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2020 봄호 (238호)

하마터면 놓칠 뻔한 아이들

김태은 (한국교육과정평가원, 교수학습연구실장)

최근에 영화 ‘천문’을 봤다. 세종대왕이 문자는 권력 이라며 백성들을 위해 글자 만드는 것을 반대하는 사대부들을 향해 꾸짖는 대사가 있다.
“전하, 태생이 천한 것들은 믿을 것이 못되옵니다. 그것이 천성입니다.”
“천성이라고? 그렇다면 대신들이 가르쳐 교화시켜야 하지 않소? 가르치고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 그 위에서 군림하려고 벼슬하는 것이오!”
브라운관에 가득히 클로즈업된 세종대왕(한석규 분)의 얼굴이 뼛속 가득 진노한 감정을 담아내며 “가르치고 도와줄 생각은 하지 않고”라고 하는 대목에서 찔렸다. 움찔했다.
왜 찔렸을까? 두 가지의 이유가 차례로 떠오른다. 첫째, 나는 가르치고 도와주고 있나? 둘째, 나는 천성이라는 대신들의 불편한 표현에 대해 이를 반박할 철학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가?

가르치고 도와주고 있나?

‘가르치고 도와주고 있나?’는 질문에 ‘가르치고 도와주는 ‘일’을 하고 있다.’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런데 이 대답은 그 ‘일’이 누구를 향해 있는가? 일의 대상이 되는 학생들은 나의 일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의 질문으로 다시 파생된다.

① 가르치고 도와주는 일이 누구를 향해 있는가?

장면1 : 얼마 전 초등학교 5학년인 딸아이의 글쓰기 실력이 궁금해서 서점에 간 김에 논술 책을 하나 집어 들었다. 아이에게 권하니 처음 접해보는 책이 재미있었는지 열심히 한다. 잘하고 있다고 격려해주었다. 새롭게 시작한 학습에 아이도 흥미를 느끼는 듯 했다. 이런 방식으로 논술 실력을 키워주면 될 것 같았다.
장면2: 논술 책 뒷면을 보니 제시된 홈페이지 주소로 들어가 회원 가입을 하면 지도서를 준다고 적혀있다. 다운로드한 지도서에는 교재에 제시된 지문별로 연관된 신문기사와 사설들이 7~8편씩 들어 있었으며, 핵심 키워드를 콕콕 짚어주는 모범답안도 있다. 아주 좋다고 생각했다.


‘장면1’에서 내 손엔 지도서가 없었고, 모든 일은 아이의 상태를 먼저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하였다. 아이가 적어 놓은 글을 있는 그대로 보고 생각을 따라가는 것이 재미있었다. 이 장면에서 일의 대상은 분명 아이(학생)였다.
‘장면2’가 시작되자 내 손에 지도서가 생겼다. 지도서가 손에 들어오니 기준이 생겼고, 틀에 맞추기 시작했다. 손에 정답지가 들어오자 나는 지적이 늘었고, 아이는 회피했다. 결국 아이(학생)는 나와의 글쓰기 학습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을 가져버렸다. 하기 싫어지게 만드는 방법은 이리도 쉽다. 이 장면에서 일은 지도서를 향해 있었고 중요한 것은 진도를 빼는 것이 되었다.
가르침의 함정은 이렇듯 손에 ‘지도서’가 생긴 것에서 시작되곤 한다. 최근 몇 년 동안 학습부진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학생들을 만났던 첫 해에는 마음이 급했다.

· 기본 셈하기가 전혀 안 되어 있고, 글을 쓰기는 커녕 연필을 잡는 힘도 약해서 글씨를 그리고 있는 초등학교 3학년
· 손에 잡히는 모든 것을 총처럼 들 고 쏘는 흉내를 내며, 수업시간에 아무것도 안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초등학교 5학년
· 분수 계산이 안 되고(사실 구구단이 안 되는 것을 친구들이 알게될까 노심초사), 영어 단어를 읽지 못해서 좌절한 중학교 1학년

