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광한(내곡중학교, 교사)
교사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 이다.
초임 때 많이 들은 말 중 하나가 ‘학생들에게 너무 경계 없이 다가가지 마라.’였다. 사랑스럽고 마냥 좋은 아이들이지만, 잘못했을 때 교사가 따끔하게 조언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 함을 드러내는 말이다. 이 말은 흔히 교사가 학생들과 너무 친해져서 격 없이 지낼 때 주의하라는 의미로 쓰이곤 한다. 시간이 흘러 이를 곱씹어 보면서 이 말에 진정한 속뜻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말의 핵심은 ‘다가가지 마라’가 아니었다. 바로, ‘경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너무 다가가서는 안 될 경계가 있듯 반대로 너무 멀어져서도 안 되는 경계도 있다. 바로 학생들이 언어적으로나 비언어적으로 도움을 청할 때 그 도움의 손길이 닿는 정도의 위치, 학생이 나를 필요로 할 때 도망치고 외면해서는 안 되는 자리이다. 교사가 넘지 말아야 할 경계는 안쪽에도 있었지만 반대로 바깥쪽에도 존재했었다.
교사는 이 두 영역 사이에 서 있어야 한다. 즉, 교사는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열정 가득한 초임 교사나 신규 교사는 안쪽 경계를 세우지 못하고 너무 다가가는 경우가 빈번하다. 반대로 연차가 쌓인 경력이 있는 선생님들은 안쪽 경계는 정확하게 지키지만, 바깥쪽 경계를 지키지 못하고 아이들을 멀찍이 보고만 있는 경우가 많다. 이 사실을 깨닫고부터 나는 내가 서 있는 곳이 아이들에게 의미가 있는 충고를 할 수 있는 자리임과 동시에 아이들에게 도움의 손길이 닿는 곳이 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오늘도 우리 반 아이들은 “선생님 사랑해요.”라는 말을 하며 나에게 안기려고 한다. 이때 나는 “응, 선생님도 사랑해.”라는 말을 하고, 적당한 거리감을 둔다. 종례 시간 아이들 사이의 장난스러운 대화에서 짓궂은 농담이나 상처가 되는 말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이 있다. 그럼 나는 매의 눈으로 그 아이를 지켜보고 있다가 종례가 끝난 후 조용히 다가가서 “아이들이 하는 말에서 상처가 되거나 힘든 게 있으면 언제든지 선생님한테 이야기 해 주면 고마울 거 같아.”라는 친밀함을 드러낸다. 이런 아이들과 나 사이의 적당한 거리감과 친밀감이 교사로서 나의 존재감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 준다.
도망치고 외면하지 말자. 그렇다고 한없이 다가가지도 말자. 친절함 속에 단호함을, 상냥함 속에 확고함을 지녀야 한다.
우리는 그 경계에 서 있는 사람이다.
교사는 교육 전문가 이다.
어느 날 형이 내게 물었다.
“너는 너 스스로 전문가라고 생각해?”
나는 이 질문에 대해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상당한 지식을 갖추었다고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려웠고, 경험적으로 아직 교직 경력도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지혜롭게 대처하기에 나는 어렸고, 내 인생의 경험도 많지 않다고 생각해서 머뭇거렸던 것 같다.
확신이 서지 않은 나에게 형은 “너는 전문가야. 그러니까 네가 있는 직장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하든 프로답게 행동해.”라고 말했다.
‘프로다운 행동이 뭘까? 전문가가 무엇일까?’ 고민하던 중 얼마 지나지 않아 이에 대한 해답을 병원에서 찾을 수 있었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그보다 어린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었다. 그는 공손한 태도로 의사의 말을 경청했고, 병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는지 물었으며, 의사의 약 처방에 대해 믿고 신뢰했다. 의사에 대한 예절 그리고 신뢰는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나이의 많고 적음일까? 결혼의 유무일까? 생김새와 관련이 있을까? 아니면 성별의 차이에서 오는가? 정답은 전문성에 대한 믿음과 역할 수행의 당당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렇다. 전문성은 나이를 넘어선다. 그렇기에 학생에게 교육적 지식을 제공하는 것에 더해 학부모님에게도 부모 공부 자료를 제공해야 하고 이 자료에 대해 인정받아야 한다. 이후 나는 책과 강연, 영상, 글귀 등 일상의 경험에서 학생을 위한 자료뿐만 아니라 학부모님들을 위한 자료도 수집하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자료가 모일 때쯤 수집한 자료를 일주일에 하나씩 학부모님 단톡방에 올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떤 신뢰를 형성하고 있을까?
