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범희 (진명여자고등학교, 교사)
설명문 읽기 수업의 어려움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서 읽기 수업을 진행하다 보면 텍스트 읽기에 어려움을 겪는 학생을 수도 없이 만나게 된다. 특히 정보가 담긴 설명문을 읽을 때 심각한 어려움을 겪는데, 단 한 줄도 제대로 읽지 못해 방황하는 학생들이 존재한다. 그들의 눈빛을 마주할 때면 청소년의 문해력 저하가 실제로 존재하는 현상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이 엄습한다. 게다가 이러한 학생들의 비율이 꽤나 높기 때문에 이 문제는 하나의 거대한 벽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나 한 명의 노력으로 해결할 수 없는 사회 현상 같아 주눅 들게 되는 것이다.
절망하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고등학교 국어 교사가 아니면 누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겠나 싶어서 기운을 내기로 했다. 마음을 다잡고 학생들이 읽기를 어려워하는 이유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문해력을 다룬 서적이나 논문, 전문가들의 분석을 보니 어휘력 부족, 읽기 전략에 대한 무지, 읽기 경험 부족 등이 문해력에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고 이를 수업에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읽기 전 활동으로 글에 있는 어휘들을 정리하는 학습 활동을 구상하여 어휘력을 개선하고, 예측하기나 요약하기 등 읽기 전략을 소개하며 글을 읽혀도 보고,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행평가를 통해 읽기 경험을 쌓아 주기도 하였다. 각 방법 모두 효과가 있었다. 어휘를 모두 숙지한 학생들은 텍스트 독해에 어려움을 덜 겪었으며, 예측하기나 요약하기 등의 전략을 활용하여 읽을 때는 글에 몰입하는 모습도 보였다. 한 학기 동안 한 권을 심도 있게 읽는 과정에서는 많은 깨달음을 얻기도 하였다. 하지만 그 효과는 설명문 읽기 수업에서 한계에 부딪히고 말았다.
동기부여의 중요성
학생들은 모르는 어휘가 없어도, 읽기 전략을 숙지하고 있어도, 성공적인 읽기 경험이 존재한다고 해도 설명문을 읽기 어려워했다. 분명 내가 알고 있는 문제점들은 전부 개선됐는데도 상황이 더 혼란스러워 지기만 했다. 무엇을 놓친 것일까. 이 문제의 원인을 알아낼 방법은 하나밖에 없었다. 학생들에게 설명문이 읽기 힘든 이유에 대해 직접 물어보기로 결심했다.
설문 결과 정말 많은 학생이 ‘재미가 없어서’ 설명문이 읽기 어렵다고 답했다. 이외에도 ‘읽고 싶지 않아서’, ‘관심이 없는 분야라서’ 등의 대답이 있었다. 모두 ‘재미가 없다’와 일맥상통하는 내용이었다. 어휘나 읽기 전략, 읽기에 대한 자기 효능감 등을 언급한 학생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결국 읽고자 하는 동기가 생성되지 않아서 설명문 읽기를 어려워한다는 것이다.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동기부여의 중요성을 잊고 있었다. 동기가 없으면 학습은 일어나지 않는다. 교육의 가장 기본적인 대원칙 중 하나를 잊은 채, 단지 문해력 부족을 개선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아이들을 몰아붙이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에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사실 문해력의 저하 현상은 텍스트 읽기 의욕의 저하와도 관련이 깊다. 요즘 아이들은 모르는 것이 있을 때 동영상 플랫폼에 검색해서 해답을 찾는다는 기사를 접하고 놀랐던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디지털 세대에 속하는 나 역시 텍스트를 통해 지식을 접하고 문제를 해결해 왔는데, 요즘 학생들은 영상을 통해 지식을 습득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게다가 동영상은 시각적으로 화려하고 시청각을 동시에 자극하기 때문에 글보다 훨씬 재밌다. 청소년들에게 글은 정보 습득 목적으로도, 재미를 추구함에 있어서도 구미가 당기지 않는 매체인 것이다. 읽고 싶지 않으니 읽기 능력이 저하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선택권 부여가 동기부여로
학생들이 설명문을 읽고 싶게 만들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자, 머리가 바쁘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우선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부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학기 한 권 읽기’ 수업 시간에 학생들에게 읽을 도서 목록을 주고 자신이 읽을 책을 직접 고르게 하니, 학생들이 의욕적으로 책에 몰입했던 기억이 있었다.
이를 설명문 읽기 수업에 적용해보기로 했다. 다만 읽어야 하는 글의 목록은 교사가 정해 놓고, 수업에서 다루게 될 글의 순서를 학생들이 정하라고 하였다.
