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2024 여름호(255호)

학교가, 학교만이 길러줄 수 있는
우리 학생들에게 필요한 미래 역량

김종훈 (건국대학교, 교수)

들어가며

‘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는가? 이 말은 언뜻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흔히 미래라고 하면 아직 오지 않은, 그래서 앞으로 일어날 일을 지칭하는 말인데 그 미래가 오래되었다니 말이다. 사실 이는 스웨덴의 환경운동가이자 작가인 헬레나 노르베리-호지(Helena Norgberg-Hodge)가 2015년에 쓴 책의 제목이다. 지금까지 50여 개 언어로 번역되었으며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널리 사랑받은 이 책의 제목 『오래된 미래』는 우리 아이들에게 필요한 미래 역량을 고민하는 데에도 중요한 단서를 준다.

미래를 살아갈 우리 학생들에게 필요한 역량은 무엇일까? 학교에서 기를 수 있고 길러야 하는 미래 역량은 무엇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여러 갈래가 있겠지만, 분명한 사실은 미래에 필요한 역량이라고 하여 지금까지 학교교육을 통해 전혀 다루어지지 않은, 낯설고 새로운 것이 아니라 이미 오랜 기간 학교에서 다양한 모습으로 이루어져 온 가르침과 배움의 실천 속에 담겨 있다는 사실이다. 다만, 그것을 오늘과 내일의 관점에서 새롭게 조망하고 그 의미를 새롭게 하는 일이 필요하다. 마치 땅속에 감추어진 보물을 찾아 빛이 나도록 깨끗이 씻고 닦는 일처럼 말이다. 바로 이것이 미래를 준비하는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여 ‘오래된 미래’를 이야기하는 이유다.

주도성: 자신의 삶과 학습을 주도하는 학생으로 길러내기

미래 교육을 이야기할 때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문서 하나가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2018년에 펴낸 보고서 「교육과 기술의 미래: 교육 2030(The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 Education 2030)」이 바로 그것이다. OECD는 지난 1997년, 핵심역량을 정의하고 선별하기 위한 DeSeCo(Definition and Selection of Competencies: 생애핵심역량) Project를 통해 미래사회를 살아갈 학생들에게 필요한 핵심역량의 범주를 ① 상호작용을 위해 도구를 사용하는 능력, ② 나와 다른 집단과 소통하는 능력, ③ 자율적으로 행동하는 능력으로 천명하였다. 이 프로젝트는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전 세계 많은 국가에서 이른바 역량기반 교육 내지는 역량 중심 교육으로의 전환을 촉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부터 20년이 흐른 2018년에 이르러 OECD는 DeSeCo Project 2.0이라고도 불리는 ‘교육(Education) 2030 프로젝트’의 결과를 발표하기에 이른다. 여기에서 말하는 2030년은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보고서가 발표된 시점인 2018년에 학교교육에 진입하는 아동이 초·중·고등학교 12년간의 의무교육을 마치고 성인이 되어 대학에 진학하거나 사회에 진출하게 되는 시점이 바로 2030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기에서 말하는 2030년은 교육을 받은 학생이 살아가게 될 머지않은 미래를 상징하며, 이 점에서 교육 2030 프로젝트는 OECD가 전망하는 미래 교육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보고서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을 하나 선택하라고 한다면 그것은 ‘학생 주도성(Student Agency)’이아닐까 싶다. OECD는 학생들이 현재의 삶, 그리고 앞으로 펼쳐질 미래사회에서 자신의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가며 살아가기 위해 주도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하는 주도성이란 단순히 삶의 주인으로서 무언가를 주도적으로 결정하고 행동한다는 단편적인 뜻이 아니라,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이루어진 복합적인 개념이다.