이 학생들에게 빠르게 무엇인가를 해주어야 할 것 같았다. 이러고 있으면 안 된다고 말해주었고, 무엇이든 시켜보려고 했다. 잘 차려주면 잘 먹겠다 싶어 서둘렀는데 학생들은 체했다. 학생들을 먼저 봤다고 생각했는데, 돌아보니 지도서를 먼저 보면서 내 기준으로 강요하고 있었다.
학생을 보는 것과 지도서를 보는 것은 둘 다 중요하고 균형감 있게 작동하는 것이 맞다. 그런데 학습부진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들여다보니 무조건 학생을 먼저 봐야하고 지도서를 버리는 것이 필요했다. 내가 갖고 있는 이러해야 한다는 기준이 학생들에게 두 번 상처를 주었다. 학습부진학생들은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교실 내에서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를 직감적으로 느끼고 있다. 그러니 더욱더 학생을 먼저 들여다보는 것이 맞았다.

② 학생들은 내가 가르치고 도와준다는 것을 느끼고 있는가?

학습부진학생들의 성장을 모니터링하면서 깨닫게 되는 또 하나는 가르치고 돕는 행위보다 학생이 받아들이고 느끼는 것에 집중하는 것이 중요했다는 점이다. 많은 학생들을 평균 수준에 맞춰 가르쳐야 하니 ‘나는 가르쳤어, 알아듣는 것은 네 몫이고.’가 되는 장면들이 어쩔 수 없이 발생되곤 한다. 그런데 혹시 ‘가르치는 척’이 되어버린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었다.
대분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 곁에 교사가 와서 여러 차례 설명을 해준다. 분명 교사는 학생에게 개별지도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이의 마음을 읽어보자.
‘선생님이 설명은 해주시는데 도무지 모르겠다.(선생님은 교과서에 그려진 그림을 여러 번 설명하셨지만, 사실 이 학생은 안 그래도 낯선 분수 앞에 왜 3을 붙여야하는지, 3이 자신이 알고 있는 더하고 뺄 수 있는 그 숫자인지를 모르고 있다.) 게다가 다른 모둠 친구들이 선생님을 부른다. 선생님이 이해됐는지 물으신다. 내가 대답을 못하자 또 다시 설명해주신다. 말씀하시는 속도가 빨라지셨다. 선생님을 친구들에게 빨리 보내드려야 할 것 같다.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학생들은 가르치는 사람의 마음이 급한 것을 바로 알아챈다. 인지적 기억보다 감정적 기억이 강한 이 학생들은 어떻게 해서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보다 내 앞에 있는 선생님께 미안한 마음이 더 크다. 선생님의 시간을 당당하게 요구하고, 더 설명해 달라고 요구하는 친화력 좋은 학습부진학생은 사실 그렇게 걱정할 대상이 아니기도 하다.
가르치기 전에 학생이 알고 있는 것을 말해보게 하는 것(3을 뭐라고 설명하는지, 3을 어떻게 이해하는지)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학생의 생각을 따라가 주기에 시간이 여의치 않고 손도 부족하다. 그런데 학습부진학생들이 배우는 방식은 이렇게 짚어주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으니,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하나 찾자면, 한 명의 학생이 새로운 내용을 이해하는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어디까지 아는지를 물어보고, 도움이 필요한 부분을 톡톡 건드려 주었더니 이해했다는 신호(가슴 중심부에서 솟아오르는 깊은 탄성 “아~”)를 보인다. 옆에 있던 다른 학생이 “선생님, 저도 도와주세요!” 그래! 배워보겠다는 분위기는 만들었다.
어떤 중학교에 갔더니 학생들이 영어 선생님이 좋다고 했다. 체육이 아닌 영어가 좋다는 것, 그것도 잘하고 못하고에 상관없이 모두가 영어 선생님이 좋다는 것이 신기해서 그 이유를 물으니 “영어 선생님은 정말 끝까지 가르쳐 주세요.”라고 한다. 끝까지 가르쳐 주는 것이 어떻게 하는 것인지를 물었다. “그러니까요, 수업시간에 대충 알겠다고 고개를 끄덕이면 가만히 눈을 들여다보시다가 ‘아니야 너 모르는것 같아. 이리로 와 봐.’라고 하세요.”
이렇게 하나하나를 짚어주는 것은 의사의 임상 경험과 같다. 임상 경험이 많은 의사의 전문성을 인정하듯이, 교사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중학교 1학년 수학 시간에 도수분포표를 배우고 있다. 수학 교실에 교과서는커녕 연필 한 자루도 안 들고 들어온 남학생.
들어오자마자 엎드려 버린다. 아무것도 안하겠으니 건드리지 말라는 신호다. 가서 등을 쓰다듬어주면서 말을 걸었다. “많이 피곤하니?” 앞자리에 앉은 학생에게서 연필을 하나 빌려다가 손에 쥐어주고 “1번만 풀어봐. 네가 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그래.”
말을 거니 마지못해 몸을 세워 숫자를 대입해 본다. “할 줄 아네!” 학생의 입 꼬리가 쓱 올라가는 것을 봤다.