많은 학생들이 무슨 글부터 읽어야 하는지 열성적으로 토론하기 시작했다. 각자 의견을 말한 뒤 투표로 순서를 결정하기로 하였다. 어렵고 지루한 주제의 글부터 먼저 읽어야 한다는 의견과 쉬운 것부터 차근차근 읽어 나가자는 의견이 대립했다. 투표 결과는 반마다 다르게 나왔다. 반별로 다른 순서로 수업을 하고 같은 날에도 다른 내용을 학습하게 된 것이다.
흥미로웠던 점은 학생들이 직접 지문 학습 순서를 결정하다 보니 수업이 시작하기 전에 그날 어떤 주제의 글을 다룰지 이미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수업에 주인 의식이 생기면서 주체적으로 학습에 참여하고자 하는 모습이었다. 나아가 학생들은 다음 시간에 학습할 지문까지도 미리 숙지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일부 학생은 원활한 학습을 위해 해당 주제에 관한 배경지식을 미리 조사해 오기도 하였다. 놀라운 변화였다. 단순히 학습의 순서를 결정하는 권한을 주었을 뿐인데 강력한 동기부여가 이루어지고 있었다.
설명문을 읽는 목적은 설명문을 읽기 위함이 아니다
설명문을 읽기 어려운 이유에 대한 설문에서 ‘왜 읽어야 되는지 모르겠다’, ‘읽어도 쓸모가 없어서’와 같은 대답도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이러한 대답은 설명문이 단순히 재미없다는 말이 아니었다. 조금 더 고차원적인 성찰이 담긴 대답이었다. 학생들은 설명문 읽기를 왜 배워야 하는지, 어디에 쓸모가 있는지에 관해 의문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런 대답을 묶어서 ‘생산적 목표의 결여’라고 분류하였다. 즉 학생들은 단지 읽기 위해서 설명문을 읽고 있었고, 생산적인 목표를 가지고 글을 읽어본 적이 없었다. 공부를 위한 공부, 성적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보통 생산적인 목표를 가지고 설명문을 읽는다. 예를 들어, 연구자는 읽기를 통해 습득한 정보를 바탕으로 연구를 발전시키고, 다큐멘터리 제작자는 읽기를 통해 접한 지식을 재구성하여 영상을 제작하고, 일반인은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양한 글을 읽고 해결책을 찾아내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 학생들은 단지 공부를 위한 읽기, 읽기를 위한 읽기, 성적을 위한 읽기에만 매몰되어 있었다. 그래서 설명문 읽기 수업에서 달성해야 할 생산적인 목표를 학습 활동으로 제공하기로 하였다. 물론 그 활동의 종류도 학생이 직접 선택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선택을 통해 학생이 주체가 되는 설명문 읽기 수업 만들기
수업을 설계하기에 앞서 학생들이 다양한 학습 활동을 진행할 수 있게 유용한 내용이 들어간 제시문을 선정해야 했다. 감정노동을 다룬 글, 물가지수를 다룬 글, 인공 신경망 기술을 다룬 글. 이 세 개의 글 중에서 학생들이 하나의 글을 선택하도록 하였다. 투표 결과로 감정노동을 다룬 글이 선정되었다.
이후 학생들이 흥미를 느낄 수 있는 양질의 활동을 최소 세 개는 만들어야 했다. 학생 자신이 직접 활동을 선택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 활동의 가짓수를 세 개로 결정했다. 또한 하나의 학습 활동이 다른 학습 활동에 비해 완성도가 떨어지면 활동의 선택으로 인해 학습 격차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에, 세 개의 활동 모두 완성도가 높아야 했다. 혼자서 세 개의 학습 활동을 완성도 있게 제작하는 것은 어려움이 많았기 때문에, 내가 활동하고 있었던 「강서·양천 수업평가나눔교사단」 국어 분임 선생님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감사하게도 모든 선생님이 흔쾌히 도와주시기로 하셨다. 여러 선생님이 합심하고 고민한 결과 제시된 글을 읽고 할 수 있는 세 개의 학습 활동이 구상되었다. 첫 번째 활동은 감정노동에 관한 이론을 제시문을 통해 이해한 뒤, 학생이 상담사가 되어 교사를 상담하는 ‘상담 질문 만들기’ 활동이었다. 두 번째 활동은 학구적인 학생들을 위한 ‘문제 만들기’ 활동이었다. 마지막 세 번째 활동은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학생들을 위한 ‘세 컷 만화 그리기’ 활동으로 구성되었다. 이렇게 모든 준비가 끝났다. 완성된 수업의 흐름은 다음과 같다.
