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Vol.229.겨울호

겨울 숲의 깨우침

조재근 서울중동초등학교 교장

 

▲ 겨울나무 (단양 소백산)

 

나의 숲 사랑은 아주 오래되었다.

젊을 때부터 산 다니기를 좋아하더니 자연스럽게 숲에서 만나는 생명들이 눈에 들어왔고, 또 운명적으로 그들에게 관심과 애정이 쏠렸다.

숲에서 잠 자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던 나는 지금도 숲에서 자는 것을 즐겨하고 있다.

숲은 나의 생활이 되었고, 지금도 크고 깊은 울림으로 나를 숲으로 이끌고 있다.

겨울!

나는 지금도 기억한다. 오래전 초겨울, 괴산의 어느 산 능선에서 겨울을 예고하는 듯한 스산한 바람소리를. 센 북풍이 빈 나뭇가지들을 스치며 내는 소리는 긴 휘파람 소리다. 그 소리는 곧 겨울이 다가옴을 직감하게 하는 숲의 신호다. 겨울은 이렇게 다가온다.

우리는 겨울에 대해 알지만, 숲의 겨울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것 같다. 겨울 숲은 텅 비어있고 살아 있는 것이 없으며, 황량하여 도무지 생명감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생각. 그래서 겨울은 추위, 눈, 바람, 황량함, 무생명의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2011년 1월, 나는 보령의 오서산을 걷고 있었다. 물론 온 산이 하얗게 눈으로 덮였고, 겨울바람은 차가웠다.

 

▲ 신갈나무 겨울눈 (보령 오대산)

 

이번엔 혹독한 인고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겨울나무를 만나보기로 마음먹고 걸었다. 겨울에는 나뭇가지에 달려 있는 겨울눈을 보는 재미가 크다. 겨울눈은 내년에 잎, 꽃, 가지가 나오는 생명의 산실(産室)이며 그 소중함은 가을 열매만큼 중하다. 나무마다 제 각각의 모양으로 매단 겨울눈은 지난 시절의 화려했던 꽃과 열매가 주는 느낌 이상의 감동을 준다.

겨울을 지내는 나무들에게 가장 두려운 것은 추위와 건조다. 이를 견뎌내기 위해 나무들은 아주 치밀하고 정교한 겨울눈을 만들어 낸다.

참나무의 일종인 신갈나무 겨울눈은 50여 개의 작은 비늘로 둘러싸여 있고, 각 비늘의 끝부분은 하얀 털이 밀생하여 찬바람과 추위가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다. 습기의 출입도 철저히 통제됨은 물론이다.

내년의 생명을 위한 준비는 이토록 단호하며 철저하다.

그 지극함에 감탄하게 되며, 치밀하고 정교한 설계에는 엄숙함마저 느끼게 된다.

숲과 나무는 스스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지는 않는다. 어떤 깨우침을 주지도 않는다. 자연(自然)은 그저 있을 뿐이며 느끼고 깨우치는 것은 온전히 사람의 몫이다.

그저 무심히 스치고 지나면 ‘지남’이 되고, 눈과 마음을 모으면 어떤 느낌이나 깨우침으로 우리에게 들어온다. 내 마음에 ‘지님’이 되는 것이다.

겨울나무의 비장함과 엄숙함은 우리에게 삶과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며 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깨우침을 준다.

겨울산에서 때로는 솜털로 중무장한 채 얼음으로 뒤덮인 갯버들의 겨울눈을 만날 수도 있다. 그 생명은 매우 위태로워 보이지만 인고의 시간을 견뎌내고 내년 봄엔 드디어 희망과도 같은 꽃을 피워 올릴 것이다.

잎을 펼친 채 혹독한 겨울을 지내는 당돌한 풀들을 만나면 그 집념과 용감함에 숙연해지기도 한다.

풀이기에 겨울이 더 혹독할 텐데 녀석들은 나름의 방법으로 겨울을 견디어 낸다.

 

▲ 달맞이꽃 로제트 (가평 명지산)

 

달맞이꽃은 로제트(Rosette, 잎을 땅에 붙여 납작하게 펼친 형태) 상태로 겨울을 지낸다. 차가운 바람을 피하고, 지열과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는 지혜와 전략이다. 그 결과 이른 봄에 잎, 꽃을 일찍 피울 수 있다.

사람의 겨울은 나무만큼 혹독하지는 않다. 나무는 동토에 박힌 채 맨 몸으로 온 겨울을 견디어 살아내야 한다. 그들에게 생존은 간절한 희구이며 생명은 엄숙한 소명이다. 다음 해에 살아있음은 그 엄숙한 인고의 결과다. 그래서 겨울나무는 경건하고 장엄하며 위대하기까지 하다.

우리 삶의 여정에 위안과 다독임이 필요할 때, 여유와 쉼이 필요할 때 겨울 숲에 들어가 보자. 인고의 겨울을 지내는 생명들에게 온기 어린 눈과 마음을 주어 보자. 그리하여 그 숲의 생명들을 ‘지남’이
아닌 ‘지님’으로 바꿔 보자.

 

▲ 노박덩굴 (영월 백덕산)

 

자연은 가진 자의 것이 아니라 즐기고 느끼는 자의 것이요, 길은 만든 자의 것이 아니라 걷는 자의 것이다.

올겨울에 겨울나무 가득한 숲길을 걸어 보자.

마음 한가득 그들의 소망과 희망도 함께 들여 놓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