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22 봄호(246호)

불행을 예방하는 ‘책 백신’,
함께 맞아요!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이민수(삼정중학교, 교사)1

작년 여름 2학기 수업도서를 준비하다 이 책을 알게 됐다. 김보통 작가의『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 김보통?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가명치고는 너무 평범하다 싶었는데 표지를 보자 호기심이 일었다. 커다란 넥타이 뒤에서 고개를 내밀고 수줍게 웃는 꼬마는 뭔가 할 말이 있어 보였다. 도서관 서가에 서서 앞부분을 읽다가 ‘오, 바로 이거다!’ 싶어서 빌려와 단숨에 읽었다. 다 읽고 나서는 뿌듯하다 못해 아쉽기까지 했다. ‘2017년에 출간된 책을 왜 이제야 알았지? 왜 내 주변에선 아무도 이 책을 읽어보라는 말을 하지 않았던 거야?’ 동네 맛집을 나 혼자만 몰랐던 것처럼 억울하기까지 했다. 개학 후 진로 도서 읽기 수업, 이 책은 꿈을 정하지 못한 아이들에게 권했다. 신기하게도 각 반에서 책을 싫어하던 남학생들이 이 책에 흥미를 보였다. 수업 중 책을 안 가져온 바람에 내 책을 빌려 읽던 아이들이 수업이 끝나면 이 책으로 계속 읽겠다고 했다. 그렇게 홀린 듯 나도 읽고, 아이들도 읽고, 독서모임 선생님들도 읽었다.

 

김보통 작가는 웹툰도 그리고 수필도 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작가의 다른 글들도 읽고 신문 기사와 방송 인터뷰도 찾아 봤지만 작가의 얼굴은 볼 수 없었다. 커다란 강아지 탈을 쓰고 나와서 철저하게 얼굴 없는 작가로 작품으로만 말하는 신비주의를 고수했다. 실제로 작가 주변에서도 자신이 김보통 작가임을 아는 사람이 몇 명 없다고 한다. 그는 우리 사회의 보통 사람들, 가장 평범한 이들의 목소리를 대변하려고 한다.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는 작가가 되기 전 경험담으로, 대기업을 다니다가 4년 만에 퇴사한 이야기다. 퇴사 후 해외여행을 가도 극적인 일은 일어나지 않았고 이후 새로운 일을 시도하나 생각만큼 녹록하진 않았다. 퇴직금은 바닥이 나고 수염이 덥수룩한 채 자신이 먹을 빵(브라우니)을 굽다가 문득 잊었던 그림을 다시 그리기 시작해 결국은 웹툰 작가가 되는 이야기다.

“보통아, 너는 그림을 그려야 해.” 이글거리는 눈으로 선언을 하셨던 작가의 중2 때 담임(미술)선생님이 이 책을 보신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내가 그 선생님도 아닌데, 작가가 17년 만에 그림을 다시 그리는 장면은 얼마나 가슴이 벅차던지. 사제지간의 특별한 인연이 나오면 내 일도 아닌데 흐뭇하고 뭉클하고 감동이 배가 되는 건 직업병(?)일 듯. 작가를 볼 때마다 뿌듯할 사람은 한 명 더 있다. 김보통 작가에게 만화를 그리라고 SNS상으로 제안했던 최규석 작가, 그는 김보통이라는 무명인이 이렇게 대박을 칠 줄 알았을까? 최규석 작가는 그림만 잘 그리는 줄 알았는데 사람 보는 눈이 신기하다 못해, 신기가 있다. 최규석 만화가의 팬으로서, 실물로도 뵌 적이 있기에 작가가 그를 묘사한 대목인 ‘보름쯤 굶은 사무라이 같은 눈빛의 최규석 작가님’에선 웃음이터져 나왔다. 솔직, 정확함에 재치를 겸비한 김보통 작가의 문체는 읽는 재미를 더하는 양념이다.

국어교사로서 책을 읽는 내내 작가님의 글쓰기 실력이 부러웠다. 어린 시절부터 책을 많이 읽어서 이런 능력을 갖게 된 걸까? 장면이 눈앞에 생생하게 펼쳐지는 묘사, 어떤 상황에서도 과장이나 과잉이 없는 솔직하다 못해 강박에 가까운 정직함, 적재적소에서 빛나는 찰떡 비유, 통찰과 유머, 여유에 겸손까지 갖췄으니 어찌 존경하지 않을 수 있으랴. 한 사람의 아주 사적인 이야기, 어찌 보면 지질하고 궁색해서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별 이야기가 되었고, 읽다 보면 어느새 이만큼이나 읽었나 싶어서 남은 페이지를 아껴가며 읽다가 어느새 다 읽고 나면 시원섭섭하고 후련하다. 작가의 메시지는 분명하다. 그렇게 죽어라 애쓰며 살지 말아라. 내일 일을 모르니 오늘 하고 싶은 것을 하라고 당부한다. 어떻게든 살아진다고, 산다는 게 그렇게 쉽게 불행의 나락으로 떨어지지는 일이 아니라고.

