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사라(상신중학교, 교사)
‘드르륵.’ 교무실 문이 열리고 마스크를 쓴 둥근 인상의 여학생 몇몇이 조르르 들어와 말했다. 학생이 먼저 기안을 올려달라니, 짧은 교직 생활이긴 하지만 생전 처음 듣는 말이었다. 새로 옮긴 학교에서 학생 자치를 맡고, 학생회 아이들을 처음 만났던 3월 초. 새로운 학생회를 꾸리려는 회장단 아이들이 직접 면접 질문지와 채점 기준표까지 마련해 온 것이다.
손끝이 시리던 겨울 방학 동안 열심히 고민하며 준비한 흔적이 짙었다. 긴 시간 동안 면접을 보니 꼭 간식이 필요하다며, 간식 기안을 올려달라고 온 아이들의 얼굴과 준비해 온 종이를 번갈아 보았다. 잠시나마 말문이 막혔던 것은 금세 가시고 뭘 먹고 싶은지 물어보았다. 초코바 몇 개, 음료수 하나라니 소박하고 귀여운 요청이었다.
면접을 보던 날에도 내가 할 일은 없었다. 아이들 곁에 함께 앉아 있으며 면접 대기표를 대신 받아주고 이따금 간식을 보충해주기만 했다. 아이들이 알아서 차분하게 질문을 던지고, 면접보러 온 학생들을 격려하는 것까지 일사천리였다. 두 시간이 넘는 면접이 끝나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다며 수줍게 웃던 아이들 곁에서 퇴근 시간이 지난 것은 까맣게 잊고 덩달아 웃음지었다.
학생회는 종종 회의를 한다. 한 달에 한 번은 꼭 학생회 행사가 있으니 행사 계획도 수립하고 준비도 하려면 동아리 시간만으로는 부족하다. 의외로 아이들이 선호하는 회의 시간은 아침 8시다. 방과후에는 다들 학원에 가야 해서 바쁘니 회의는 아침에 하겠다는 것이다. 학생회 회의가 있는 날에는 출근 시간도 8시가 되었다.
주마다 1~2회 모여 회의를 하며 교사가 말하지 않아도 연간 계획을 꼼꼼하게 세우는 아이들이었다. 3월부터 12월까지 하고 싶은 행사들로 촘촘히 채워넣으며 예산까지 계획을 세워두었다. 수많은 행사 중에서도 3월 초에 당장 타임캡슐 행사를 진행한다던 아이들은 8시부터 40분 넘게 회의를 하고, 아침 조회시간에 교실마다 한 명씩 가서 공지를 한다는 계획까지 꼼꼼하게 세우는 아이들이었다.
학급 순회 공지가 있는 날에는 담임선생님들께 미리 메시지를 보내고, 순회하기 전 마지막 점검 회의에 함께 하며 혹시나 배고플까 아침 간식을 챙기고 순회 공지를 하는 아이들을 교실 문 밖에서 지켜보았다. 문득, ‘이래서 비담임해야 한다고 하셨구나.’ 생각이 들었다. 아이들이 스스로 하고자 하는 것들을 온전히 지지해줄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주려면 교사에게도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띠리링!’ 토요일 오후, 청명하게 울리는 메시지 알림에 휴대폰을 보니, 아이들이 행사 계획서를 확인해달라고 한다. 연간 계획을 세우고 얼마 지나지 않았는데, 행사부와 총무부가 작성했다는 행사 계획서가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세운 연간 계획을 결재받고, 품의를 올려야지 생각만 해왔는데 말이다. 아이들 나름대로 행사 목적, 추진 방침, 세부 추진 계획, 예산 계획까지… 멋진 소제목 아래 고심한 흔적이 엿보이는 내용이 참 알차고 나무랄 데 없었다. 특히 예산 계획에서 상자 2,980원, 편지지 8,990원처럼 10원 단위까지 꼼꼼히 적은 게 아이들다웠다. 어쩜 이렇게 예쁜 아이들을 만났을까. 주말에 오는 연락이 이렇게 기쁠 줄이야.
출근해서는 부장님께 아이들이 작성한 행사 계획서를 검토받고 약간의 수정을 거쳐 품의를 올린다. 물론 아이들이 작성한 행사 계획서도 붙임 파일로 올린다. ‘작성자: 학생회 아리솔’을 꼭 넣어서. 품의를 올리고 나면 단톡방이 바쁘다. 홍보부 아이들이 직접 제작한 포스터가 올라오고, 학생회장이 작성한 학급 공지 대본이 올라오고, 누가 몇 반에 들어가서 공지할지 결정하는 사다리 타기도 올라온다. 아이들이 바쁜 단톡방이 낯설고 설렌다.