올해 4월 주제 선택활동 이동 수업 중 우리 반 아이의 동복 체육복이 사라지는 일이 발생했다. 학부모님께 연락드려 생활상담부에 들러서 찾아봤는데 못 찾았다고 죄송하단 말씀을 드렸다. 그러자 학부모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저도 아이도 담임 선생님을 믿고 있습니다. 선생님이 생활상담부까지 가셔서 알아봐 주셨다고 하니, 담임교사로서 하실 수 있는 모든 것을 해주신 거로 생각합니다. 나머지는 저와 아이가 잘 해결해 보겠습니다.”
우리 학부모님들은 교실에서 이뤄지는 나의 교육과 가르침을 온전히 신뢰해 주신다. 이러한 믿음은 단톡방에 올라오는 부모 공부 자료와 조회 시간 교육 자료에서 확인한 담임교사의 교육에 대한 소신과 전문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생각한다. 최근 우리 반 아이가 타반 아이와 싸운 일이 있었다. 관련된 우리 반 아이의 학부모님과 전화할 때 나는 두렵거나, 떨지 않았다. 학부모님이 나를 믿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님은 내가 늘 아이 편에 서서 고민하고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는 믿음이 있으셨고 전화를 받으시자마자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면 좋을지 함께 고민해 주시고 협력해 주셨다.
교사는 교육 전문가이다. 우리들의 전문성과 역할 수행의 당당함은 모든 사람에게 신뢰와 믿음을 주어야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신뢰와 믿음을 바탕으로 학생, 학부모, 교사가 함께 동행해야 한다. 내가 받았던 질문을 다시 한번 곱씹어 보길 바란다.
“우리는 전문가인가?”
교사는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 이다.
「철수에게는 2명의 친구가 있다. 친구 A는 철수가 봤을 때 마음씨도 착하고 모든 면에서 모범적인 학생이다. 반면 친구 B는 성격도 나쁘고 무엇 하나 잘하는 게 없는 학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마을에 안경원이 새로 생겼는데, ‘마음을 보여주는 안경’을 대여해 준다고 한다. 안경원을 지나치던 철수는 호기심이 생겨 안경집에 들어갔고 주인에게 두 친구의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보기 위해 안경을 빌린다. 그 후, 철수는 안경을 통해 두 친구의 모습을 본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안경을 돌려주려고 안경원으로 돌아가는데, 안경을 빌렸을 땐 없던 큰 거울이 안경원 앞에 놓여있다. 그리고 철수는 걸음을 멈춰 안경을 통해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된다. 그리고 안경을 반납한다. 안경원 주인이 묻는다.
“무엇을 보고 왔습니까? 안경을 통해 두 친구의 실체를 보고 왔나요?”
“제가 봐야 했던 것은 두 친구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거울 속에 비친 저 자신의 모습이었습니다. 그 모습은 제가 안경을 통해 바라본 그 누구보다 추악하고 일그러진 모습이었습니다. 제가 봐야 했던 건 저 자신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는 조회 시간을 활용하여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이야기는 친구끼리 비교하고 평가하는 안 좋은 분위기가 생길 때쯤 아침 조회 시간에 들려주는 ‘마음을 보여주는 안경’ 이야기이다. 담임으로서 아이들에게 들려주어야 할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인성교육, 예절교육, 교칙 준수, 지켜야 할 것들, 가져야 할 태도, 더불어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 등. 시간에 쫓기는 아이들이기에 종례보다 조회 시간을 활용하여 이야기를 전하고 있고, 아이들은 3월부터 4월까지 들었던 나의 이야기에 익숙해져 있다.
이야기와 잔소리의 차이는 무엇일까? 이 둘의 극명한 차이는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는가 없는가’이다. 그렇다. 스토리에는 사람을 변화시킬 힘이 있다. 나는 이야기를 통해 아이들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이고 싶었다. 그리고 매년, 나는 나의 이야기가 우리 반 아이들을 조금씩 변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다.
