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고운(영등포여자고등학교, 교사)
어렸을 적 나는 남해의 한 섬에 살았다. 조선업으로 유명한 그 섬에는 조선소 직원들을 위한 작은 영화관이 있었고, 당시 초등학생이던 나는 천 원을 내면 영화 한 편을 볼 수 있었다. 영화관은 대부분 텅텅 비어 있었기에 그때는 그곳이 인기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헤아려보니 초등학생이 학교를 마치고 영화관에 갈 시간은 직장인들이 한참 노동하고 있을 시간이다.
그 작고 허름한 영화관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꽉 찬 날이 있었다. 내가 살던 섬마을에는 영화의 유행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겨우 필름이 들어왔는데, 그래서 우리가 보는 영화는 늘 뒷북이었지만 제임스카메론의 영화 <타이타닉>만큼은 인기가 어마어마했다. 당시 6학년이던 나는 우리집에 놀러 온 사촌들과 영화관의 맨 뒷자리에 옹기종기 앉아서 영화를숨죽이며 보았다.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윈슬렛의 숨막히는 연기에 침을 꼴깍 삼키며, 타이타닉 호의 압도적인 화려함에 혀를 내두르며, 침몰전후의 거대한 슬픔과 숭고함에 가슴이 먹먹해지며.그렇게 사촌들과 다 같이 울고 웃으며 영화를 본 후영화 속 명장면들을 흉내내면서 시끌벅적하게 집으로 돌아왔다. 영화란 재밌는 거구나, 다 같이 숨죽여서 보는 거구나, 같은 장면에서 웃고 긴장하고 슬퍼하며 함께 즐기는 거구나. 그때 처음으로 느꼈다.
지금은 주로 혼자서 영화를 본다. 지난 8월에 출간된 김혜리 기자의 영화산문집 『묘사하는 마음』의 첫 장을 열면 인쇄된 저자 사인이 있고, 거기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통로 쪽 좌석에서 혼자 영화를 보는 당신에게.’ 김혜리는 20년 넘게 <씨네 21>이라는 영화 잡지에서 글을 써온 영화 전문 기자이다. 나는 영화산문집 『나를 보는 당신을 바라보았다』(2017, 어크로스)라는 책을 통해 김혜리 기자의 책을 처음 읽었고, 그 후 <김혜리의 필름클럽>이라는 영화 팟캐스트를 5년째 꾸준히 듣고 있다. 그는 긴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이야기를 들어온 전문가답게 상대방을 편하게 대하고, 사려 깊은 질문을 던지며, 적절한 맞장구와 제스처로 대화의 밀도를 높이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편안하고 지적인 목소리와 영화에 대한 전문적이고 해박한 지식, 청취자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방송에 묻어나온다. 영화를 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혹은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 이어폰을 끼고 팟캐스트를 들을 때면 다시 눈앞에서 영화가 재생되는 것만 같다. 함께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최다은 PD가 들려주는 영화 음악 이야기도 너무나 놀랍고, 임수정 배우와 셋이 나누는 영화 수다 또한 무척 재미있어서 그 팟캐스트를 듣다 보면 나 혼자 영화를 보았지만 어느새 혼자가 아닌 게 된다.
그런 김혜리 기자가 5년 만에 영화에 대한 글을 엮어 책을 냈다. 『묘사하는 마음』이라 이름 붙인 이 책은 모두 일곱 개의 장으로 나누어져 있는 400페이지 가량의 두툼한 책이다. 책등만 보아도 배부른 책이라고나 할까. 첫 번째 장은 김혜리가 사랑하는 배우들(이자벨 위페르, 베네딕트 컴버배치, 톰 크루즈, 폴 러드, 틸다 스윈튼 – 상상만 해도 가슴 뛰는 이름들)에 바치는 헌사이고, 두 번째 장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영화에 대한 짧지만 깊은 단상으로 채워졌다. ‘각성하는 영화’, ‘욕망하는 영화’, ‘근심하는 영화’, ‘액션과 운동’, ‘시간의 조형’, ‘팽창하는 유니버스’라는 제목으로 지난 몇 년 동안 개봉한 영화에 대해 쓴 글을 주제나 메시지에 맞도록 배치하고 묶어내었다. 저예산 독립영화부터 할리우드 액션영화까지 그가 쓰는 영화평은 장르를 넘나든다. 목차를 열어 영화평에 붙인 제목들만 스윽 읽어보아도 벌써 가슴이 두근대는데, 주간지에서 오래 기사를 써오면서 탁월한 제목을 붙이는 그의 능력이 이제 최고치에 이른 것 같다. 혹시나 글을 쓰면서 제목을 짓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다면 이 책의 매력적인 제목들을 보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물론 좋은 제목은 그 영화에 대해 오래 고민한 사람만이 내놓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묘사하는 마음』의 서문에는 이런 문장이 있다. ‘영화에 이목구비가 있다면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은 그 초상을 그려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내게 해석은 묘사의 길을 걷다 보면 종종 예기치 못하게 마주치는 전망 좋은 언덕과 같았다.’(11쪽) 이 문장을 보며 나는 알았다. 해석은 묘사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나의 관점으로 어떤 대상을 평가하기 전에, 먼저 세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묘사를 모르고 살아간다. 대상을 혹은 상대방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려 하지 않고 ‘나’라는 사람의 눈으로 세상과 타인을 판단하기 바쁘다. 영화를 보듯이 학생을 바라본다면 어떨까. 학생을 판단하려 하지 말고 묘사하듯 그릴 때 우리의 관계는 얼마나 달라질까.
