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 김완기 / (전)서울특별시성북강북교육지원청 교육장
그 당시 과대학교·과밀학급은 서울교육의 현안과제였고 뒤에 교육세를 신설해야 하는 당위성을 제공하는 이유가 되기도 하였다. 콩나물 교실에서 1학년은 3부제, 2~3학년은 2부제 수업을 하였다. 서울안산초등학교 3학년 1반 교실에서 89명의 아이들이 바른 자세로 공부하고 있다. 허름한 교실에서 비록 주입식 일제수업이었지만 아이들의 학습태도만은 자못 진지하다.
지금과 같은 크기의 20평 교실에서 작은 크기의 2인용 책상을 붙여서 옆으로 5줄을, 칠판 앞부터 뒤까지 통로만 제외하고 앞뒤로 9줄을 놓아야 90명을 앉힐 수 있었으니 덩치가 큰 6학년 교실은 더욱 답답하였다. 학생 수 100명을 넘는 교실에서 의자 2개에 학생 3명이 앉아야 하는 형편을 한 번 상상해보라.
단창 유리창문인 교실 난방은 연탄난로였다. 당시의 담임교사에게는 연탄불을 잘 피워 아이들을 추위로부터 보호하는 일이 필수적인 기술이었다. 난로에서 먼 아이들은 벽에서 들어오는 찬바람 때문에, 난로 옆에 앉은 아이는 너무 뜨거워서 견디기 힘들었다. 2부제 교실이기 때문에 난로 위의 도시락은 보이지 않는다.
우리나라 근대화운동이었던 새마을운동이 잘 살기운동이었다면 새마을교육은 근면·자조·협동의 새마을 정신을 생활화하여 미래의 새마을 역군으로 성장시키려는 교육활동이었다.
새마을교육의 주된 활동은 내 집 앞 쓸기, 화단 가꾸기, 혼·분식하기, 애향단 활동 등 다양하였다. 식량난이 절박했던 당시 식량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범국가적으로 혼·분식 운동을 전개하였고 학교에서는 흰 쌀밥만 먹으면 각기병에 걸리기 쉬우므로 혼·분식을 해야 몸이 튼튼해지고 나라가 부강해진다고 가르쳤다. 점심시간에 도시락 검사를 철저히 하여 혼·분식 점검표를 작성하였고 쌀밥을 싸온 아이들은 도시락을 꺼낼 수가 없는 시절이었다.
아이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던 혼·분식 운동은 학교교육을 통해 지역사회로 확산되어 국가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에 식량난 해결의 큰 효과를 거두었다.
예나 지금이나 현미식이나 잡곡밥을 권장하였지만 그 시절에는 식량난 해결을 위한 절약운동이었고 지금은 영양섭취 과다로 인한 성인병 예방차원의 국민계도활동이었으니 시대 흐름이 반영된,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김완기(2015). 그땐 그랬지. 하얀나무에서 발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