학급에서 내가 하는 모든 말에는 스토리가 담겨 있다. 교과 통합 진로 교육 시간, 모둠을 구성하는 작은 일에도 아이들은 자신이 원하는 친구와 모둠을 구성하고 싶어 하고 이러한 작은 다툼에서도 교사와 학생 사이의 갈등은 일어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너희가 뭐라 하든, 나는 앉은 자리 그대로 모둠 만들 거니까. 그냥 받아들여.”라고 말하지 않는다. “얘들아, ‘때론 얼떨결에 탄 버스가 내가 원하는 목적지로 나를 가장 빠르게 데려다 준다.’라는 말이 있어. 지금 너희가 만든 조가 너희가 원하는 모둠, 너희가 타고 싶었던 버스가 아닐 수도 있어. 근데, 사람 일이 그렇다? 내가 원하지 않았고 심지어 싫었던 일이라도 그 속에서 기적을 만나고 그 속에서 기회를 찾게 되는 순간이 정말 많아. 혹시 아니? 오늘 너희가 있는 그 조에서 여러분이 기적을 경험하고 기회를 만나게 될지?”라고 이야기한다.
그렇게 3월부터 4월 두 달 동안 조회 시간을 통해 학급 분위기를 형성하고 나면 5월부터는 나도 조금 힘을 빼고, 조회 시간에 여유롭게 웃으면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럼 신기하게도 몇몇 아이들이 “선생님 요즘엔 왜 아침 조회 시간에 이야기를 안 들려주세요?”라는 질문을 한다. 그렇게 매년 나는 내가하는 말들이 ‘잔소리’가 아니라 아이들이 듣고 싶은 ‘스토리’임을 확신하며 나의 교육 방향이 옳다는 것을 확인한다.
가정에서, 학교에서 아이들이 듣는 잔소리는 그들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잔소리는 아무런 힘이 없다. 잔소리가 세상을 변화시키고 아이들을 성장시켰다면 지금 우리는 다툼이나 걱정 없이 아이들과 꿈과 미래에 대한 행복한 이야기만 나누면서 즐겁게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교사는 스토리를 말하는 사람이다.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보자. 지금까지 나는 ‘스토리텔러’였는가 아니면 잔소리텔러였는가?
교사는 때로 아프다.
나는 선생님들끼리 있는 자리에서 “교사가 몸이 힘든 것보다 마음이 힘들고 아픈 걸 더 조심해야 한다.”라고 자주 이야기한다. 그렇게 말했던 나였기에 마음이 힘들고 아플 땐 분명 알아차릴 수 있을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어제 제가 퇴근하면서 선생님이 걸어가시는 걸 봤는데, 학교에서 보지 못했던 어두운 표정이시더라고요. 학교에선 항상 웃고 계셔서 그런 표정이 있는 걸 처음 봤어요.”
동료 선생님의 말씀에 나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그 당시 개인적으로 불안하고 힘들었었다. 마음이 힘든 걸 조심해야 한다던 나조차, 아프다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다른 사람을 통해 알게 된 것이다.
교사는 학생을 가르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관계는 학생에서 멈추지 않는다. 동 교과 선생님, 동 학년 선생님, 같은 부서 선생님, 각 부서 부장님들, 관리자, 학부모, 심지어 교육청 담당자와 장학사도 우리들의 관계 속에 있다. 이뿐인가? 같은 부서 선생님과 업무로 갈등이 빚어질 때도 있고, 사안으로 옆 반 선생님의 눈치를 볼 때도 있다. 때론 학부모님, 관리자와도 갈등이 생긴다. 심지어는 학교 밖에서 일어나는 사이버 폭력, 언어 폭력까지 우리의 몫이 된다. 그렇게 지친 몸으로 퇴근한 우리는 또다시 누군가의 엄마, 누군가의 아빠, 누군가의 아들이며 딸, 그리고 잠들기 전에는 오늘 하루도 고생한 나 스스로를 위로하고 사랑해줘야 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지친다. 힘이 든다. 그렇기에 교사는 때로 아프다.
휴식이 필요한 때다. 하지만 학창 시절부터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자란 선생님들이 대부분이기에 ‘내가 쉬는 것이 곧 남들에게 다른 의미에서 피해를 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렇기에 쉬는 것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까지 알게 모르게 다른 선생님들이 비운 자리를 묵묵히 채워주고 있었다. 누군가 아픈 사람이 잠깐 쉴 때 그의 자리를 지켜왔다. 서로의 빈자리를 감당해온 것이다. 쉬어도 된다. 지금까지 여러분은 열심히 했다. 쉴 줄 모르는 사람은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동차처럼 위험하다. 내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내가 그 자리에 있었을 때 우연히 그런 일이 발생했다는 마음의 여유를 갖자.
마지막으로 내가 다른 선생님들에게 자주 이야기하는 말을 하고 싶다.
“나는 여러분들이 몸이 힘들더라도 마음이 힘들고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