‘이렇게 까지 아양(?)을 떨어가며 가르쳐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스친다. 이 문제 하나 푼다고 해서 학습부진 상태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도 내가 너한테 관심이 있다는 것은 알렸으니 시작이다! 쉬는 시간에 따로 불러 물어봤다. 왜 엎드렸는지, 네가 수업시간에 엎드릴 때 선생님이 너에게 어떻게 해주었으면 좋겠는지. 그랬더니 깨워달란다. 기가 막혔지만 다시 물었다. 왜 깨워주었으면 좋겠냐고. “그래도 깨우는 선생님은 관심이라도 있는 거잖아요.” 학습부진학생들은 이리도 ‘관심’에 목말라했다.
여러 번 설명해 주었지만 못 알아듣고, 중학생이 되어도 사칙연산이 어렵고, 교과서를 읽었는데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들을 마주하면, 답답한가? 미안한가? 솔직히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안타깝지만 미안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미안해야 답이 보이기 시작했다. 가르치고 도움을 주고 있음을 학생들에게 알리고 학생들이 느끼게 하는 것, 초등학교 저학년들뿐만 아니라 중학교 3학년 학생들도 매 순간 배우고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을 느끼는 것이 중요했다.

불편한 가치관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는가?

“가정에서의 돌봄이 부족해요.”
“집에 혼자 방치되어 있는 시간이 많은 것 같아요.”
“제가 수학을 못했거든요. 내 아이도 그리 잘할 것이라 기대하지 않아요.”
왜 학습부진학생이 되었는가에 대해 담임교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거의 대부분이 가정에서의 학습 지원 부족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그만큼 가정에서의 협조가 함께 진행되지 않으면 정말 어려운 것이 학습부진학생 지도이다.
학습 부진의 원인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많은 문제의 시작이 가정에서 비롯된다. 학습에 대한 습관의 미형성, 알고 배워야 한다는 필요 자체를 모르는 상태, 충분하지 못했던 문화적 경험 등으로 인해 학교에 입학함과 동시에 같은 출발점에 서 있지 않다. 가정환경의 영향 이전부터 갖고 있는 태생적인 문제도 많다. 느린 이해력, 낮은 기억력, 경계선 지능, 난독, 난산, 정서·행동상의 어려움 등등…
영화 ‘천문’을 보면서 ‘태생이 천한 것’이라고 했던 대신들의 대사에 불편함을 느꼈는데, 문득 나는 ‘천성이라는 대신들의 불편한 표현에 대해 이를 반박할 철학적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가?’라는 반문이 들었다. 가정에서 비롯된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연히 가르치고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 시작부터 힘들었던 학생들을 가르치고 도와주면 잘 성장할 것이라는 신념과 믿음이 확고한가에 대한 되짚음이었다.
실제 학습부진학생들이 갖고 있는 가정의 변수를 뛰어 넘는 것은 너무 어려운 문제이다. 3년 간 모니터링을 지속하고 있는 44명의 학습부진학생들 중 더 이상 학습부진이 아니라고 평가할 수 있는 학생들은 6명에 불과했다(김태은, 이재진, 박준홍 외, 2019). 6명의 학생들은 가정에서의 관심과 지원이 받쳐주었으며, 솔직히 가정에서의 지원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아주 심각한 수준의 학습부진이 아니기도 했다. 그렇다면 여전히 학습부진 상태에 있는 38명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현재 연구가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아직 답을 내기는 어렵고, 연구가 종료되더라도 이 아이들의 삶은 진행형이기 때문에 답을 찾았다 못 찾았다라고 단정할 순 없을 것이다.
연구 중에 만난 어떤 중학교 선생님이 되물었던 적이 있다. “이렇게 한다고 해서 학습부진에서 벗어날까요?” 솔직한 질문이었다. 당신의 경험에 비추어 보건데, 지금까지 만나온 중학교 학생들 중에 학습부진에서 벗어나 가시적으로 도약을 했던 학생은 1〜2명 정도에 불과하다고 하셨다.
학습부진학생들을 가르치고 도와주는 목적이 무엇에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선생님의 솔직한 말씀처럼 이 학생들이 학습부진을 벗어나 보통의 학생들처럼 수업에 참여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열심히 달려보지만, 안 그래도 앞서 가던 주변의 학생들은 더 빠르게 달린다. 출발선이 다르니 달리기로는 학습에 대한 의미를 회복하기 어렵다.
가정에서부터 비롯된 문제, 학습부진이 될 수밖에 없는 조건, 그래서 해봐야 소용없다는 함정과의 싸움에서 놓지 말아야 할 핵심은 학습부진의 원인 중 그 어느 것 하나 학생들이 스스로 선택한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학습부진학생들을 돕는 것은 성인이 아이에게 지켜주어야 하는(인간이 인간에게 해야 하는) 최소한의 예의가 된다.
철학적 가치가 충분히 서지 않은 상태로 학생들을 만난다는 것은 정말 위험했고, 그 가치관에 대해서는 자기 점검이 항상 필요했다. 학생들의 성장을 바라보는 관점이 전환되어야 한다. 지금 못한다고 5년 후에도 못하는 것은 아니라는 신념이 확고해야 내 눈앞에 있는 그 학생에게 좋은 것을 한 술이라도 더 떠 넣어주고 싶어진다.
학습부진학생들의 학습 과정을 들여다보면 본질적인 고민과 자주 마주하게 된다. 내가 가르친다고 생각했는데, 이 아이들이 도리어 나를 가르칠 때가 많다.

