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2024 여름호(255호)

거인의 어깨 위에서
‘가야할 길’을 찾다

이정희(서울특별시북부교육지원청, 교육장)

산을 오른다. 어느 정도 오르다 피곤한 몸도 쉴 겸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본다. 산 중턱에도 이르지 못해서인지 주변엔 나무들만 빽빽할 뿐 딱히 눈을 둘 데가 없다. 잠시 쉬다 다시 오른다. 정상이 얼마 남지 않았다. 다시 걸음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본다. 아주 멀리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집도, 학교도, 상가도, 냇물도, 나무도, 길도 볼 수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곳이 어느 동네인지, 시내로 가려면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하는지도 알 수 있다. 산에서 길을 잃으면 골짜기에서 헤매지 말고 높은 곳으로 올라가라고 하는 이유가 높은 곳에 오르면 멀리 있는 길까지 볼 수 있기 때문인가 보다.

아이작 뉴턴은 “내가 더 멀리 보았다면 이는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거인은 뉴턴의 연구에 도움을 준 플라톤이나 코페르니쿠스 같은 과거의 대학자를 의미한다고 한다. 결국 뉴턴의 말은 자신의 연구 결과는 자기 혼자만의 노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 자신보다 앞서 연구했던 대학자들의 성과에 바탕을 둔 것임을 고백한 것이리라.

사회의 모든 분야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의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개인이든, 학교든, 사회든 변화를 통해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서 중요한 것은 변화의 흐름을 정확히 파악하고, 어느 방향으로 가야 우리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할 수 있을지 제대로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흐름을 읽고 목표로 가는 길을 정확하게 찾아낼 수 있을까? 산의 높은 곳에 오르면 산 아래 어느 방향에 무엇이 있는지 찾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인류의 역사를 통해 축적되어 온 사유와 연구의 집합체, 그 엄청난 거인의 어깨 위에서 사회를, 그리고 시대를 바라보아야 한다. 미래는 높은 곳에서 멀리 볼 때 제대로 보이기 때문이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이하 서울시교육청)이 역점과제로 추진하고 있는 ‘국·토·인·생’은 우리 학생들이 마주할 미래의 시대정신은 무엇일지, 미래를 살아가는 데 필요한 역량은 무엇이며 어떻게 키울지 함께 고민하면서, 역사라는 거울에 비추어 본 후 집약한 것이다. 거인의 어깨 위에서 최대한 멀리 바라본 후 ‘미래’라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가야할 최적의 ‘길’을 찾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국·토·인·생’이라는 말은 모두가 기억할 수 있도록 4개의 중점과제에서 한 글자씩을 빼서 만든 것으로 각 과제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국·토·인·생’은 앞에서도 언급한 바와 같이 오랜 시간 축적된 교육적 성과를 바탕으로 마련된 정책이다. 즉,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그동안 서울시교육청이 중점을 두고 지속하여 추진해왔던 과제들 중 학생들의 미래역량 강화와 공존의 사회를 만드는 데 필요한 것들을 모은 것이다. 따라서 학교는 이 과제의 추진을 위해 새롭게 무언가를 만들어낼 필요가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국·토·인·생’을 실천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오래 전부터 학교의 교수·학습방법이 달라져야 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그리고 실제 다양한 연구와 활동을 바탕으로 교수·학습방법의 변화를 위한 여러 가지 방법들을 제시해 왔으나, 여전히 교실의 수업은 달라지지 않은 채 교사가 설명하고 학생은 듣는 식의 교사중심 수업이 주를 이루고 있다. 하지만 교사중심의 수업으로는 ‘국·토·인·생’을 교실에서 펼쳐낼 수 없다. ‘국제공동수업’은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대면, 혹은 비대면으로 함께 수업을 하는 것이다. 이 수업에서 교사가 수업 시간 내내 설명하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학생들은 정해진 주제(예: 역사, 문화, 학교 생활 등)에 대해 발표하고 질문하고 대답하면서 상대방의 나라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될 것이다. ‘토론교육’은 또 어떤가? 교사가 중심이 되는 토론 수업은 있을 수 없다. 교사는 기본적인 내용을 안내하고, 학생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분위기를 만들고 실제 토론에는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학생들은 스스로 토론의 규칙을 정하고, 자신의 의견을 논리적으로 정리하며 나와의견이 다른 학생이 내세우는 근거는 무엇인지를 파악하면서 주도적으로 수업의 목표에 다가간다. ‘인공지능’ 을 활용한 교육은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겠지만 초기 단계에서는 필요한 자료를 찾기 위해 ChatGPT 등에 질문을 하는 활동이 많을 것이다. 여기서도 교사는 학생들이 찾아야 할 자료나 답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알 수 있도록 가르치고 질문을 만드는 방법에 대해 안내하지만, 실제로 질문을 던지고 제시된 자료나 답을 확인하는 것은 학생이다. ‘생태전환교육’은 자연과 인간의 건강한 공존이 가능하도록 하기 위해 일상생활에서의 실천을 이끌어내는 것이므로 당연히 학생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이 실천할 수 있는 활동을 찾아내야 한다.

