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관희 ( 서울공진초등학교, 교장)
해마다 5월이 되면 나는 라일락 향기를 찾아다닌다.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달고 매콤한 향기가 들어올 때는 모든 일을 뒤로 하고 밖으로 나간다. 어디에서 그 향내가 오는지 찾아보는 것이 나에게는 큰 기쁨이기 때문이다. 46년 전 그날도 그랬다. 어린 내가 새 집으로 이사 오던 날은 햇빛이 따사로운 봄이었다. 낯선 동네에 도착해서 마주한 시멘트 블록 담장과 초록색 철제 대문은 무서운 마음이 들게 했다. 트럭에서 장롱, 이불, 탁자 등을 내리는 할머니와 부모님을 도와 마당 안으로 들어서면서 나는 달콤한 꽃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대문 안쪽, 작은 마당에는 어린 라일락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낯선 곳에서 라일락 향기를 찾으면서 좋아졌던 기분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내가 기억하는 첫 번째 집은 ‘인천시 동구 만석동 25번지’였다. 인천은 바다가 가까운 곳이고 만석동은 그 지역에서도 바닷가에 가장 인접해 있어 부두가 형성된 곳이었다. 황해도에 가장 가까워서 6.25전쟁으로 인해 피난 온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었다. 아버지는 사범대를 미처 졸업하지 못하고 할머니와 함께 남으로 내려와 이곳에 정착하셨다. 타지에서 온 사람들이 사는 곳은 갯벌 근처 판자촌이었다. 갯벌은 친구들과의 가장 좋은 놀이터였다. 썰물일 때는 어김없이 맨발로 갯벌로 들어가 게와 조개를 찾아 돌아다녔다. 놀다가 지치면 바위에 붙어 굴 따기를 하는 아줌마들 옆에 앉아 방금 딴 싱싱한 굴을 얻어먹곤 했었다. 바다에 기대어 사는 집이 대부분이었던 그 시절,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었다.
할머니 곁에서는 늘 생선 비린내가 났다. 부둣가에서 받은 생선을 광주리에 담아 머리에 이고, 경인선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올라가 장사를 하셨기 때문이다. 내 어릴 적 가장 큰 기쁨은 단연코 ‘겨울 호떡’이었다. 추운 날 저녁 집으로 오는 길 언덕에 서 있으면 저 멀리서 할머니의 모습이 보였다. 한 손에는 빈 광주리를, 한 손에는 종이봉지를 들고서 개선장군처럼 걸어오시는 할머니. 물론 내가 뛰어가서 받은 것은 호떡이 든 종이봉지였다. 할머니의 손은 투박하고 갈라졌으며 차가웠다. 그래도 좋았다. 둘째가 제일 착하다며 호떡을 한 개 더 챙겨주시던 따스한 손이었기 때문이다. 만석동 집은 방이 2개가 있었다. 아버지, 어머니가 막내를 데리고 자는 방과 할머니와 오빠, 언니, 내가 자는 방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할머니는 늘 내 편이었다. 골목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사과를 빼앗아 먹은 날, 도망가는 나를 부지깽이로 때리겠다며 쫓아오는 어머니를 오히려 혼내셨다. “애 배 곯린 것이 뭬가 그리 잘한 일이라꼬…” 눈물, 콧물 바람하는 나를 앞마당 수돗가에서 씻겨 주신 것도 할머니였다. 할머니가 생선을 팔아서 산 처음 집이 ‘만석동 25번지’ 집이었 던 것이다.
할머니의 집을 떠나 이 집으로 이사 온 것은 6학년 때였다. 바닷가를 떠나 도심 한가운데로 온 나는 이곳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비릿하고 짠내 나는 첫 번째 집의 내음을 한참동안 그리워했다. 그래도 그곳에는 없었던 라일락 나무가 있어서 위안을 삼을 수 있었다. 사춘기 시절의 나는 라일락꽃이 무척 좋았다. 자그마한 꽃과 코끝을 간질이는 향기는 소녀 감성을 충족시켜주기에 충분했다. 그 시절에 읽은 『빨간 머리앤』, 『소공녀』, 『소공자』, 『허클베리 핀의 모험』, 『톰 아저씨의 오두막집』, 『장발장』등은 내가 경험해보지 못했던 미지의 세계를 상상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방이 4개로 늘어나 공간이 여유가 있었지만 나는 여전히 할머니와 한 방을 쓰고 있었다. 할머니는 책을 읽고 있는 나를 보면 씩 웃으시며 돌아눕곤 하셨다. 스탠드 전등을 켜놓고 밤새 책을 읽을라치면 두어 번 뒤척이시며 “야야, 고마 자라, 자야 키 큰다” 하셨다. 단발머리 중학생과 양 갈래 머리 고등학생 시절이 지날 때쯤 작은 라일락 나무는 어느새 두 뼘 굵기의 제법 큰 나무가 되었다. 그동안 할머니는 많이 노쇠해지셨다. 더 이상 생선을 팔지도 않으셨고, 호떡을 사오시지도 않으셨다.
그 대신 마당 앞에 조그만 걸상을 갖다 놓고 오랫동안 앉아 계시는 날이 많았다. 할머니의 유일한 낙은 라일락 나무에 물을 주고 거름을 주는 일이었다. 생선대가리에 남은 밥, 강아지 똥까지 섞은 거름은 라일락에게 좋은 양분이 되었던 것 같다. 싹이 나면 장하다 하시고, 꽃이 피면 예쁘다 하시면서 자식 키우듯이 정성을 쏟으셨다. 좁은 앞마당 안, 바위에 기대어 서 있던 볼품없는 라일락이 보기 좋은 크기로 자란 것은 할머니의 정성 때문이었다. 거동이 불편해서 방에만 누워계실 때에도 봄이 되면 창문 넘어 들어오는 라일락 향을 얼마나 좋아하셨는지 모른다. 라일락 향기가 가득했던 어느 봄날, 할머니는 이북에 두고 온 딸이 생각난다면서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지금도 친정에 가면 초록색 철제 대문 안에 라일락나무가 서 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더 이상 크지 못한 나무는 이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요 몇 년간 시름시름 앓는 것 같더니 고목마냥 말라있다. 라일락 향기 가득했던 친정이 그립다. 할머니, 엄마의 수다와 아버지의 기분 좋은 술주사와 4남매의 북적거림이 그립다.
할머니도 그랬을까.
모든 것이 그리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