그래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학습부진학생의 학습 과정을 모니터링 하면서 흔하게 발견되는 모습들을 학년별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초등학교 저학년 : 희망이 보인다. 친구들의 시선보다 선생님의 관심이 더 좋은 이 아이들은 조금만 도와주면 다 될 것 같다. 선생님이 친절하게 가르쳐 주고 관심을 주면 그냥 좋다.
초등학교 고학년: 학습부진 꼬리표가 2~3년 정도 따라 붙으니 눈빛이 심상치 않다. 수업시간에 다가와서 가르쳐 주는 것을 거부한다. 교사의 관심을 받는 학생이라는 것이 싫다. 못하는 것을 들키게 될까 두렵다.
중학교 1학년: 중학생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열심히 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새 삶을 살아 보겠다고 다짐한다. 수업시간에 똑바로 앉아서 듣고, 손을 들어 발표도 한다. 선생님들은 이 진지한 태도의 학생이 학습부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기 어렵다. 3주 정도 지속되다가 수행평가가 시작되니 들통이 나기 시작한다.
중학교 2학년: 친구들이 하는 학습과 자신이 할 수 있는 학습 간에 간극이 너무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도무지 견적이 안 나온다. 포기하는 과목이 늘어난다.
중학교3학년: 마음이..급하다. 선생님들이 내신 관리를 해야 한다고 하시는 말씀은 들었지만, 어떻게 하는 것인지는 몰랐다. 일단 수행평가 점수라도 잘 받아보기 위해 기한에 맞춰 과제도 제출해본다. 지금까지 신경 써 본 적이 없는 수행평가인데 낯설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학습부진 상태는 누적되고,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하다. 그래서 무엇보다 초등학교 저학년에서의 집중 지원이 가장 효과적이며, 예산 대비 가장 효율적인 전략이다. 선생님의 관심과 지원이 마냥 좋으니 붙잡고 가르치기 최적인 시기이다. 이때 제공된 친절한 학습에 대한 첫 경험은 배우는 것이 즐겁다는 것,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즐거움 등의 가치 형성에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
초등학교 고학년 학습부진학생들에게는 빠르게 따라잡는 전략, 단기 속성 과정이 필요하다. 이미 학습에 대한 상처가 있기 때문에 자신의 변화가 시각적인 자료로 제공되지 않으면 좀처럼 학습의지를 유지하기 어렵다. 학습 단계를 잘게쪼개서 작은 성취를 반복적으로 느끼게해주어야 한다. 가정에서의 관심까지 끌어내면 금상첨화이나, 사실 쉽진 않다.