1차시: 사전 준비 작업
학생별로 진행하는 학습 활동이 다르고 처음 해 보는 방식의 수업이라 모두가 혼란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자신이 하고자 하는 학습 활동의 선정, 모둠원 모집, 활동 수행 구역 및 자리표 작성을 통해 수업의 혼란스러움을 최소화하고 질서를 잡고자 하였다. 학생들에게 세 개의 활동을 각각 소개한 뒤 맘에 드는 활동을 선택하도록 지도하였더니, 26명의 학생 중 6명이 ‘상담 질문 만들기’, 10명이 ‘문제 만들기’, 나머지 10명이 ‘세 컷 만화 그리기’를 선택하였다. 활동을 선택한 후에는 함께 활동할 모둠원을 모집하라고 하였다. 이후 2~3인으로 구성된 모둠을 바탕으로 자리표를 작성하였다.
2차시: 제재를 읽으며 학습 활동 진행
학생들은 미리 자리표대로 자신의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상태로 수업이 시작되었다. 먼저 감정노동을 다룬 제시문을 나누어주고 사실적 독해를 위한 시간을 갖도록 했다. 이 시간 동안 학생들이 잘못 읽을 수 있는 지점을 모둠별로 방문해 직접 짚어주고 제시문에 대한 이해가 충분한지 점검했다.
첫 번째 활동인 ‘상담 질문 만들기’ 팀은 유난히 진중하게 활동에 임했다. 그동안 상담을 받기만 했던 자신이 반대로 선생님을 상담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진중함과 집중력이 피어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첫 번째 활동을 진행 중인 모둠에서는 방해가 되지 않도록 지문에 대한 이해도만 점검하고 다음 모둠으로 이동하였다.
두 번째 활동인 ‘문제 만들기’ 팀은 모든 팀 중에 가장 활발하게 활동에 임했다. 어떻게 하면 더 까다로운 문항을 출제할 수 있을지 깊게 고민하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매번 자신들을 시험에 들게 했던 선생님을 반대로 시험한다는 사실에 들떠 있었다. 그래서 문제 만들기를 진행 중인 모둠에는 자주 방문하여, 학생들이 만든 문제를 점검하고 직접 풀어보기도 하였다. 나도 사람인지라 오답을 얘기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마다 학생들이 정말 크게 기뻐했다.
세 번째 활동인 ‘세 컷 만화 그리기’ 팀은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 영감을 수집하는 모습을 보였다. 인터넷으로 손을 그리는 방법, 인체 구조도, 해부학 등을 검색하며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한 방법론과 소재를 수집하기도 하고, 세 컷 만화를 그리기 위한 구도를 구상하기도 하였다. 국어 시간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예술가 같은 모습이었다. 모둠별로 그려내는 결과물도 제각각이었다. 어떤 학생들은 귀여운 캐릭터를 그려서 만화를 그리기도 하고, 어떤 학생은 명암이 자세히 표현된 그림을 통해 감정노동이라는 주제를 심오하게 표현하기도 하였다.
3차시: 활동 내용 공유 및 상호 피드백
이어지는 수업에서 학생들은 재빠르게 활동을 마무리하였다. ‘상담 질문 만들기’ 팀은 상담 준비를 끝내고 나를 호출하여 심도 있는 상담을 진행하였고, ‘문제 만들기’ 팀은 출제한 문항을 다른 친구들과 확인하며 문제를 풀고 있었다. ‘세 컷 만화 그리기’ 팀은 그려낸 만화를 칠판에 붙이고 전시하기 시작하였다. 같은 글을 읽었음에도 모두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냈고 그 결과물을 모두가 즐겁게 공유했다. 그리고 그 다양성 안에서 학생들은 글을 읽는 것이 이토록 즐겁고 보람차다는 것을 깨달은 표정이었다. 모두가 마치 수업을 통해 자아실현이라도 한 것처럼 뿌듯해했다.
선택권 부여와 목표 제시의 중요성
나는 학생들에게 선택권을 주고 수업의 주체로 만들어 주는 것이 이처럼 엄청난 효과가 있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다. 더군다나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는 설명문 읽기 수업인데도 불구하고, 모든 학생이 너무나도 즐겁게, 기꺼이 몰입하여 설명문을 읽고 학습 활동을 수행했다. 어찌 보면 수업에 몰입하게 하는 것은 교사의 정확한 지식 전달이 아니라, 학생들이 배움의 주체가 되도록 돕고, 배움의 이유와 목표를 분명히 제시하는 교사의 섬세한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은 계속해서 질문한다. 왜 이것을 배워야 하는가? 왜 나는 배우고 싶지 않은 것을 배워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학생들이 납득할 수 있게 명확히 제시하는 것. 이것이 교사로서 갖추어야 할 제1의 덕목이 아닐까 한다.
끝으로, 이런 깨달음을 얻을 수 있도록 학습 활동의 구상 및 제작에 도움을 주신 「강서·양천 수업평가나눔교사단」 국어 분임의 모든 선생님과 특별히 더 수고해주신 송슬기 선생님, 김유나 선생님께 각별한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