주도성을 지닌 학생은 손에 ‘학습 나침반(Learning Compass)’을 들고 학습과 삶이라는 이름의 여정을 주도적으로 헤쳐나간다. 우리가 운전할 때 사용하는 내비게이션이나 애플리케이션은 목적지를 입력하면 출발지로부터의 경로, 걸리는 시간, 막히는 정도, 주변의 지형지물을 상세히 안내해 준다. 그리고 우리는 그 길을 따라 목적지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나침반은 북쪽을 가리키는 바늘이 흔들거리다가 멈추어 그저 동서남북 방향 정도만을 알려줄 뿐이다. 전자가 결과 지향적이기에 운전자는 정해진 경로를 따라 다소 수동적인 입장에서 따라간다면, 후자는 목적지가 어느 방향인지만을 알고 가야 하기에 이동하는 과정 자체가 중요하기도 하고 그 속에서 여행자의 주도적인 선택과 결정이 필요하다. 지금까지의 학교교육이 내비게이션이었다면 교육 2030 프로젝트가 지향하는 모습은 나침반과 같아서, 정해진 내용과 지식을 받아들이기보다 학습의 과정에서 예측하고 행동하며 성찰하는 힘을,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내고 갈등 상황을 조절하며 책임감 있게 살아가는 능력을 중요하게 여긴다. OECD가 말하는 미래를 살아갈 주인공으로서 학생이 갖추어야 할 역량은 바로 이런 것들이다.

공동체성: 상호주도성 함양을 위한 ‘교육적 관계’에 주목하기

교육 2030 보고서는 학생을 그저 학생(student)이나 학습자(learner)라고 부르지 않고 ‘주도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학생(Student Agency)’이라고 말한다. 중요한 점은 주도성이라고 하여 단순히 자기가 하고자 하는 대로 선택과 결정을 주체적으로 하라는 게 아니라, 동료(친구), 교사, 그리고 그가 속한 공동체의 구성원들과 함께 협력하고 소통하는 삶을 사는 공동체적이며 협력적인 상호주도성(Co-agency)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이다.

이 점은 학생들에게 필요한 미래 역량을 모색하는 일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준다. 일각에서는 주도성을개인의 영역으로 생각하여 학생 개인이 자신의 학습과 삶에 있어서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하는 것처럼 다루기도 한다. 그 가운데 ‘선택’은 주도성 함양과 발현의 핵심이라고 생각하여 다양한 선택지가 놓인 상황에서 어떻게 하면 바람직한 의사결정을 할 것인지를 중요하게 여겨왔다. 교과 학습에서 여러 활동을 준비하고 학생이 마음에 드는 활동을 선택하게 하거나, 과목을 다양하게 개설하고 자신의 진로와 적성에 맞는 과목을 선택하게 하며, 어떤 진로를 결정할 것인지를 선택하게 하는 일이 마치 주도성의 전부인 양 생각해 온 측면이 있다.

그러나 OECD의 교육 2030이 말하는 주도성, 특히 상호주도성(Co-agency)의 핵심은 ‘관계’에 있다. 다시 말해, 주도성은 개인의 능력이라기보다 나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은 물론 환경과의 긴밀한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을 통해 길러진다는 것이다. 가깝게는 친구, 부모, 교사와의 관계를 통해, 교과 학습을 포함하여 학교와 교실에서 이루어지는 여러 관계를 통해, 나아가 우리를 둘러싼 환경과 세계와의 관계를 통해 길러지기도 발휘되기도 하는 것이 바로 주도성이다. 그렇다면 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어떤 관계를 경험하게 할 것인지의 문제가 중요하다. 다른 곳에서가 아니라 학교에서라면 그 관계는 교육적이어야 한다.

우선, 주도성을 기르기 위해 학생들은 교과와의 교육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학교에서 배우는 교과에 담긴 지식과 내용은 어떨 때 ‘교육적인’ 관계로 학생들에게 다가올까? 그것은 배우는 내용으로부터 의미와 가치를 발견할 때이다. 그러나 의미는 다른 누군가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좋은 교육적 경험을 통해 ‘만들어’진다. 교과로부터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그 내용은 그저 책 속에 있는 죽은 지식이 아니라 자신의 삶과 연결되는 생생한 경험이 되어 다가온다. 학교의 역할은 교과 학습을 통해 학생들에게 풍부한 교육적 경험을 제공하되, 그것이 학생들의 삶과 실생활의 문제와 긴밀하게 연결되도록 하는 일이다.

다음으로 학생들은 교사와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음으로써 주도성을 기를 수 있다. 학생 주도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그것은 교사 주도성(Teacher Agency)이 전제되지 않으면 무용하다. 학생을 민감하게 바라보고 그에 반응하는 교사는 미래 역량을 기르기 위한 교육에 있어서도 여전히 핵심이다.