그래도 시도해 봐야 한다. 학부모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은 ‘당신의 자녀가 학습부진이니 집에서 지도를 하셔야 합니다.’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를 위해 학교에서는 이렇게 하고 있으니, 가정에서도 이 부분에 신경을 써주시면 빠르게 발전할 것입니다.’이다. 유사한 듯 미묘하게 다른 표현이다. 핵심은 우리가 이렇게 손을 잡고있으니 가정에서도 손을 맞잡아 달라는것이다. 학부모가 원하는 솔루션은 관심과 위안이다.
중학교에 갓 입학한 학습부진학생들은 새 삶을 살아야겠다는 의지를 보인다. 새로운 환경이 주는 마법이다. 변하겠다는 신호를 보낼 때 빠르게 낚아채야 한다. 그런데 지도서(중학생이면 이 정도 해야 한다는 기준)를 갖고 접근하면 낭패다. 이 학생들은 아직 형식적 조작기에 도달하지 못한 초등학생과 같다. 그래서 추상적 사고가 가능할 것이라는 가정으로 지도하면 학생들이 도망 다니기 시작하는데, 학생을 가르치는 것보다 잡으러 다니느라 힘이 다 빠진다.
중학교 학습부진학생들 중에는 어휘의 습득량이 부족한 학생들이 많기 때문에 꾸준한 어휘학습을 구체적인 방식으로 유도해야 한다. ‘책을 많이 읽어라.’는 가르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수준의 책을 읽어야 흥미를 느낄 수 있는지 학생을 들여다보고 골라주어야 한다. 이도저도 여의치 않으면 매일 하루에 몇 개씩 새로운 어휘와 그 뜻을 선으로 연결하는 문제를 접하도록 해야 한다. 매일의 반복이 무섭다. 수학이 위계적 학문이라고는 하지만 중학생이 되어서도 매일 사칙연산만 연습한다면 솔직히 나라도 수학을 포기할 것 같다. 새로운 개념을 이해할 수 있는 자극을 주고, 거꾸로 이전에 이해하지 못했던 내용을 다시 보게 하는 세분화된 전략이 필요하다. 영문법이 시작되지만, 문법은커녕 단어를 읽지 못한다. 파닉스 지도가 필요하다. 일단 읽을 수 있으면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는 않는다.
중학교 학습부진학생들은 모두 공부하는 방법을 모른다고 봐야 한다. 학생들은 그간 어떻게 공부해야 한다는 것을 배운 적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공부하는 방법을 누군가 구체적으로 가르쳐주는 기회는 많지 않다. 방법을 사용할 줄 안다는 것은 이미 학습부진이 아닌 상태이기도 하다. 방법을 알게 하기 위해서는 한 명 한 명을 눈앞에 앉혀 놓고, 질문하고, 들어주고, 시작점을 찾고, 학습 계획을 세워주고, 날마다 점검해주는 것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한 번이라도 짚어주었던 경험은 학생들에게 강하게 작용한다. 그런데 이 일은 웬만한 열정이 아니고서는 하기 힘들다. 그래도 정답은 이것 뿐이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람이 필요하고, 예산이 요구된다.
몇 년간 학습부진학생들의 성장 과정을 모니터링 하면서 학생들이 원하는 것, 그래서 학습부진학생들에게 꼭 해주어야 하는 것들을 정리해보았다.