400페이지에 육박하는 이 책은 영화에 대한 묘사로 가득하다. 이미 본 영화에 대한 평은 영화를 다시 보는 듯한 느낌을 주고, 아직 못 본 영화에 대한 평은 얼른 영화를 보고 싶게 만든다. 같이 나누고 싶은 글이 무척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짐 자무쉬 감독의 <패터슨>을 묘사한 글을 소개하고 싶다. 글의 제목은 ‘일상의 운율’. 먼저 김혜리 기자는 영화를 소개하기 위해 아래와 같이 글을 시작한다. ‘미국 뉴저지 패터슨 시에 사는 노선버스 기사 패터슨의 일상은 대다수 노동하는 사람들이 그러하듯 대동소이하다. 다만 그는 시를 쓴다.
패터슨은 매일 아침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자명종 없이 일어나 잠들어 있는 사랑하는 아내 로라의 어깨에 입 맞추고 간밤에 미리 꺼내둔 옷을 입고 걸어서 출근한다. 차고지까지 걷는 동안 머릿속에 떠올린 시상을 차계부에 관리하는 동료가 올 때까지 운전석에서 끄적거린다. 23번 버스를 모는 동안 귀에 흘러드는 승객의 대화와 거리 풍경이 그의 마음에 언어로 쌓이고 점심시간이면 폭포 앞에서 도시락을 먹으며 시를 쓴다.’(258쪽) 언젠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김혜리의 글을 보며 자신이 쓰고 싶은글을 쓰는 사람이라고 말한 적 있다. 그만큼 김혜리의 문장은 간결하면서 정확하고 그 안에 핵심을 짚고 있으면서 동시에 독자가 상상하게 만든다. 영화 <패터슨>의 줄거리를 소개하는 이 간단한 문장 안에서도 나는 문장과 영화의 아름다움을 함께 발견한다.
‘버스 기사 패터슨의 별일 없는 일주일’로 요약할 수 있는 이 영화는 우리에게 새로운 아름다움을 준다. 대단한 사건이 일어나지 않더라도 우리의 일상은 작은 사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매일 성실하게 살아가는 일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려 준다. 나는 <패터슨>을 보면서 나의 하루를 떠올려 보았다. 매일 6시에서 6시 반 사이에 일어나 아침을 간단히 먹고 씻은 후 씩씩하게 학교로 걸어간다. 교무실 책상에 잠시 앉았다 아침 조회를 하고, 1교시부터 7교시까지 그날의 시간표에 따라 수업을 한다. 공강 시간에는 다음 수업 준비를 하거나 수행평가 채점을 하거나 업무 처리를 하다가 옆자리 동료의 밥 먹자는 이야기에 후다닥 급식실로 내려간다. 교정을 한 바퀴 산책하고 다시 오후 수업. 종례를 하고 아이들을 보내고 청소 지도를 하고 다시 교무실 자리에 앉으면 4시 10분에서 15분 사이. 남아서 일을 할지 집으로 갈지 잠시 고민하다 가방을 챙겨서 퇴근을 한다. 퇴근길 나의 가방에는 언제나 책이 한 권 들어 있다. 그 책을 들고 공원을 지나 큰 나무가 보이는, 좋아하는 카페로 간다. 테라스 자리에 앉아 커피를 한 잔 시켜두고 경건하게 책과 커피 사진을 한 장 찍은 후 조심스레 책의 세계로 들어간다. 그 세계 속에 잠시 살다 나온다. 일기장에 지금 이 순간의 기분을 조금 끄적이다 다시 집으로 향하는 발걸음. 그런 나의 하루가 <패터슨>을 보고 나니 일종의 영화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교사들이 비슷한 삶을 살 것이다. 교사라는 직업은 반복의 연속이므로. 우리는 매일, 매주, 매달, 매 학기, 매년 같은 삶을 산다. 물론 그렇다고 사는 일이 쉽지는 않다. 가르치는 아이들, 함께하는 동료가 달라지고 교육과정과 학교 문화도 계속 바뀐다. 매년 ‘작년에도 이렇게 힘들었나? 