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Vol.226.봄호

봄의 역설(逆說)을 통해 본
‘가르치는 사람들’의 마음 풍경

|이병일


교사들의 멘토이자 세계적인 교육지도자인 파커 파머(Parker J. Palmer)는 그의 저서 『삶이 내게 말을 걸어 올 때(Let Your Life Speak)』에 세상의 모든 존재에 깃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시기에 대한 통찰의 글을 담았다. 다음은 봄에 관한 글의 일부이다.

“봄이 오면 그 계절적 화려함에 나는 낭만적 감상에 빠져든다. 하지만 아픈 진실 하나를 먼저 얘기해야겠다. 봄은 그 아름다움을 갖추기 전에 진흙과 오물에 지나지 않는 추한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이다. 이른 봄에 들판을 걷다 보면 장화가 푹푹 빠지고 세상은 온통 눅눅하고 질척해서 오히려 꽁꽁 얼어 있던 땅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하지만 이 진흙 범벅 속에서 부활을 위한 환경이 창조되고 있다.”

얼었던 땅이 녹으면서 질퍽거리고 꽃샘추위도 뼈를 뚫듯이 괴롭히는 ‘2월 중순부터 3월 중순무렵’을 나 역시 가장 싫어한다. 하지만 봄은 이렇게 시작된다. 바로 이 눅눅하고 질척거리는 풍경과 함께한다. 꽃샘추위, 황사, 꽃가루 등도 봄의 불청객이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꽃샘추위가 물은 얼리지 않고 꽃가루로 고생해도 곧 맞이할 봄의 향연을 고대한다. 싱그러운 새싹과 화려한 꽃동산, 시원하고 온화한 대기, 때 맞춰 내리는 봄비의 서정을 기다린다.

<피정 신뢰의 서클(Centerpiece)>

나는 수년 전 교직 생애 최대의 고비이자 생애의 비탈길이었던 위탁형 대안학교 교사로 두 해를 살아 본 경험이 있다. 그 시작은 자신감과 의욕으로 원대했으나 점차 자존이 녹아내리며 낯빛은 그늘지고 푸석해지고 입술은 갈라지며, 학생들을 만나는 시간이면 가슴이 막히고 숨이 가쁜 소진(消盡)의 증상이 지속되었다.
이 때 사계절 피정(避靜, retreat) 프로그램에 참가했다.

봄 피정에 참석했던 때는 4월, 봄이 바야흐로 물오르던 시기였다. 봄 피정의 화두는 ‘역설(逆說)’. 모든 참여자가 받은 질문은 ‘나에게 봄의 역설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나눔 시간에 나는 내가 느끼는 봄의 역설에 대하여 이렇게 설명했다.

“봄은 화려한 색채를 뽐내며 많은 이들의 찬양을 받는다. 그러나 누군가에겐 논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힘겨운 노동이 시작되는 시기이다. 그리고 누군가에겐 서울에서 손꼽히는 위기 학생들과 무엇인가 시작해야 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잔인한 것이 4월이고, 밖은 너무 화려하나 그 안 에서 누릴 수 없는 한 때문에 잔인한 계절이 봄인 것 같다.”

이 역설 풍경은 농촌 출신인 내가 보고 겪었던 4월의 노동에 대한 애처로운 기억이 작용했지만, 그보다 더한 것은 위탁형 대안학교를 처음 시작하던 2008년 봄과 2년차인 2009년 봄, 즉 교직에서의 자존(自尊)과 정체성이 송두리째 무너지던 처절함이 함께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모험상담과 수련교육 그리고 연구 활동 등으로 다져진 자신감과 자존이 위기 학생들의 뾰족하고 무차별적인 도전 앞에서 하염없이 무너지던 기억이, 화려한 봄 색채에 대비되어 다가온 탓일 것이다.

파머는 이 상실감과 좌절의 경험이 새로운 생명 혹은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비옥한 토양이 될 수 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다.

