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2018 봄호 (230호)

장애가 있는 아이든 없는 아이든

1. 책과 이 세상의 장애아를 연결하는 고리

특수학교에서, 그것도 심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에게 책을 읽어주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고민하던 무렵, 영화 《로렌조 오일》(1992)의 한 장면이 내 가슴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희귀병에 걸려 산소 호흡기를 한 로렌조가 침대에 누워있고 간호사는 그 곁에서 지극히 사무적이고 성의 없는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고 있다. 그 모습을 본 엄마가 간호사를 쫓아내고 나서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목소리를 간신히 가다듬으며 책을 읽기 시작하는데 엄마가 읽어주는 이야기는 ‘헨젤과 그레텔’의 한 대목이다. 어린 남매가 숲속에서 길을 잃고 막막해 하면서 깊은 숲속으로 나아간다는 내용이었다. 엄마가 읽어가는 문장들은 로렌조의 지금 처지 같기도 하고 또 그 아들을 지켜보는 엄마의 처지 같기도 했다.
영화의 후반부에는 로렌조가 눈을 깜빡여서 엄마가 읽어주는 책이 유치하고 지루하다는 표현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무 반응이 없던 로렌조에게 몇 년 동안 똑같은 책을 읽고 또 읽어주는 누군가가 없었다면 로렌조가 눈을 깜빡일 일도 없었을 것이다. 비슷한 이야기를 《쿠슐라와 그림책 이야기》의 저자, 도로시 버틀러도 강조한다. 도로시 버틀러는 책의 후기에서 ‘글자와 그림이, 이유가 무엇이든, 이 세계와 단절된 한 아이에게 무엇을 주는지 알고 있으며 아이에게 맞는 책을 보여 줄 사람이 있어야만 책이 아이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도 안다.’고 얘기한다. 이어서 ‘책과 이 세상의 장애아를 연결하는 고리가 더 늘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이야기하는데, 나는 그 수많은 고리들 중에서 상당수는 우리 교사들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 글자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지난 해 내가 가르쳤던 우리 반 학생들은 모두 다섯 명인데 글을 소리 내어 읽을 수 있는 학생은 없었다. 그래도 책을 읽어주는 일은 꾸준히 했다. 일주일에 다섯 시간씩 있는 국어 시간에는 교과서에 나오는 그림책들을 같이 보고 또 일주일에 한 시간씩은 그림책 한 권을 읽고 간단한 활동을 하거나 비슷한 주제의 그림책 두세 권을 읽어주기도 했다. 꼭 국어 시간이 아니어도 수학 시간에는 모양과 수를 다루는 그림책을 같이 보고 통합 교과 시간에도 주제와 관련한 그림책을 자주 다루었다.
특수학교에서는 교육과정 재구성이 필수적이어서 교과서 이외의 책을 교육과정 속으로 가져오는 일은 어렵지 않다. 기본교육과정에 따르는 교과서가 있기는 하지만 일반학교에서 하는 것처럼 진도를 꼭 나가야 한다거나 교과서에서 시험문제를 출제하는 것은 아니므로 교육과정에 따라 설정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적당한 그림책이나 동시, 옛이야기를 가져오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실제로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책을 만나게 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학교에 책이 별로 없다. 학교알리미로 잠깐만 검색을 해 보아도 특수학교 중에서 장서수가 만 권이 넘는 학교는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 이렇게 학교알리미로 검색할 수 있게 된 것도 2017년부터이다. 그 전에는 특수학교 도서관은 아예 조사 대상이 아니었다.
지금은 그런 일이 없지만 예전에는 도서 구입이 예산 순위에서 밀리기도 했다. 간신히 책을 구입해 놓아도 여러 권을 한꺼번에 사 놓는 경우가 거의 없으니 도서관에 갔다가 필요한 책을 못 찾고 허탕을 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아쉬운 마음에 한두 권씩 사서 모은 그림책이 제법 되어서 수업 시간에 언제든지 원하는 책을 꺼내서 읽어줄 수 있다.
이번에 꺼내든 책은 《꼬리야, 넌 뭘 했니?》이다. 얼핏 옛날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트럭이 나오는 걸로 봐서는 요즘 이야기 같기도 하고 여우가 나오는 걸 보면 또 옛날이야기 같기도 하다. 책장을 한 장씩 넘겨 가며 그림 속의 여우랑 개도 찾아보고 여우가 얘기하는 눈, 코, 주둥이, 귀도 찾아가며 책을 읽어주었다.

여우가 살코기를 보았어.
아저씨 차에 커다란 살코기가 있었거든.

여우가 살코기를 물고 달아났어.
아저씨가 개한테 주려고 샀는데 말이야.

개가 쫓아갔어.
여우가 살코기를 물고 달아나니까.

