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2022 봄호(246호)

함께 사는 법을 배우는 학교

이 글은 서울특별시교육청 2021년 위탁연구 『사회적 공감교육을 통한 미래형 교육모델 개발 연구』의 일부를 재구성한 것임.

김두환(덕성여자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들어가는 말

2021년 OECD ‘교육과 역량 이사회(Education and Skills Directorate: EDU)’가 발간한 ‘교과학습을 넘어서(Beyond Academic Learning)’라는 제목의 연구보고서1에 따르면 10세 학생 다섯 명 중 한 명은 일주일에 한 번 이상 다른 학생들로부터 조롱을 경험했고 이렇게 왕따 또는 따돌림에 많이 노출된 학생은 스트레스를 견디어내는 힘, 낙관적 태도, 정서적 통제력이 낮은 것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학교에서의 왕따 경험을 다루는 마지막 장에서 이 보고서는 학생이 학교에서 맺는 사회적 관계를 1) 학교 소속감, 2) 왕따 또는 따돌림 경험, 3) 학생-교사 관계의 질을 중심으로 논의한다. 그 내용은 이 세 개의 사회적 관계에 대한 항목들이 학생의 인구학적 특성 그리고 사회정서역량(Social and Emo-tional Skills)2과 어떻게 연관되어 있는지에 대한 것이다. 예를 들어 학생들이 교사와의 관계를 보는 방식은 호기심, 성취동기 그리고 낙관적 태도에 의해 가장 큰 영향을 받는데 사회경제적 배경이 더 좋은 학생들은 학교생활에 적응을 잘하고 교사와 맺는 관계도 좋다. 또한 학교생활에 잘 적응하는 것은 폭넓은 협력, 미래에 대한 낙관 그리고 사교성에 매우 긍정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왕따처럼 고통스런 경험을 유발하는 사례는 매우 심각한 문제이다. 미래를 준비해야 할 학교생활이 부정적 경험으로 점철된다면 학교는 새로운 학습에 대한 호기심과 성취동기를 꺾고 교사와의 관계도 망가뜨리면서 미래를 비관하게 만드는 공간이 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러한 부정적 경험을 가지고 학교를 떠나는 학생이 살아갈 우리 사회는 세계적 기후위기와 감염병(코로나19)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기도 하고 지위획득 경쟁의 격화로 인해 불평등이 깊어지고, 인구위기 그리고 일자리 불안 등의 해결해야 할 문제가 산적하여 온전한 시민의 역할을 수행하기가 만만치 않은 곳이기도 하다.

현재까지 우리는 대개 학교에서 일어나는 왕따와 폭력에 대해 인성교육 등 개인적 치유 내지는 방어적 차원의 정책으로 대응해왔다. 하지만 한국사회가 연대와 공생의 의미가 중요하게 등장하는 시대적 전환기에 놓여 있다고 보는 필자는 ‘사회적 연결’이 갖는 심대한 교육적 의미와 효과를 바탕으로 교육정책의 대전환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학교에서 경험하는 갈등적 관계의 문제는 우리 교육체제에 깊게 뿌리내린 불평등 차원을 고려해야만 하는 사회구조적 문제임을 주장하려고 한다.

OECD는 사회정서역량을 ‘자기 이해와 타인에 대한 공감과 배려 등을 통해 삶의 주체자로서 조화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기술과 태도’로 정의한다. 그렇기 때문에 OECD는 사회정서역량이 학생들의 학교생활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사회에 온전하게 참여할 수 있는 ‘시민적 개인’으로 성장하는 데 필수적인 것으로 본다. 이러한 OECD의 입장에 동의하는 필자는 학교에서 일어나는 사회적 상호작용이 함께 사는 기쁨이 아니라 사회적 고통이 되는 경험은 우리 학교의 실패이고 우리 사회의 실패일 수 있다는 문제의식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사회적 뇌와 학교에서의 따돌림