마지막으로 학생들은 친구(동료)와의 관계를 통해 주도성, 특히 상호주도성을 기를 수 있다. 본디 배움이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말로 표현될 때 깊이를 더한다. 누군가의 설명을 들을 때보다 나의 언어로 표현할 때 깊은 사고의 과정이 필요하기도 하고 그러한 사고가 일어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보다 확실하게 배우는 일은 없다. 미래의 역량을 고민하는 학교가 학생들에게 배움을 넘어 자기 생각을 나누고 공유하며 협력하는 기회를 넘치도록 제공해야 하는 이유다.

주도성을 가지고 타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살아가는 건강한 공동체의 구성원인 학생이 학교교육이라는 나침반을 따라 도착하게 되는 곳은 OECD가 학습나침반 그림에서 설명한 것처럼 ‘웰빙(Well-being)’이라는 종착지다. 우리 사회에서 웰빙이라는 말은 마치 몸에 좋은 음식을 먹고 몸과 마음의 건강을 챙기며 여가를 누리는 여유로운 삶으로 오해되어 오곤 했지만, 웰빙의 본래 뜻은 말 그대로 좋은 존재(being)로서 잘(well) 살아가는 것이다. 교육 2030 프로젝트는 교육의 목적을 개인과 사회의 웰빙, 즉 학생들 하나하나가 좋은 존재로 살아가며 그러한 존재들이 이루는 건강한 공동체로서의 사회를 이루는 일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계 시민성: 나와 우리를 넘어서는 글로벌 이슈 끌어안기

상생과 공존의 정신으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어가는 일은 비단 특정 지역(서울)과 국가(대한민국)에만 해당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사는 지구를 하나의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지구촌으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이미 오래전의 일이듯, 우리 학생들은 기본적으로 서울 시민으로 살고 있지만, 시민에게 요구되는 덕목으로서의 시민성의 범위는 서울이라는 지리적 공간에 한정되지 않는다. 여기에서 필요한 역량이 바로 세계 시민성이요, 이를 위한 교육이 세계시민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성을 뜻하는 영어 단어 Citizenship은 좁은 의미에서 한 국가의 국민으로서 누리는 권리(시민권)라는 뜻이지만, 요즘에는 시민에게 요구되는 기본적인 자질(시민성)이라는 의미로 더 많이 사용된다. 그 앞에 ‘세계’라는 단어를 붙여 만든 세계 시민성(Global Citizenship)이라는 말은 공동체를 구성하는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할 자질과 태도가 지역과 국가를 넘어 전 지구적인 차원에서 발휘되어야 함을 의미한다. 달리 말하면, 시민성이 발휘되어야 할 크고 작은 사회적 문제가 지역과 국가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정, 학교, 마을, 지역, 국가, 그리고 세계 전체와 같이 다양한 수준의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우리에게, 특별히 학생들에게 필요한 세계 시민성은 어떤 것일까?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서는 현재 우리 사회가 겪는 다양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먼저 들여다봐야 한다. 세계 시민성과 관련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당면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차이를 극복할 것인가, 이를 통해 어떻게 하면 우리 공동체를 다양성이 살아 숨 쉬는 공간으로 만들어갈 것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이다. 다시 말하면, 인종과 민족, 지역, 종교와 신념, 언어와 문화, 사회·경제적 수준, 성별, 신체적·정신적 장애의 유무 등에서 빚어지는 수많은 차이와 다양성에 대한 인정과 존중을 바탕으로 평등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가고자 하는 자세가 바로 세계 시민성이다.

다양한 매체를 통해 유럽과 아프리카에서 심각하게 일어나는 난민 문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의 전쟁과 같은 이야기를 접하게 될 때면 마치 먼 이국에서 벌어지는, 우리와 상관없는 일로 들리곤 한다. 그러나 우리 사회가 시민성이 발휘되는 건강한 공동체인지 돌아보면 회의적인 생각에 고개를 떨구게 된다. 우리 사회에도 ‘다름’을 ‘틀림’으로 여길뿐더러, 나와 다른 타자를 혐오하거나 차별하는 일이 드물지 않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인 학생들이 많은 시간을 보내는 온라인 공간이나 가상공간에서는 익명성 때문에 그런 일이 더욱 빈번하고 심각하게 일어난다. 이로 인해 발생하는 사회적 비용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세계시민교육(Global Citizenship Education)은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것을 넘어 학습자들이 더 포용적이고, 정의롭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드는 데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에 필요한 지식, 기능, 가치, 태도’(서울특별시교육청, 2024, p. 12)를 기르기 위한 교육을 말한다. 그렇다면 이를 통해 세계 시민성을 기르는 일은 비단 도덕이나 사회와 같은 특정 교과의 학습을 통해서만 다루어질 일이 아니다. 정도에 따라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으나, 모든 교과를 통해, 아니 학교 생활 전반을 통해 길러져야 할 자질이자 역량이다.