교실에서 ‘국·토·인·생’을 실천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별도의 조직이나 독창적인 방안이 아니라 새로운 수업을 해보겠다는, 학생들의 학습의욕을 자극하고 참여를 이끌어내겠다는 교사의 의지와 실천하려는 노력이다. 기존의 학습활동을 돌아보고 학습내용을 재구성하며 적용할 만한 수업 방법을 찾아 학생중심의 수업을 진행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것은 아니다. 실제로 한 시간의 학생중심수업을 제대로 하기 위해서는 교사 중심의 수업보다 몇 배나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학습목표에 제대로 도달할 수 있는 수업 방법을 찾고, 학생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목표에 이르게 할지 설계하며 활동에 제대로 참여하지 않는 학생들의 참여를 유도할 구체적 방안을 마련하고, 학습 목표의 도달 여부를 제대로 측정할 수 있는 평가방법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렇게 변화된 수업에 참여하면서 학생들은 각자가 수업의 주인이 되어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는 멋진 경험을 쌓게 될 것이다.

미래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다가올 미래를 두려움 없이 맞이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어느 절의 주지 스님이 마당 한 가운데에 큰 원을 그려놓고 동자승을 불렀다.
“나는 이제 마을에 다녀올 것이다. 내가 돌아왔을 때 네가 이 원 안에 있으면 너는 오늘 하루 종일 굶을 것이다. 하지만 원 밖에 있으면 너는 이 절에서 쫓겨날 것이다.” 하고 절을 나섰다. 배도 고프고, 갈 곳도 없는 동자승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주저하지 않고 마당 구석에 있는 빗자루를 들고 와서 스님이 그려놓은 원을 쓱쓱 쓸어서 지워버렸다. 원의 경계를 허물어뜨리는 것이 동자승이 찾아낸 해답이었던 것이다.

미래 사회의 모습은 여러 가지로 말할 수 있겠지만 특징적인 것 중 하나는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국·토·인·생’은 기본적으로 경계를 허무는 활동이다. 아니, 허물어야만 가능한 활동이다. 국가와 국가, 문화와 문화, 사람과 사람, 사람과 기술, 사람과 자연의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상대가 존재해야 나 역시 존재할 수 있음을 깨닫는 것이다. 이 경계가 지워질 때 우리는 미래에 대한 희망을 가슴에 품을 수 있다. 경계를 지운다는 것은 서로 손을 잡는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손을 잡는다는 것은 상대방과 나의 차이에 관계없이 공감하며 상대방을 받아들이는 통합의 의미도 담고 있다.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최재천, 2014), 그래서 능력의 유무와 관계없이 세상에 홀로 존재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할 때 비로소 우리가 희망하는 미래가 그 모습을 뚜렷하게 드러낼 것이다.

‘국·토·인·생’의 활발한 추진을 통해 교육내용이 풍성해지고, 학습방법이 더욱 다양해지며 학생들이 학습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면서 서로 간의 경계를 허물고 공감과 이해를 바탕으로 한 따뜻한 교실로 변화하길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