인간의 뇌가 인간의 진화적 본성으로서 사회성에 관계되어 있음은 이제는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의 사회적 본성에 대한 철학적 성찰은 기원전의 고대 철학자부터 시작된 오래된 얘기다. 그런데 최근의 진화인류학이나 사회심리학, 뇌 과학 등에서 행해진 수많은 연구들에 의해 그 내용이 더욱 상세하게 밝혀지고 있다(에얼릭·온스타인 2012; 리버먼2015; 장대익 2017; 토마셀로 2017, 2018). 이들 중에서 리버먼은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달리 태어난 후 육체 발달이 상당히 느리게 일어나는 점을 지적하면서 비교적 긴 기간인 여러 해에 걸쳐 환경에 익숙해지고 문화를 습득하는 특성을 가졌다고 한다. 사람의 이러한 특성이 지구에 사는 동물 중에 대뇌가 가장 발달한 동물이 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사람의 특성에는 대가가 따른다. 인간은 타인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을 때 육체가 느끼는 고통과 다를 바 없는 사회적 고통을 치르게 진화한 것이다. 지구에 사는 생물 중에서 유일하게 지성을 가진 동물로 진화한 인류가 누리는 수많은 혜택의 대가가 사회적 고통인 것이다(리버먼, 2015: 72~109).

그러한 사회적 고통의 하나가 현대의 학교 안에서 벌어지는 따돌림이다. 이러한 학교 안팎의 따돌림은 그 원인이 무엇일까? 이 따돌림이 성장기 학생들의 ‘일부’가 벌이는 일탈적 행위일까? 그렇게 파악해서 나온 교육정책의 대표가 바로 인성교육 강화정책일 것이다. 과연 이 현상이 일부 학생들의 인성교육 결핍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보다는 한국사회가 최근 보여준 각자도생의 생존주의적 가치가 만들어온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 때문일까? 우리의 답이 사회구조적 문제에 방점을 둔다면 산업화시대의 경제성장 중심의 역사가 이룬 성취의 그늘이 만든 부작용이라는 뜻이 된다. 지난 역사에서 지배적 지위를 누린 경제적 이득이나 정치적 권력획득의 추구가 취해온 ‘사회적인 것’의 억압이 학교에서 일어나는 따돌림 현상의 구조적 원인임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그 결과 현재 우리는 사회적 빙하기를 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회적 빙하기를 경제적 가치를 중심으로 한 산업화시대의 노동력 양성과 그러한 목표를 중심으로 짜인 교육체제를 전환하지 않고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사회적인 것’과 그 연대의 마음을 형성하는 학교

우선 우리는 사회적인 것의 의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사회학의 기초를 놓은 고전 사회학자 중의 한 명인 뒤르켐이 지적했듯이 복잡하게 분화한 현대사회에서 중대한 위험 중 하나는 현대사회를 사는 개인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와의 관계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전통을 따라 사회학자 김홍중은 사회적이라는 말은 그 안에 고유한 도덕적 호소를 담고 있다고 파악한다. 그는 사회적인 것의 가치를 “사랑, 동정, 시혜, 포용, 연대와 같은 도덕적 방향성의 함의를 내포”하고, “협력과 공존을 지향하며, 약자에 대한 연대와 부조의 실천을 촉구”하기 때문에 “그런 지향을 추구하는 이에게 반드시 경제적 이득이나 정치적 권력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어서 각자도생의 생존주의에 기능하는 경제적 가치나 정치적 권력과 구별된다고 본다(김홍중, 2017: 255).