시험 준비 기간이 아니라면 대체로 7교시 학급 회의 후 곧바로 대의원회의 혹은 학교장간담회가 열린다. 보통 2가지 정도 되는 회의 주제를 가지고 학급 회의에서 논의하고, 회의록을 직접 들고 대의원회의에 모인다. 40여 명이 모이면 학생회장단 3명이 단상에 올라가 인원을 체크하고 대의원회의의 개회를 알리고, 한편에서는 서기부 아이들이 회의록을 작성한다.
대의원회의의 중요한 기능은 ‘모든 아이들이 말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각 학급 회장이 학급 회의 결과를 발표하게 한다. 나름 엄숙하고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로, 학급에서 나온 의견을 꼼꼼하게 살펴보고 차례가 돌아오면 마이크를 잡고 발언하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학급 회장으로서의 자부심이 느껴진다. 형식적인 시간일 수 있지만, 대의원회의를 통해 학급회장으로서 소속감을 갖게 되고 각종 학교폭력예방 캠페인 등에 학급회장으로서 참여하는 계기가 된다.
대의원회의가 끝나면 학생회장이 회의 결과를 정리하고 아침 조회시간 전교생을 대상으로 방송으로 회의 결과를 공지한다. 대본까지 말끔하게 작성해 오면, 결재를 받고 날짜를 정해 방송실로 향한다. 떨리는 목소리지만 준비한 대로 꼼꼼하게 발표하는 회장의 뒤에서 조용히 응원을 보낸다.
매 회의 때마다 건의사항은 꾸준히 생겨난다. 소소하게 당장 해결할 수 있는 것도 있지만, 학교의 가용 예산을 찾아 해결해야 하는 것도 있다. 올해에는 학급 구급함을 비치하기 위해 보건선생님과 협력하기도 하고, 분실물 보관함을 구입하기 위해 온라인몰에서 온갖 종류의 수납장을 찾아보기도 했다. 물건을 찾고, 품의를 올리고, 제작과 배송을 기다리는 장장 한 달의 시간이 지나 분실물 보관함이 도착했다.
몇 달이 지난 지금, 우리 학교 분실물 보관함에는 물건을 잃어버린 사람이 쓴 ‘분홍색 물병 찾아요.’라는 메모가 생기기도 하고, 장난꾸러기 학생이 쓴 ‘내 사랑’이라는 분실물 메모가 남겨지기도 한다. 애타게 찾던 물건을 찾은 학생은 ‘감사합니다♥’라고 마음을 표시하기도 한다. 괜시리 한 번쯤 지나가고 싶은 곳이 되었다. 조용했던 교무실 문 앞이 이따금 발랄한 학생들의 목소리로 채워지는 이유는 분실물 보관함 때문일 것이다.
건의사항은 학교를 바꾼다. 건의사항을 제안하는 학생이 학교를 바꾸는 원동력이 된다. 학생이 학교를 움직이는 힘을 갖게 되려면, 무엇보다 학교가 학생의 목소리를 귀기울여 들어야 할 것이다. 학생이 목소리를 냈을 때 들어주는 곳이어야만 학생들은 꾸준히 말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학생 자치를 맡은 첫해다. 학생 자치의 가장 큰 일 중 하나는 선거라고 들었다. 아직 선거는 경험해보지 못한 학생 자치 업무의 햇병아리지만, 올해도 열정이 넘치는 좋은 아이들이 후보로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누군가를 떠올려서가 아니라, 우리 학생들이 매년 학생회의 다양한 행사와 진행 과정을 보고 들으며 ‘경험’ 했기 때문이다.
올해 만난 아이들은 이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자연스럽게 느끼고 있다. 경험을 통해 배운 아이들이 가는 방향에 교사도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나의 시선에서 건널 수 없어 보이는 웅덩이가 아이들의 눈에는 멀리 뛰어 쉽게 넘어갈 수 있는 곳으로 보이기도 하고, 아이들의 시선에서 벽처럼 막혀 보이지만 나의 눈에는 문처럼 보이기도 한다. 서로의 시선에서 배울 점이 있다는 것이 교학상장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무엇보다 경험은 돈으로 살 수 없다고 하지 않던가. 아이들이 학교생활을 하며 열정적인 학생 자치를 보고 들으며 모델링하게 되었다면, 그래서 학생 스스로의 힘으로 학교를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면 어떨까? 선배들이 또는 친구들이 보여준 열정을 저절로 닮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내년이 되면 또 말하게 될 것이다.
“선생님, 기안해 주세요.”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