작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야 회사를 그만둔다. 아버지가 원했던 대기업에 들어간 건 자신의 선택인데 죽을 만큼 힘이 들어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는 (차라리 자살을 고민할지언정) 회사를 그만 둘 생각은 못 했다고 한다. 회사를 그만두는 것이 안전한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죽을 만큼 두려웠으니까. 모두가 넌 불행해질 거라고 예언하며 저주를 퍼부었으니까. 그러나 더는 안 되겠다, 참고 참다가 대책 없이 회사를 그만둔 후에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다. 방황과 고민을 하고 퇴직금을 날리고 이도 저도 할 수 없는 암울한 상황에서 브라우니를 굽다가 브라우니가 구워지는 시간에 그림을 그리게 된다. 중학교를 졸업하고 17년 만에 그리는 그림은 서툴고 어색했지만 브라우니처럼 그림도 조금씩 나아질 거라 믿는다.

작가는 나중에 (라디오방송 인터뷰에서) 말한다. 내가 잘하고 싶었던 것으로 실패하고 싶지 않아서 회피했던 것 같다고. 그림만큼은 잘 그리고 싶었는데 이미 접었던 꿈이라 다시 꺼낼 엄두가 안 났다고. 하지만 할 게 없으니 나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고 있었고, 낯선 사람들의 사진을 보고 그리다 보니 그림을 기다려주는 사람이 생겼다고. 돈을 받는 것도 아닌데, 내 그림을 기다리는 누군가를 생각하니 다음날도 또 누군가 보내준 사진을 보면서 그리게 됐다고. 만화가가 되겠다는 포부가 있던 것도 아니고, 뭐가 되겠다는 계획도 없이 그냥 그림이 쌓이고 글을 쓰다 보니 어느 날 기회가 왔다고.

자기 착취가 습관이 되어버린 일상, 이 부분에서는 김누리 교수의 『우리의 불행은 당연하지 않습니다』가 떠올랐다. 불안을 불행으로 몰아가는 나쁜 사회, 왜 우리는 끝없는 경쟁으로 나와 남을 몰아가는 것일까? 물질적인 기준, 소유한 것, 보여지는 것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일까? 김보통 작가는 퇴사 이후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다. 다만 ‘아직, 불행하지 않다’ 라고, 퇴사를 할 때 불행을 예언해 준 이들에게 보란 듯이 살고 있다. 패기랄 것도 없이 그저 나를 다그치지 말자, ‘다음’이 없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살아가자, 그래야 제대로 그 ‘다음’을 찾게 된다. 그런 작가를 보면서 나 또한 내 삶을 돌아본다. 단 한 번뿐인 인생, ‘지금 여기’를 살면 되는 건데 왜 그리 앞만 보며 발을 동동 굴렀는지, 나만 그렇게 살아도 충분한데 교사로, 부모로서 아이들의 현재보다는 미래에 대한 관심 아니 불안이 왜 그리 많았는지, 좋은 대학, 좋은 직장이 별거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정말 별거 아닌지도 생각해 본다. 좋은 일자리, 나쁜 일자리로 처음부터 구별하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을 해도 안전하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 우리 사회는 앞만 보고 달려 자기 것을 챙기지 않은 이들에게 얼마나 야박하고 참혹한 일이 자주 일어나는지. (노동현장, 건설현장에서 일어나는 사고를 볼 때마다 가슴 아프고 부끄러울 뿐이다.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고, 제자든 자식이든 누구에게 어디든 가서 마음껏 일하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책을 읽고 나니 작가의 웹툰 <아만자>, <D.P>도 보고 싶다. <아만자>는 아버지의 암투병을 지켜본 경험으로 20대 암환자를 주인공으로 그린 병원이야기, <D.P>는 군대 탈영병 이야기로 작년 가을 넷플릭스 드라마로도 세간에 뜨거운 반응을 일으켰던 작품이다. 작가님 인터뷰를 찾아보니 다음 작품은 ‘학교’를 구상 중이라고 한다. 인간(남자)이라면 평생 거칠 수밖에 없는 세 곳이 병원, 군대, 학교인데, 병원과 군대를 다뤘으니 이제 남은 건 학교라고. OECD 청소년 자살률이 최고인 우리나라 학교를 그리려면 어두운 이야기겠지만 꼭 한 번 다뤄보고 싶다고. 김보통 작가님이 꺼내 놓을 학교 이야기는 기대되면서도 한편으론 겁이 난다. 제도적 차원의 교육 문제뿐 아니라 학교폭력, 학습 격차, 학생 인권 등 학교 안의 많은 문제들이 내부자의 입장으로는 안 봐도 어느 정도 예측이 되기에 막상 책이 나오면 편히 읽지는 못할 것 같다. 그래도 작가가 학교를 그리겠다는 게 고맙다. 학교가 변하기 위해선, 아이들의 불행을 막기 위해선 학교 안팎으로 더 많은 이들의 관심과 질타가 필요할 테니까. 너무 앞서갔다. 학교 이야기를 담은 웹툰은 아직 안 나왔으니 일단 작가의 첫 에세이 『아직, 불행하지 않습니다』부터 읽기를 권한다. 전 국민이 ‘불행을 예방하는 백신’부터 같이 맞았으면 좋겠다. 아이들도 좋지만 어른이 먼저 읽었으면 한다. 교사와 학부모뿐 아니라 불행바이러스를 쫓아내고 행복 면역을 찾고 싶은 사람이라면 모두 다 읽었으면 좋겠다.

  1. 아이들과 책을 읽고 나눈 이야기 <함께 읽기 좋은 날>(우리학교, 2022)의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