이러한 사회적인 것의 의미를 이해한다면 우리는 현재 우리의 학교 안팎에서 벌어지는 따돌림의 현상이 사회적인 것을 억압하거나 심지어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사회구조의 문제임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차원을 현대사회의 문제로 인식한 사회학자 뒤르켐은 자신의 일관된 사회학적 연구의 주제를 현대사회에서 적용 가능한 ‘연대’의 이론을 만드는 데 집중한다(김종엽, 1998: 3장). 그래서 전통사회의 조직과 결사가 파괴되고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사회적 차원의 연대를 가능하게 할 집단의 형성, 즉 결사의 정신을 불어넣어 새로운 집단형성을 가능하게 할 환경에 주목했는데 그곳은 바로 학교였다. 그는 집합적 삶을 사랑할 수 있고, 집합적 삶을 체험할 수 있는 장소로서 학교의 가치를 인식한 것이다. 학교는 혈통을 공유하는 가족과는 다른 집단이다. 성장기 어린이에게 학교는 현대의 사회조직이 드러내는 분절성이 아직 성장기 아이의 본성을 심층에서 바꾸어 놓기 전에, 그리고 공동의 삶을 거부하는 느낌을 형성하기 전에 아이들에게 장악할 수 있는 대치 불가능한 기회를 부여하는 곳인 것이다(뒤르켐 1903, 김종엽, 1998: 258에서 재인용).

이기적 가족, 학교를 장악하다

뒤르켐의 관점에서 보게 되면 지금 우리의 학교에서 벌어지는 아이들 사이의 관계가 만드는 사회적 고통의 현실은 매우 당황스러운 현상이다. 그의 기대를 벗어난 이러한 현상은 왜 벌어지는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가족과는 다른 집단인 학교가 가족의 영향력에 장악되어 있기 때문은 아닐까? 알려진 것처럼 수많은 사회학자들이 수행한 교육 불평등에 대한 연구의 결론은 가족 사이에 차별적으로 분포하는 자원이 교육의 기회와 성취의 불평등을 만든다는 것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따돌림과 같은 사회적 고통은 가정배경이 다른 아이들이 그 차이에서 비롯하는 사회적 차별과 배제를 실행하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일일 수 있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문제를 근원에서 인식하고 처방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말이다.

일찍이 사회학자 윌라드 왈러(Waller, 1932)는 부모와 교사를 타고난 적대자(natural enemies)라고 말했다. 부모는 아이를 학교에 보내면서 자신의 아이에게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만 교사는 교실, 더 넓게는 학교에 있는 모든 아이들에게 보편적인 관심을 쏟아야 하는 직업윤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언급한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에게 특별한 관심을 가지지만,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은 부모는 자기 아이에게 주어져야 할 관심과 배려에 대한 요구를 교사에게 주장할 시간과 자원을 가지고 있다. 생계를 위해 대부분의 시간을 바쳐야 하는 가난한 부모도 자기 아이의 성장에 특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지만 이들은 교사와 상호작용할 수 있는 시간과 자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더구나 어렵게 교사와 소통할 기회를 얻더라도 가난한 부모가 의논하는 것은 아이의 행동에 대한 문제이지 중상층 이상의 부모가 제기하는 교과학습의 내용에 관한 것들이 아닌 경우가 많다(Lareau, 2000: 159-164). 이러한 일들이 미국의 학교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아니다. 교사는 보편적 관심을 가지고 모든 아이들에게 주목해야 하는 직업윤리를 가졌다고 하지만 부르디외(2003)는 학교는 중립적 기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가 학교가 중립적 기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교사들의 선호가 중상층 계급 이상의 가족배경의 아이들이 드러내는 태도와 행위 규범에 편향되었기 때문이다.3일종의 계급지위집단의 유유상종(Homophily) 현상이라는 설명이다.

