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현장2024 여름호(255호)

[체험·문화·예술활동 Ⅱ]
나를 발견하게 하고, 나를 표현하게 하는
“예술교육” – 고등학교 협력종합예술활동

권미혜 (경인고등학교, 교사)

코 끝이 시릴 만큼 추위가 기승을 부린 12월의 어느 날, 춘추복을 입은 학생들이 추위도 잊은 채 운동장에 모여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다. 카메라를 들고 있는 학생이 분주히 움직이고 있고, 감독인 듯한 학생이 30여 명의 학생들을 지휘하고 있는 것을 보니 영화제 준비에 한창인 연극·영화 수업인 듯하다. 학생들은 감독의 신호에 맞춰 율동을 시작했고, 촬영 담당 학생은 이 장면을 화면에 담기 위해 분주히 움직였다. 담당 선생님들은 그들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촬영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지도하시느라 여념이 없다. 근처를 지나던 선생님들도 가던 길을 멈추고 구경할 만큼 그들의 움직임은 일사불란했다.

경인고등학교(이하 경인고)에서 이런 장면과 마주치는 것은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다. ‘연극·영화 수업은 우리 학교의 역사와 같다’고 여겨질 만큼 모두에게 친숙한 수업이기 때문이다. 창의적 체험 활동 수업 시간에 운영하는 연극·영화 수업은 우리 학교의 특색 사업으로, 재학 중 최소 1개 학기 이상의 예술 교육을 교육과정에 편성하여 모두를 위한 보편교육으로서 학교예술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2023학년도까지는 2학년에만 편성되어 있던 연극·영화 수업을 2024학년도에는 확대 편성하여 1학년은 연극을, 2학년은 뮤지컬 수업을 학기제로 운영한다.

“일반고에서 연극과 영화와 같은 예술 수업을 운영할 수 있나요?”라는 다른 학교 선생님의 질문을 받곤 한다. 해당 과목을 가르칠 수 있는 선생님이 많지 않고, 수업을 운영하기 위한 예산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는 중등 협력종합예술활동을 신청하여 예술 강사(영화/뮤지컬)를 지원받고, 고교학점제 준비학교(일반고 교육 역량 강화)의 학생 맞춤형 교육과정 강사비를 신청하여 연극 담당 교사를 직접 채용하는 방식으로 큰 어려움 없이 예술 수업을 운영하고 있다.

학생들은 연극과 영화 중 본인이 배우고 싶은 과목을 선택하여 기본 이론과 실기를 배우는데, 평소 소극적으로 교과 수업에 참여하던 학생들도 연극·영화 수업만큼은 적극적으로 참여할 정도로 수업 내용이 재미있다.

연극・영화 선생님은 학생의 반응과 움직임을 관찰하여 학생의 장점을 끌어낼 수 있는 수업을 구현하기 위한 다양한 방법을 모색한다. 수년 동안 수업을 운영하신 연극·영화 선생님들은 학생들의 심미적 감성 역량을 강화하고 흥미와 관심을 유발하는 지도안을 개발·적용하고 있다. 즉흥 연기나 영상 편집 프로그램 사용법을 배우는 것은 학생들의 창의적 사고 역량 함양에 도움이 되고, 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수업이나 즉흥 연기를 통해 본인의 생각이나 느낌을 자유롭게 표현하는 방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내 인생의 영화, 경인고 작은 영화제

“선생님, 우리 반 영화는 몇 번째로 상영해요?”
“인기투표 상품은 간식이라고 했지? 아, 간식 받고 싶다.”
“보나 마나 우리 반이 인기투표 1등 할 걸?”

영화제 상영을 기다리고 있는 2학년 8반은 영화제에 대한 학생들의 대화와 웃음소리로 매우 소란스러웠다. 조용히 시청하자는 말을 하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영화제가 1년 동안 열심히 수업에 참여한 학생들을 위한 작은 축제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8반 영화가 나오기 전까진 학생들이 지루해하거나 영화제에 집중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다른 반 친구가 나오는 영화를 보며 소리내어 응원하고, 영화 내용이나 구성에 대한 평가도 하며 적극적으로 시청하는 것을 보니 나의 예상이 완전히 빗나갔음을 알 수 있었다.

내가 가르치는 학생이 화면에 등장하자 나도 학생들처럼 신나게 웃으며 즐거워하기 시작했다. 수줍게 앉아 수업에만 집중하던 학생이 댄스 실력을 맘껏 발휘하는 장면이 나왔다. 수업 때 졸린 눈을 비벼가며 쏟아지는 잠을 억지로 참던 학생이 매우 진지하게 연기에 집중하는 장면도 나왔다. 수업 시간에 볼 수 없었던 학생들의 숨은 끼를 발견하는 것은 영화제가 주는 커다란 즐거움이었다. 경인고 작은 영화제는 연극·영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에 주저하지 않고, 배려와 경청을 바탕으로 나를 표현하게 하는예술교육을 자연스럽게 배우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와 같은 영화제의 긍정적인 효과는 코로나19로 인한 원격 수업 병행 시기에 더욱 빛을 발하였다. 2021년 겨울, 우리 학교는 사회적 거리 두기로 인한 합창제 개최 장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택트(Ontact) 합창제’ 를 준비하였다. 학급별로 합창 뮤직비디오를 제작하여 공개하는 형식의 합창제로, 연극·영화 선생님과 음악 선생님의 협업으로 이루어졌다. 교실에서 얼굴을 맞댈 시간조차 부족한 학생들이 합창 연습을 하고 영상을 제작하는 것은 생각보다 힘든 과정이었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양한 아이디어가 제시되었고, 기대 이상의 멋진 결과물을 얻을 수 있었다. 같은 반이었지만 학기 내내 서먹한 관계였던 학생들이 합창제 이후에 사이좋게 지낼 정도로 합창제가 학급 단합 및 분위기 형성에 많은 도움이 된 것은 의심할 나위가 없다고 생각한다.