생태 감수성: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힘

글을 처음 시작하며 언급했던 헬레나 노르베리-호지의 『오래된 미래』는 라다크 마을 사람들의 삶의 모습으로부터 인류의 공존과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한 지혜를 찾아가는 책이다. 저자는 도시의 삶과 첨단 문명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척박하고 낙후된 땅에 불과하지만 평화롭고 건강한 공동체를 가꾸어 온 라다크 마을에서 인류의 미래를 여는 열쇠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불행하게도 라다크 마을에서 저자가 찾아낸 비결과 역행하는 길을 선택해 온 인류는 최근 유례없는 기상이변과 기후위기, 자연재해, 대규모 질병 등의 문제로 고통을 겪고 있다. 이와 같은 문제는 서울과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라 전 지구적 관심과 변화가 필요한 시대적 과제이자 글로벌 이슈에 해당한다. 많은 이들은 모든 인류에게 영향을 미치는 커다란 문제일수록 ‘생각은 지구 전체를 위해, 행동은 지역에서 구체적으로(Think Globally, Act Locally)’ 해야 한다고 말한다. 생태전환교육을 통해 학생들에게 생태 감수성을 기르게 함으로써 지구와 인류의 미래를 고민하고, 삶 속에서 구체적인 방법으로 실천하도록 해야 하는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 앞서 언급한 ‘공동체성’과 ‘세계 시민성’이 나와 다른 사람들 간의 관계에서 필요한 자질이라면, 생태 감수성은 인간과 생태 환경 간의 관계에 요구되는 역량에 해당한다.

생태전환교육은 이번 2022 개정 교육과정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담고 있는 가치이자 교육의 방향이기도 하다. 교육부(2022)에 따르면, 생태전환교육이란 ‘기후위기 비상시대,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해 개인의 생각과 행동 양식뿐만 아니라 조직문화 및 시스템까지 총체적인 전환을 추구하는 교육’ 을 말한다. 지금까지 세상을 바라볼 때 인간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고 움직여 왔던 관습을 ‘전환하여’ 인간과 생태 환경을 같은 위치에 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일회용품, 전기, 종이 등의 자원을 덜 사용하는 방법을 통해, 학교와 같은 기관에서는 탄소 중립을 위한 제도적인 노력을 통해 생태를 지켜나가는 일이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방식으로부터 생태 중심의 사고로 전환하는 일이다.

봄이 되면 사람들은 겨우내 움츠렸던 몸을 펴고 지천으로 핀 봄꽃을 찾아다닌다. 서울에도 개나리로 유명한 응봉산, 벚꽃이 아름다운 여의도 윤중로와 어린이대공원, 유채꽃이 아름다운 한강 서래섬과 같이 봄마다 사람들의 발길을 이끄는 장소가 있다. 각 지역에서는 매년 3, 4월이면 봄꽃과 관련된 축제와 행사를 기획하는데, 최근들어 날짜와 기간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개화 시기를 예측하기가 너무도 어렵기 때문이다. 2023년에는 꽃이 너무 일찍 피고 져서, 올해는 생각보다 늦게 펴서 여러 봄꽃 축제들이 적지 않은 차질을 빚었다. 모두 기후의 변화가 만든 결과다. 어디 그뿐인가? 봄과 가을은 점점 짧아져 사라질 위기에 있고 길이가 길어진 여름은 과거와 비교하면 훨씬 더 덥고 습하며, 겨울은 춥고 건조하기가 이를 데 없다. 이렇듯 기후위기는 당장 우리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학생들의 생태 감수성을 기르는 일이 왜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비단 미래의 삶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라 바로 ‘여기 그리고 지금’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 꼭 필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라고 답해야 한다. 생태 감수성을 ‘능력’으로 정의한 이상, 생태 환경에 대한 감수성이 부족한 사람은 그저 감각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라 무능한 사람이다. 생태 감수성은 우리 시대에 그만큼 절실하게 필요한 능력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학교교육을 통해 미래사회의 주역일 뿐만 아니라, 지금 그리고 여기의 삶을 사는 학생들에게 생태 감수성을 기르는 일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여야 한다.