이를 설명하는 또 다른 관점은 이른바 편협한 이타주의(parochial altruism)다. Choi and Bowles(2007: 636~640)에서는 이타성(altruism)과 자기집단중심주의(parochialism)가 결합된 편협한 이타성(parochial altruism)을 가진 사람들이 그와 다른 속성을 가진 집단에 속한 사람들에 비해 더 많은 후손을 생산하는 것을 보여주었다. 자기가 속한 집단에는 헌신적이지만 다른 집단의 구성원에게 배타적인 성향을 소유한 사람들의 집단이 그와 다른 집단과 경쟁하면 승리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보여준 연구다. 이러한 관점, 즉 상층 집단의 유유상종 현상과 편협한 이기주의를 결합하면 산업화 시대 불균등한 경제성장 과정에서 생성된 한국사회의 유별난 이기적 가족주의(Dongno Kim, 1990)의 결과가 한국의 학교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회적 고통으로서 따돌림의 구조적 원인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가족들이 협력하다: 사회적 자본

부르디외와는 다른 관점으로 학교를 연구한 미국의 사회학자가 콜맨(Coleman, 1988)이다. 콜맨은 다른 연구자들과 함께 1966년에 발표한 콜맨보고서로 유명하다. 콜맨보고서가 미국인들을 놀라게 한 충격은 일찍이 고등학교까지 무상교육을 실시한 미국이 기회의 나라라는 자부심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이다. 무상교육을 제공하는 미국의 학교가 가정배경의 차이에 관계없이 사회적 계층상승 이동의 기회, 즉 계층상승을 위한 사다리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생각한 미국인들의 믿음을 저버린 것이다. 콜맨보고서 이후 미국에서 교육 불평등에 관한 연구는 위스콘신 대학의 학자들이 발표한 사회심리학적 연구인 ‘위스콘신 지위획득모형’으로 진화한다. 위스콘신 모형의 의미는 교육성취의 불평등이 발생하는 과정을 밝히면서 그것이 가족을 넘어선 사회적 관계의 영역으로 확장한다는 점이다. 바로 학업성취 동기를 자극하는 학습자-친구, 학습자-교사 사이의 관계가 학습자-부모 사이의 가족 내의 관계를 넘어서 타자와 맺는 중요한 관계로 추가된 것이다. 이 모형은 학습자를 둘러싼 사회적 공간에 학습의 성과를 지속하고 고무하는 관계적 자원이 학습자의 사회경제적 배경에 따라 불균등하게 존재한다는 것을 밝혀낸 연구다. 하지만 이 연구는 불평등이 일어나는 과정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지만 학교가 사회적 불평등을 완충하는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정책을 고안하는 것에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콜맨은 학습자가 아닌 학습자를 둘러싸고 있는더 큰 관계망, 즉 부모-부모, 부모-(학습자의)친구,부모-교사, 교사-교사, 친구-친구, 교사-친구 등 학습자를 둘러싸고 있으면서 호기심과 성취동기를 고취하는 중요한 사회적 관계에 있는 사람들끼리의 관계가 수행하는 역할에 주목한 이론을 발표한다. 바로 그것이 학업성취를 높이는 ‘사회적 자본’ 이론이다. 이러한 콜맨의 사회적 자본이론은 최근 한국에서 불고 있는 마을교육공동체 운동을 뒷받침하는 이론적 선구이고 불평등의 완화에 학교-지역 협력을 통해구성되는 교육생태계가 왜 중요한지를 알린 선도적 연구였다.

콜맨이 교육성취와 사회적 자본의 관계에 대한 이론적 결론에 도달하는 과정에 크게 기여했던 연구는 미국에서 가톨릭 학교가 가진 사회적 자본에 대한 연구였다. 첫째, 그는 학교가 위치하고 있는 지역사회의 자원이 가톨릭 학교의 재학생에게 매우 뚜렷한 영향을 주는 것을 확인했다. 둘째, 그 지역사회의 자원이 전반적으로 가톨릭 학교 학생들의 교육성취 수준을 높여주면서 동시에 가족배경에 따른 교육성취의 불평등을 완화한다는 것을 발견했다. 물론 그것은 가톨릭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사회적 네트워크의 효과이고 가톨릭 학교가 위치한 지역의 교육생태계의 차이가 만들어낸 효과였다.