“식물의 뿌리에 양분을 공급하는 썩은 야채 등의 부산물이라는 이름을 가진 ‘부식토(humus)’ 라는 단어의 어원은 ‘겸손(humility)’의 어원과 같다. 나는 이 사실이 무척 기쁘다. 이것은 축복받은 어원이다. 이 사실은 ‘내 얼굴에 똥칠을 한 일’이나 ‘내 이름에 먹칠을 한’ 생의 굴욕적인 사건들이 새로운 것이 자랄 수 있는 비옥한 토양을 만들었을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봄은 서서히 망설이듯 시작되지만 꾸준히 성장하여 끝내 나를 감동에 빠뜨린다. 제일 작고 연한 새싹들도 꾸준히 제 길을 따라 땅을 뚫고 올라온다. 불과 몇 주 전만 해도 아무것도 키워내지 못할 것처럼 보였던 땅을 말이다. (중략) 그 작은 시작으로부터 희망은 기하급수적으로 자라난다. 낮은점점 길어지고 바람은 포근해지며 세상은 다시 초록빛으로 물들어간다.”

봄의 시작은 질척할지 모르나 그 본체는 창대하고 화려하다. 겨울을 살아내기 위하여 겨울속으로 들어가는 것처럼, 봄을 잘 살아내기 위하여 땅의 질척거림과 꽃샘추위와 꽃가루 그리고 싱그럽고 화려한 새싹과 꽃들의 향연 모두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어느 사회에나 가르치는 사람들이 서 있는 터전이 자주 위태롭고 흔들린다. 아이들은 생애의 위태로운 시절을 마치 냇물 징검다리처럼 또는 이른 봄의 질척거림처럼 지나가고 있다. 어느 날 징검다리 건너서 당당한 삶을 살아갈 주인들이지만 ‘지금은’ 그렇게 보인다.

파머는 심각한 우울증에 시달리던 인생의 겨울을 벗어나 의욕이 살아날 즈음에도 어떤 것에도 희망을 품기 힘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가능성을 지닌 봄의 초록 줄기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봄이 지닌 폭넓은 다양성과 가능성을 발견하는 통찰에 이른 것으로 보인다.

“봄은 내게 가능성을 지닌 초록 줄기를 좀 더 주의 깊게 살펴보라고 가르친다. 작은 눈빛과 손짓이 얼어붙은 관계를 녹일 수도 있으며, 낯선 이의 친절한 행동이 세상을 다시 살 만한 곳으로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봄은 참으로 화려하고 다채롭다. 마치 피 끓는 청춘들의 파티처럼 말이다. 생명이 차오르는 봄날에 ‘가르치는 사람들’이 스스로 마음을 비추고 봄과 생명의 변화를 관찰하며 봄날의 다채로운 변화를 수용하는 것은 ‘배우는 사람들’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마음의 평정, 희망도 발견할 수 있다는 점을 일러준다.

변화와 흔들림, 위태로움은 생명, 자연 자체의 속성이자 아이들의 속성이다. ‘아이들 때문에 혹은 학부모 때문에…’ 가르치는 사람들이 힘들다고 탓할 수는 없다. 가르치는 사람, 학생, 학부모 모두 여기저기서 상처입고 팍팍한 생을 살아간다. 가능성도 희망도 함께 품은 채.

봄은 질척거림, 생명의 신비, 화려한 변화의 가능성 모두를 품고 있다. 아이들은 때가 되면 호르몬의 거센 지원을 받아 다채롭게 피어날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좌충우돌 또는 흥청망청으로 보이는 행태나 질척거리는 이른 봄날처럼 ‘가르치는 사람들’의 속을 아글타글 태운다.

“자연의 축제랄 수 있는 늦봄에 ~많은 꽃들이 꽃봉오리를 피우며 엄청난 선물을 우리에게 안겨 준다. ~겨울에는 모두 거둬 가버린 것처럼 보였던 생명의 선물을 다시 선사한다. 자연은 그것을 몰래 감추어 두지 않고 모두 아낌없이 준다. 여기에 역설이 있다. 선물을 받을 때 그것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방법은 움켜쥐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는 것이다.”

<봄의 역동(‘거미줄 통과’ 활동)>우리가 봄에 겪는 다양한 불편과 잠깐 등장하는 화려함과 기쁨, 이 모두를 선물처럼 바라보면 좋겠다. 이른 봄의 질척거림에 화려한 나날이 멀지 않음과 화려한 계절의 정경 후에 스산한 나날이 가까움을 늘 알아채고 있으
면 좋겠다.

아이들에게 엄습한 호르몬의 역습을 관찰하며 다채로운 변화를 받아들이되 자신의 마음을 늘 살피면서, 흔들리는 교단과 배움의 터전에서 중심을 단단히 잡은 채, 싱그러운 봄날을 충만하게 선물처럼 살아 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