여우는 산으로 도망갔어.
개가 자꾸만 쫓아왔거든.

짧은 문장이지만 한번 읽어주고 나서는 그림을 보며 다시 풀어서 이야기를 나눈다. ‘왜’라는 질문을 되풀이해서 던지기에 좋은 구조다.이렇게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두 번 세 번 되풀이하면 두세 아이는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그림책을 바라보기 시작한다. 이야기의 주인공이 여우와 개라는 것 정도는 알아차린 걸까? 워낙 과묵하고 움직임이 없는 아이들이라 답을 쉽게 얻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조금씩 이야기를 따라오는 것 같기는 하다. 다시 이야기를 읽어나간다.

여우가 바위틈으로 쏙 들어갔어.
이제 개가 물지 못하겠지?

아래로 축 처진 개의 눈과 바위틈 속에서 슬쩍 보이는 여우의 눈이 닮았다. 잠깐 책을 내려놓고 학생들의 눈꼬리를 슬쩍 잡아 내려서 비슷해 보이는지 말을 건넨다. 우리 반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이렇게 몸으로 뭔가를 해 볼 수 있는 책이 좋다. 꼬리를 얘기할 때는 슬쩍 엉덩이 쪽에 손을 밀어 넣어 꼬리가 있는지 확인해 보자고 한다. 누군가 움직여주지 않으면 하루 종일 휠체어에서 꼼짝 않고있기 쉬운 학생들이라 어떻게든 자극을 주려고 하는 편인데, 그 자극이 이야기와 연결이 되면 처음에는 잘 모르다가도 나중에는 어떤 말이 나를 이렇게 자극하는지 조금씩 배워갈 수 있다. 이제 본격적으로 학생들과 놀아볼 차례다.

여우가 기분이 좋아서 물었어.
코야, 넌 뭘 했니?
맛있는 살코기 냄새를 맡았지.

귀야, 넌 뭘 했니?
개가 쫓아오는 소릴 들었지.

주둥이야, 넌 뭘 했니?
살코기를 꽉 물고 있었지.

이렇게 눈이랑 앞발이랑 뒷발에게 물어보다가 드디어 꼬리에게도 묻는다.

그럼 꼬리야, 넌 뭘 했니?
개가 따라오라고 살랑살랑 흔들었지.

여우가 소리쳤어.
뭐라고? 이 바보 멍청아!

이 대목에서 잠깐 멈칫한다. 밖에 나가면 수도 없이 들을 말이지만 우리끼리는 절대 하지 않는 말이다. 아무리 배우는 게 느리고, 어쩌면 앞으로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바보 멍청이’ 같은 말은 하기도 싫고 듣기도 싫다고 생각했는데 이 이야기는 엉뚱하게 전개가 되어서 욕을 하고 쫓아낸 꼬리가 개에게 물려 꼬부라지고 말았다는 얘기로 끝이 난다. 우리에게 함부로 ‘바보 멍청이’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결국 호되게 아픈 일을 겪게 될 것이라고 대신 말해주는 것 같아 속이 좀 후련하다. ‘끝’하며 책을 탁 덮고 살코기 대신 맛있는 간식이라도 나누어 먹으면서 이야기 속 여우에게 묻는 것처럼 말을 건네 보는것도 재미있다.

그런데 여우야, 살코기 맛있니?
(그런데 00야, 그 과자 맛있니?)
응! 정말 정말 맛있어.

우리 반 학생들은 다들 구어로 말을 하는 것은 어려우니 스위치를 누르면 녹음된 음성이 나오는 장치를 사용하거나, 그것도 어려우면 교사 혼자 목소리를 조금씩 바꿔가며 말을 주고 받는다. 그러면 소리 내어 말하지는 못하더라도 정말 맛있을 때의 표정을 잠깐씩 보여주기도 한다.

3. 그림을 볼 수 없으면 만지고 들으면서

우리 반 다섯 명 중에 두 아이는 시력이 몹시 나쁘다. 정확하게 시력 측정을 해 보지는 않았지만 겨우 빛과 색깔을 구분하는 정도가 아닐까 짐작한다. 이 학생들에게 책을 읽어줄 때는 가끔 몇몇 장면에서 그림책을 아주 가까이 가져가서 보여주기도 하고, 함께 보려는 책이 촉각 그림책이라면 학생의 손을 잡고 같이 만져보기도 한다. 처음엔 이게 뭔가 하는 표정이지만 되풀이해서 읽어주고 나름 실감나게 읽어준다고 소리를 높였다 낮추기도 하고, 버럭 소리를 지르다가 속삭이듯 가만가만 읽어주기도 하면 학생들의 표정이 조금씩 달라지는 걸 지켜볼 수 있다. 평소 말하는 것과는 조금 다른 억양과 말투 속에 뭔가 숨어있다는 걸 눈치챈 거라고 짐작해 본다.
국제아동청소년도서협의회(IBBY)에서는 해마다 ‘IBBY 장애아동을 위한 좋은 책 목록’ 선정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이 프로젝트는 장애와 비장애를 넘어 전 세계의 모든 독자들에게 의미있는 책 경험을 제공함과 동시에 ‘모든 이를 위한 책(Books for Everyone)’의 출간과 보급을 장려하기 위해 2005년부터 2년마다 진행되고 있는 국제 프로젝트다. 선정된 책 목록은 도록으로 제작되어 전 세계 회원국에 보급되고 최종 선정작은 볼로냐 아동도서전에서 발표·전시되기도 한다.
IBBY는 장애아동을 위한 좋은 책의 세 범주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고 있다.