현재의 학교: 사회적 뇌와 각자도생의 불화

사실 이러한 모든 연구들을 뒷받침하는 것은 인간의 뇌가 가진 ‘사회적’ 진화의 성격을, 다시 말해 인간의 뇌는 집단적 삶, 현대의 언어로 ‘사회적’ 삶에 적합하게 진화했다는 사실에 있다. “<사회적 뇌>의 기능을 발휘하는 두 영역이 있다. 하나는 뇌섬엽이다… 뇌섬엽은 내외적으로 일어나는 제반 상황을 뇌가 체계적으로 이해하는 데 관여하며 자신을 인식하고 사회적 상호작용을 가능하게 한다. 어떤 일을 경험하기 전에 미리 예상하는 능력과도 관련된다.다른 하나는 주로 전운동영역과 기타 주요 부위에 포진한 거울뉴런이다. 이 뉴런은 다른 생명체나 타인의 생각과 마음을 가늠하는 독특한 기능을 발휘한다. 이를 통해 아이는 부모의 눈짓과 표정을 보면서 공감하거나 그들의 생각을 자기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두 뉴런집단들의 협력으로 뇌와 뇌의 소통을 촉진하는 <사회적 뇌>가 발달하게 된다(심광현· 유진화, 2020: 155~156 강조: 필자).”

이러한 사회적 뇌를 가진 인간에게 각자도생이라는 한국의 사회적 상황은 현생인류가 지구의 빙하기를 사회적인 것, 즉 ‘협력적 관계맺음’으로 극복해 낸 진화의 역사에 적대적이다. 다시 말해 네안데르탈인들이 생존할 수 없었던 지구의 빙하기를 현생인류의 조상이 그 집단성(사회적)의 힘으로 극복하면서 진화시켜온 사회적 뇌에 비추어 보면 각자도생은 인간의 진화적 본질에 적대적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스스로의 본질에 반하는 삶을 살면서 사회적 고통을 겪고 있는 중인 것이다. 물론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했던 산업화 초기의 한국사회에서 사회의 것보다 나와 내 가족의 삶을 우선했던 과거를 비난할 수만은 없다.

하지만 2022년의 대한민국은 더이상 그런 가난한 나라가 아니다. 생존이 최우선의 목표였던 과거에 만들어진 갈등적 경쟁의 상황은 이제는 우리의 사회적 삶의 에너지를 고갈시킬 뿐 창의적인 자기생산에 기여하지 못하고 사회적 비용만을 키우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OECD가 사회정서역량(SSES) 연구를 교육적 관점에서 기획한 것도 이러한 상황인식이 바탕에 있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현재의 과학기술이 인간을 분절적 분업에 기초한 반(反) 인간적 소외노동을 끝내고 협력과 창의성이라는 인간진화의 본성에 맞는 교육의 필요를 인식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다시 뒤르켐으로 돌아가 보자. 뒤르켐은 20세기로 접어드는 현대사회를 목도하면서 대규모 분업을 특징으로 하는 ‘현대성’이 양성하는 새로운 삶의 생태계에서는 인간이 “같은 방식으로 살지 않고 동일한 종류의 삶을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기대한 것이다. 이것이 뒤르켐(Durkheim, 1984)이 고도화하는 사회적 분업을 통해 새로운 사회규범으로서 ‘유기적 연대’의 이론을 제시한 기초적 통찰이다. 분업의 고도화는 개인들이 자기 전문성 영역을 만들게 하고 그것은 다시 피할 수 없게 자신의 물질적 삶을 생산하고 재생산해 나갈 때 타인의 전문성에 의존하는 정도를 높이기 때문에 ‘협력’을 토대로 하는 사회를 만들어낼 것이라 본 것이다. 그리고 뒤르켐은 협력 내지는 협동은 합심을 요구하는 ‘내재적인 도덕성’을 가진 것으로 인식했다.