그 전에도 이렇게 괴로웠나?’ 자문한다. 같은 수업을 하는데도 결과는 예전 같지 않고, 3월과 12월은 여전히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매년 같은 일을 반복하기에, 삶은 지루하다. 그런 지루한 삶의 가운데서 영화 <패터슨>은 ‘일상의 운율’이라는 아름다움을 내게 선물해줬고, 김혜리 기자의 글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패터슨은 자기를 둘러싼 환경과 이웃 사람들에게 예술의 재료와 형상화의 영감을 구한다.’(263쪽) 나는 항상 더 먼 곳, 더 낯선 것을 추구했다. 교사로 살면서도 이 교직 사회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지 궁금했고, 학교로부터 떠나고 싶기도 했다. 뭔가 더 좋은 것, 더 새로운 것을 찾고 싶었다. 그렇지만 내가 있을 곳은 바로 여기, 학교였다. 학교에서 마주하는 아이들의 눈빛과 표정, 교실 안의 침묵과 활기, 운동장 곳곳에서 들리는 웃음소리. 그 풍경이야말로 나의 도시. 패터슨 시(市)에 사는 패터슨의 시(詩)와 같이, 나의 일상은 학교라는 공간과 떼려야 뗄 수 없다는 것을 영화 <패터슨>을 보며, 김혜리의 영화평을 읽으며 다시 깨닫는다.
학생들과 책 읽기 수업을 할 때 책을 두 번 읽으라고 권한다. 책을 한 번 읽을 때와 두 번 읽을 때는 완전히 다른 경험을 할 수 있다고. 영화도 마찬가지이지만 같은 영화를 두 번 보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나는 김혜리 기자의 책을 읽으며 영화를 두 번 보는 경험을 한다. 그 두 번째 경험이 첫 번째 경험보다 황홀할 때가 많다. 마치 어린 시절 <타이타닉>을 보고 나오면서 언니 오빠들과 영화 이야기를 나눌 때 더 즐거웠던 것처럼. 김혜리의 『묘사하는 마음』은 영화에 대한 책이지만, 삶에 대한 책이기도 하고, 또 삶을 대하는 태도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김혜리는 이 책의 출간 기념으로 열린 강연에서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더 사랑한다고 말한 적 있다.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더 나은 삶, 더 좋은 사회를 꿈꾸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 사람들이 모여있는 시공간을 더 사랑할 수밖에 없다고 말이다. 고개를 끄덕이며 그 얘길 들었고, 영화가 내게 준 것들을 떠올려 보았다. 영화를 통해 나라는 존재가 미세하게 달라지는 경험을 했고, 영화를 보면서 더 잘 살고 싶어졌다.
김혜리는 말한다. ‘언제나 영화가 있었다. 어제까지 그만 써야 할 100가지 이유를 만지작거렸던 자신을 까맣게 잊고 흥분해서 키보드 앞에 앉게 부추겼던 영화들이.’(10쪽) 무언가를 열렬하게 좋아하고 말하고 싶어서 안절부절 못하는 사람들은 자기가 본 것을 더 잘 설명하고 더 잘 전달하기 위해 끙끙 애를 쓴다. 『묘사하는 마음』은 김혜리가 그렇게날마다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고 그걸 어떻게든 나누고 싶어서 자신 안에 있는 최고의 것들을 정리하여 꺼내 놓은 결과물이다. 이 아름다운 책을 당신도읽게 되길 간절히 바란다. 그리고 앞으로도 나는 그가 열어주는 영화의 무궁무진한 세계를 함께 걸어갈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