미안해하기: 분수를 이해하지 못하는 초등학생들 , 사칙연산이 안 되는 중학생들 , 영어시간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고등학생들 을 보면 답답한가? 미안한가? 사실 답답함이 먼저이긴 하다.  그런데 미안해야 답이 보인다.
궁금해하기: 연필을 잡는 힘이 왜 없을까? 수업시간에 왜 아무런 의욕이 없을까? 왜 그렇게 게임에만 몰두해 있을까? 왜 자신이 읽은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까? 가르치고 도와주는 일이 학생들 을 향해 있으려면 일단 궁금해야 한다.
들여다보기: 들 여다본다는 것은 과제를 주고 해오면 검사하는 것이 아니다.  한 발자국 뒤에서 학생의 학습 과정을 지켜보고 사고를 따라가며 어느 지점에서 멈춰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이다.  멈춰있는 그 자리에서 딱 한 발자국 내딛는 그 학생에게 ‘멋지다!’라고 해주는 것이다.
물어봐주기: 초등학교 과학시간에 콩나물을 키우는데, 학습부진학생이 키웠던 그 콩나물만 말라 죽었다.  조용히 불러 물어보니 창가에 있는 콩나물이 추워 보여 뜨거운 물을 주었다고 했다  묻지 않으면 모른다  학생들 의 생각을 묻는 것만큼 세상 재미있는 일이 또 없다  기죽어 있는 그 학생에게 ‘마음이 참 예쁘다 ’라고 해주었다.
잉크 떨어뜨리기: 잉크 한 방울을 잘 준비해서 똑 떨어뜨리면 온통 파란색으로 변하고, 옆으로 번져나간다.  한 명의 학생이 체하지 않고 맛있게 잘 받아먹을 수 있도록 차려주면, 그 옆에 학생도 와서 맛있게 받아먹는다.  그렇게 전파된다  먹을 놈은 먹고 안 먹을 놈은 말라는 농약뿌리기 식의 교수 상황에서 이 학생들 은 절대 먹지 않는다 .
세분화하기: 리코더를 부는 것이 지옥 같다는 학습부진학생이 있었다.  사실 리코더를 연주하려면 악보와 운지법을 이해하고 소근육과 연결해야 한다.  이 복잡한 과정을 ‘그냥 하면 된다 ’고 해버리니 3년 동안 ‘미’만 불어댄다  하다 보니 되는 아이들 이 있고, 해도 해도 안 되는 아이들이 있다.  하다 보니 되는 아이들 은 해보니 되었던 경험이 많은 아이들 이다  해도 해도 안 되는 아이들 에게는 단계를 세분화하여 전략을 가르쳐야 한다  우리는 평균까지 가는 것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근육 만들어주기: 헬스장에서 개별 트레이닝을 받다 보면 학습부진학생들 에게 PT선생님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어느 근육을 써야 하는지 용케 짚어주고, 힘들 어서 그만 하려고 할 때 ‘5번 더!’를 외치는  학습부진학생들 에게는 학습을 지속할 수 있는 근육이 만들 어져야 한다.  근육을 만들 려면 매일 꾸준히 반복하는 무엇, 사소한 듯 하나 결코 사소하지 않은, 가랑비에 옷 젖는 그런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견뎌주기: 3년 간 학생들 의 성장 과정을 모니터링 해봤지만, 학습부진학생들 은 절대 쉽게 변하지 않는다.  연구를 하면서 가장 힘들 었던 것은 아이들 을 보면서 덩달아 침울해지는 것이었다.  꺼져가는 희망을 다시 살려보려고 기대를 걸어보지만, 그 기대가 행여 독이 될까 조심스러웠다.  그래도 지쳤다 싶은 순간이면 인간적인 기대를 가져온 학생들 의 반응이 있었다.  쉽게 변하지 않는다고 포기하는가? 내가 버텨야 그 학생도 버틴다.

최근 기초학력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사실 기초학력은 일반 국민들에게 그리 관심사가 아니었다. 표심을 흔드는 것은 학력이지, 기초학력이 아니기 때문인 듯도 하다. 모두가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너무 기본이라 오히려 소외되기도 한다. 기초학력의 개념이 혼란스럽다고 난리다. 개념에 대한 근본적인 정의보다 어디까지를 기초학력으로 볼 것인가의 논쟁이 가열차다. 그러나 명료한 수준 설정이 가져오는 함정이 있음도 직시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연구를 시작하기 전 교사로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도와준다고 하였지만 그 기준이 교사인 나 중심이었으며, 학생들이 성잘할 수 있다고 기대를 걸면서도 학생에게 태생적인 한계가 있다고 선을 그어왔다. 학습부진학생들을 만나는 것은 교육에 대한 본질적인 질문들을 끌어 올리는 자극이 되었고, 철학적 가치를 점검하게 했다. 그래서 세종대왕의호통, ‘가르치고 도와주지는 않고!’에서 찔렸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