뒤르켐이 이러한 분업적 ‘현대성’이 생성할 수 있다고 본 새로운 도덕 질서로서 ‘유기적 연대’에 관한 이론적 통찰을 한국 청소년들의 사회생태학적 상황에 대입해 보자. 사회적으로 잘 통합되어 있는, 즉 맺고 있는 사회적 관계들이 공고한 사람은 그 반대의 경우에 비해 그 관계망 안에서 강한 소속감을 느끼고 관계에 대한 책임감이 강하고 자기 삶에 대한 애착 수준이 높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은 관계망 내부의 사람들과 공유하는 믿음을 바탕으로 함께 살고있는 사회에 대한 공통의 목적을 발전시키고 그것을 성취하는 데 협력할 것이다. 그러한 과정은 그 사람이 자살과 같은 일탈적 행위를 할 위험을 낮출 것이다. 한국 청소년들이 사회적 접촉의 밀도는 낮지 않음에도 왜 뒤르켐이 예견한 행위규범의 내면화(사회적 통합)가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이 있다. 이 의문에 대한 일정한 해답은 같은 욕구와 같은 목표를 가지고 도처에서 경쟁하는 지금 한국의 사회생태적 현실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청소년 핵심역량진단조사’(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2011)는 우리 청소년들의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 수준이 31개국 중 최하위임을 알려준다. 여기서 사회적 상호작용 역량이란 “공동체의 일원으로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친구나 동료와 잘 지내고, 문화적/사회경제적으로 이질적인 상대와 협조하는 능력”을 뜻한다. 이 능력은 OECD가 “세계화와 다문화와 트렌드에 적응하며 성공적으로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으로 판단하였다. 38개국이 참여한 국제비교조사 ICCS(International Civic and Citizenship Education Study)에서 한국은 관계지향성 영역 중에서 ‘주변사람과의 접촉의 질과 양’이 매우 낮게 나타났다. 이는 소통과 상호작용이 이끄는 ‘도덕적 밀도’를 낮게 만들면서 관계맺음이 긍정적 결속을 생성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오롯이 개인이 감당해야 하는 학업만을 채근하는 현재의 사회적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학교: 사회적 공감으로 멋진 나를 만드는 즐거운 배움터!

인간의 근본적 사회성은 인간 삶이 피할 수 없게 상호의존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상호의존성은 분업이 고도화될수록 더 강화될 것이다. 그 결과로 동질성에 기초한 ‘기계적 연대’와는 다른, 타자가 내 삶의 일부를 보완해 주어야만 삶을 지속할 수 있는 ‘유기적 연대’가 현대사회에서 발생할 것으로 뒤르켐은 기대했다. 하지만 ‘도처에서 경쟁상태’에 놓인 우리 청소년들은 접촉의 물리적 밀도가 높을 뿐 갈등적인 사회적 관계에 둘러싸여 있다.

이런 현실인식을 바탕으로 우리는 현재의 학교상황을 이해하고 공감능력을 배양하는 교육이 지향할 가치가 무엇인지 질문해 보아야 한다. 사회학은 “인간은 오직 그가 사회 안에서 살기 때문에 인간”이고 사회는 “우리에게 자신만의 생각에서 탈피하도록 해 주고, 자신만의 이익보다 타인의 이익에 동조하도록 해주는” 곳이라 인식한다. 이러한 사회학의 입장에서 보면 아이들을 교육하는 것은 ‘사회’를 불어넣는 것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할을 하는 곳은 학교가 되어야 한다.

뒤르켐이 말한 유기적 연대, 즉 상호의존에 기초한 자기 고유성의 발현이 가능한 학교는 다채로운 관심이 존중받고 서로 다른 재능과 소질이 꽃피는 곳이어야 한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이 제창한 백만 개의 교실 정책이 추구하는 것은 후자의 의미가 강하다. 즉, 개인맞춤형 교육이다. 하지만 이 개인맞춤형 교육도 많은 경우 이미 짜여 있는 인지교과교육 안에서 학습속도가 다른 아이들에 대한 교육을 개별화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결국 인지적 학습능력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기초인지능력을 모두가 갖추게 하는 정책은 매우 중요하다. 그것은 기초이다. 하지만 개인맞춤형 교육이 이 기초 인지능력수준 달성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