어린이책 관계자들도 책과 장애어린이를 연결하는 고리 역할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시작했다는 소식은 매우 반갑다. 이제 학교 현장에서도 그 노력을 더 적극적으로 이어가야 할 차례가 아닐까 싶다. 특히 [범주 1]과 [범주 3]의 경우는 특수교육 쪽에서 더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적용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나를 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책, 나와 꼭 닮은 누군가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책을 좋아하지
않기는 어려울테니 말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2015 개정 교육과정은 일면 한걸음 뒤로 물러선 것처럼 보인다. 이전 교육과정의 국어과 내용 체계에 포함되었던 문법과 문학이 빠진 것은 아무리 그 내용이 나머지 4개 영역에 포함되었다고는 하나 아쉬움으로 남는다. 게다가 2015 개정 기본교육과정의 큰 특징 중 하나가 통합교육을 지향하는 것이고 같은 이유로 초등학교 1-2학년군의 교과명을 공통교육과정에 맞춘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
기본교육과정의 국어과 교과서에 소개된 어린이책의 수가 훨씬 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문학 작품을, 또는 책 한 권을 온전히 즐길 수 있도록 하는 내용 체계를 따로 설정하지 않은 것은 ‘한 학기 한 권 읽기’로 독서 교육이 강조되는 일반학교의 국어교육과정의 흐름에서도 비켜나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게 한다.
특수교육에서 어린이문학이란 한글을 읽고 쓰게 하는 데 도움을 주는 보조 교재 정도로 여기는 것은 아닌가 싶은 것이다.
장애가 있는 아이든 없는 아이든, 그 장애가 아무리 심하더라도 책을 만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다. 글자를 모르면 모르는 대로, 앞을 보지 못하면 귀로 듣거나 손으로 만져보면서 이야기를 만나고, 그 이야기 속에 담긴 아름다움과 즐거움, 새로움을 발견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사진에는 담지 못했지만 사실 우리 반 학생 중에는 내가 책을 읽어줄 때마다 짜증내듯이 우는 학생이 있었다. 많은 학생들이 그림책을 언어치료실이나 인지 치료실에서 종종 접하는 그림 카드 정도로 여기기 때문에 처음에는 그저 공부가 하기 싫어 우는 것으로만 여겼다. 적당히 우는 소리를 그냥 들어 넘기기도 하고, 또 너무 크게 운다 싶으면 잠시 읽어주기를 멈추고 기다렸다가 다시 읽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사실은 이 학생이 그림책을 제법 좋아하는 학생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쉬는 시간에 자유롭게 놀도록 놔두면 이 학생은 종종 교실 뒤쪽에 있는 책꽂이로 가서 제 맘대로 그림책을 빼서 펼쳐보곤 했는데 처음에는 전부터 좋아하는 그림책만 꺼내놓더니 시간이 지날수록 다른 그림책도 꺼내놓기 시작했고, 신기하게도 그 책들은 대개 언젠가 내가 교실에서 한 두 번 쯤 읽어준 그림책들이었다. 아직 손을 자유롭게 사용하지는 못해서 책장을 한 장씩 넘기지 못해 두 세번 만에 금세 책 한권이 덮였지만 그럴 때마다 뒤집어서 다시 펼쳐보고, 펼쳐놓은 그림책을 옆으로 위로 돌려보기도 하면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즐겁게 감상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 학생의 부모님께 학생이 책을 좋아하는 것 같으니 가까운 어린이 도서관에 놀러 가는 것도 좋겠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아이가 책을 거칠게 다루기도 하고 가끔은 침을 흘리기도 해서 공공도서관을 이용하려면 아무래도 눈치가 보인다고 했다. 이 학생과 가족들이 눈치보지 않고 마음껏 책을 만지고 넘길 수 있는, ‘책을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규칙은 당분간 멀찍이 치워둘 수 있는 공간이 꼭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특수학교 도서관 예산은 지금보다 훨씬 많아야 하고 시설과 여건도 지금보다 훨씬 더 좋아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