 가까워지지만 아직도 통일독일에서 동독 지역과 서독 지역의 사회통합은 양면의 얼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논의와 작금의 한국 상황을 고려하여 한반도 통일 후 남북한 청소년의 사회통합을 위하여 미리 준비하는 전제적 차원의 제언들을 하자면 첫째, 통일이 어떠한 형태로 올 것인가에 대한 체계적이고 과학적인 예측이 반드시 필요하다. 둘째, 한반도통일기금(가칭)과 같이 통일 후를 대비한 재원을 미리 확보해 놓아야 한다. 셋째, 정부의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는 함께 통일법제위원회(가칭)와 같은 기구를 신설하고 통일의 형태에 따른 법제도적 준비를 선제적으로 마련해야 한다. 넷째, 한반도 통일 후 남북한 청소년의 사회통합 문제는 교육부, 여성가족부, 기획재정부, 고용노동부, 보건복지부, 문화체육관광부, 법무부 등 청소년 관련 모든 부처들의 긴밀한 연계와 협력을 통해서 이루어져야만 한다. 다섯째, 민주시민교육과 여성의 고용에 관한 체계적인 지원과 인프라가 확대되어야 한다.


1) 이 글은 글쓴이의 졸고 “21세기 통일한국의 청소년 사회통합에 관한 연구: 통일독일의 동독청소년 사회통합을 중심으로”(이민희, 2018)를 축약하여 재구성한 글이다.

2) 그 당시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의 개방화 시대를 열어 냉전의 종지부를 찍었던 소련의 공산당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ev)의 약칭

3) 여기서 보충적 기능이란 동독의 폐쇄적이고 통제적인 차가운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나타나는 문제점들에 대응하는 보상적 사회구조로서, 가정이 기능하도록 가정에 따뜻한 보금자리 역할을 인위적으로 형성시킨다는 것을 뜻한다.
4) Bundesministerium für Familie․Senioren․Frauen und Jugend(연방가정·노인·여성·청소년부)의 약칭

5) 독일사회주의통일당(SED)의 당원이었던 교사를 의미한다.

6) Freie Deutsche Jugend(자유독일청소년)의 약칭

7) 청소년보고서(Jugendbericht)는 1960년에 제정된 청소년복지법에 의하여 연방정부가 매 회기 중에 연방의회와 상원에 의무적으로 제출하도록 법에서 정하고 있다. 첫 번째 청소년보고서는 1965년에 제출되었다.

8) 게재된 글은 동독 지역에 소재하고 있는 켐니츠(Chemnitz) 공대의 정치학 교수인 에카르트 에세(Eckhard Jesse)의 2014년 7월 3일 퇴임 고별강연을 요약한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