연기자를 꿈꾸는 그대들이여, 경인으로 오라

“혹시 좌석 번호를 잘못 알고 있으신 것 아닌가요? 여기 제 자리입니다.”
“아닙니다. 제 영화표를 보면 제 자리가 맞습니다.”
“그럴 리가 없어요. 잘못 보신 것 같은 데 비켜주시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거점학교 연극 실기반을 지원한 학생들의 면접이 있는 날이다. 의자에 앉아있는 상대 배우를 일어나게 하는 즉흥 연기 중인데, 면접 위원석에 근엄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나는 실제 상황처럼 진지하게 연기하는 학생들의 모습에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슬쩍 보니 면접에 함께 참여하신 연극 실기 담당 선생님도 웃음을 참고 계셨다. 업무 담당자로서 2년째 면접위원으로 참여하고 있지만, 오늘 면접은 3월의 신학기 스트레스를 모두 날릴 정도로 재밌고 감동적이었다. 꿈을 향한 학생들의 강한 의지와 넘치는 에너지가 내게도 전달되는 것 같았고, 연기에 진심인 그들이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우리 학교의 예술 교육 활동은 창의적 체험 활동 시간의 연극·영화 수업에 그치지 않는다. 서울특별시에서 공동교육과정 거점학교 예술 분야(연기)를 운영하는 유일한 일반고로, 서울 전역의 학생들이 모여 연기기초와 연극 실기를 배우고 있다. 수업을 위해 수요일 방과후와 토요일 오전에 우리 학교로 등교하는 학생들은 왕복 2~3시간의 통학 시간이 아깝지 않을 만큼 수업이 재미있다고 말한다. 특히 ‘입시만을 위한 수업’ 이 아니라 ‘진짜 연기 수업’이라며 입을 모아 칭찬하는 점이 인상적이었다. ‘진짜 연기 수업’이 무엇인지 잘와닿지 않았던 나는 거점학교 수업 전에 잠깐 학생을 인터뷰하였다. 대학 입시를 위한 틀에 박힌 내용의 수업이 아니라 개개인의 능력을 맘껏 발휘할 수 있는 수업으로 구성되어 있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학생들의특징과 장단점을 모두 파악하고 있는 점이 놀라울 정도라고 했다. 선생님의 날카로운 피드백을 통해 부족한점을 스스로 깨닫고 고쳐나갈 수 있는 수업이기에 ‘진짜’라는 단어를 썼다고 답하는 것을 듣고 괜히 나까지뿌듯해졌다.

학생들에게 거점학교 연기 수업의 가장 큰 매력을 물으면 열에 아홉은 연극 공연을 꼽는다. 전문적인 연기자가 아닌 학생의 신분으로 대학로 소극장 무대 위에 서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학생들은 회의를 통해 원작을 각색한 대본을 작성하고, 본인이 원하는 배역을 맡기 위한 오디션을 준비하며, 공연을 위한 무대를 직접 설치하고 필요한 소품도 준비한다. 대부분의 시간을 공연 준비에 쏟아야 할 만큼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불평하거나 포기하는 학생이 없다는 것을 보면 연기에 대한 그들의 열정이 얼마나 뜨거운지 알 수 있다.

2024년 4월 1일, 1학년 교실의 칠판 한 켠에 선생님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만우절 장난이라고 하기엔 재미있고 귀엽기까지 한 학생의 작품이었다. 연극 선생님의 얼굴도 있었는데, 선생님의 특징을 너무 잘 살려 그린 터라 누가 보더라도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일주일에 한 번뿐인 수업이지만 학생과 선생님이 가까운 사이가 된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예술교육에서 교사와 학생의 라포르(Rappot) 형성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리 학교의 예술교육을 5년째 지켜보면서 예술교육의 필요성을 조금씩 깨닫고 있다. ‘학교 예술교육은 학생 모두가 예술가가 되기 위한 교육’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무지함도 조금씩 지워가면서 말이다. 우리 학교 예술교육의 목표는 수업을 통해 학생들이 숨은 끼를 자연스럽게 표현하고, 그 과정에서 타인과 소통하는 방법을 배우는 데 있다. 여러 가지 활동과 결과물을 통해 이 목표가 잘 실현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업 시간에 학생들이 ‘나’에 대해 고민하고 ‘나’를 표현하는 기회를 가지는 것만으로도 예술교육은 큰 의미가 있음을 느끼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