문제는 상호의존의 도덕적 밀도는 어떻게 달성될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없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사람이 만나서 형성하는 많은 관계가 지속되기 어려운 이유는 그 상호존중의 도덕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관계가 고통인 것은 존중과 감사의 마음을 필요로 하지 않는 시장교환(상업)적 관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우정을 만들어야 할 학교가 상호존중과 존재 자체가 감사인 우정을 낳지 못한다면 우리의 학교는 상호의존이라는 도덕적 밀도의 형성에 실패하게 된다. 유기적 연대를 육성하는 학교는 다양한 재능과 소질이 꽃피는 곳이어야 하지만 그러한 성취들도 모두 우리가 사회에 다른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기 때문에 필요한 것이다. 수많은 재능과 소질을 실현하는 열정은 ‘사회’ 안에 있을 때만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학교는 지금처럼 경쟁에서 승리하는 법이 아니라 함께 사는 법을 학습하는 공간이어야 하는 것이다. 함께 사는 법을 배운다 함은 타인으로부터 존경을 얻는 법을 배우는 것이고 동시에 그 사람을 존경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지난 산업화시대를 살아온 우리 기성세대는 예외 없이 부자가 되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급격한 경제성장 과정의 성과는 불균등하게 돌아갔고 그래서 우리는 경제적 불평등을 해결하는 일을 사회적 진보의 중요한 과제로 삼아 왔다. 하지만 지금의 미래 세대는 경제적 안정을 넘어서 자기 삶의 고유한 가치를 추구할 수 있는 자유를 희구한다. 획일적 삶을 거부하고 내 삶의 고유한 가치를 만들고 싶어 한다. 그렇다면 경제적 평등의 비중이 높은 기존의 진보적 관념을 넘어서 새로운 가치에 대한 고려가 필요하다. 그것은 평등보다는 동등의 가치일 것이다. 이 동등의 가치가 지금 우리에게 요청되는 이유는 물질적 생활 여건이 더 나은 삶을 추구해온 지난 시대를 넘어서 타인의 존재가 내 삶의 일부임을 인정하고 다르게 사는 친구의 삶을 존중할 때 비로소 내 삶이 가능한 역사적 시대에 도달했기 때문이다. 학교가 아니라면 ‘나다움’의 가치는 사회적 인정과 연결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우리가 바로 이 중대한 학교의 역할을 받아들일 때 우리의 학교는 ‘멋진 나를 만드는 즐거운 배움터’로 자리 잡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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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ECD EDU(2021), 「교과학습을 넘어서(Beyond Academic Learning)」, OECD.
• Waller, W. (1932). The sociology of teaching.

 

  1. 이 보고서는 OECD가 주관한 국제공동연구 사회정서역량조사(Survey on Social and Emotional Skills: SSES)의 첫 결과물이다. 한국에서는 대구광역시가 참여하였다.
  2. 연구가 조사한 사회정서역량 항목은 1) 협력(협동, 공감 등), 2) 정서조절(감정통제, 스트레스 관리 등), 3) 타인관계(사회성, 리더십 등), 4) 개방성(호기심, 관용 등), 5) 과제수행(끈기, 자기통제, 책임감 등) 등이다.
  3. 부르디외의 이러한 주장은 사회질서를 위계적인 것으로만 파악하는 그의 전제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학교를 기존의 사회적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기관으로 인식한 부르디외에게 학교는 기존의 지배관계를 재생산하는 상징폭력의 장소로 볼 수밖에 없었다. 상징폭력은 오인으로 인해 피지배계급이 사회질서에 자발적으로 복종하게 될 때 발생하는 비가시적 폭력을 의미한다. 하지만 교육은 분명히 특권층만 독점하던 것에서 시민적 개인의 보편적 권리로 주어지면서 인류의 더 깊은 민주주의의 성취를 가능하게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