독서와 인문 소양: 책을 통해 세상과 미래를 바라보기

나는 사범대학에서 교육학(교육과정)을 가르치고 있으며, 대학에서 중등 예비교원을 가르친 지 올해로 8년째가 된다. 처음 대학 강단에 섰을 때와 지금을 비교해보면 대학생들에게서 살펴볼 수 있는 몇 가지 변화가 있는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단연 ‘글쓰기 능력’의 차이다. 과거와 비교해보면 학생들의 글은 길이가 짧아졌고 문장은 그 맛과 힘이 조금씩 무뎌지고 있으며, 자기 생각을 논리적으로 펼쳐가는 힘도 예전보다 부족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많은 연구는 그 원인을 스마트폰 사용과 온라인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증가했다는 데에서 찾는다. 그만큼 책을 읽을 시간을 이미지와 영상에 빼앗긴 것이다. 조선의 선비 허균 선생은 송나라 문절공의 글을 인용하여 세상에는 다음과 같은 여러 아름다운 소리가 있다고 하였다.

주도성을 지닌 개인으로, 건강한 사회 공동체를 이루어감으로써 개인과 사회의 웰빙이라는 미래의 문을 열어갈 우리 학생들에게 필요한 미래 역량을 기르기 위한 단 하나의 방법이 있다면 그것은 부지런히 책을 읽는 일이다. 지금까지 학교에서는 한 학기 한 권 읽기, 아침 독서 등의 다양한 방법으로 학생들에게 책 읽을 시간을 부여해 왔다. 그런데 현 시점에서 미래 역량을 이야기하며 다시 책을 읽어야 한다는 말은 어떤 의미일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독서는 단순히 ‘책을 읽는 일’ 그 자체로서의 행위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책을 읽고 난 다음, 책의 내용에 대해 친구들과 함께 이야기 나누고, 쟁점이 되는 주제를 중심으로 토의와 토론을 하기도 하며, 그로부터 얻은 바를 삶으로 연결하는 일이 중요하다. 책을 매개로 학교에서 일어나는 배움이 삶으로 연결되기도 하고, 삶의 문제가 교실과 학교로 들어오기도 한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학생들은 궁극적으로 인문 소양을 기를 수 있다. 인문 소양에서 ‘인문’은 문자 그대로라면 인간(人)의 무늬(文)를 뜻한다. 따라서 책을 통해 인문 소양을 기를 수 있다는 말은 어떤 책을 읽고, 누구와 어떤 이야기를 나누며, 어떻게 생각하고 사는지에 따라 한 사람의 고유한 무늬(개성이라고 불러도 좋다)가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책을 통해 기를 수 있는 인문 소양은 온라인 공간과 영상 자료에 너무도 익숙해진 학생들에게 꼭 필요한 역량이 아닐 수 없다. 특히 모두가 하나의 목표를 향해 경쟁하듯 달려가는 과정에서 자신을 잃어버리고 마는 몰개성의 시대에 책을 읽는 일은 너무도 중요하다. 책 읽기는 토의와 토론으로, 토의와 토론은 다시 글쓰기로 이어지며 우리 학생들은 창조적이고 능동적인 주체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디지털 네이티브(Digital Native) 세대에게 활자가 가져다주는 축복이다.

사람은 본질상 이야기를 하며, 이야기를 창조하는 존재다. 미국의 영문학자 존 닐스(John Niels)는 이러한 인간의 본질을 호모 내런스(Homo Narrans)라는 말로 명명하며 ‘인간은 본능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존재이자, 이야기를 통해 세상을 이해한다.’고 하였다. 비슷한 의미에서 러시아의 문학평론가인 미하일 바흐찐은 “나와 너의 이야기가 어우러져 우리가 사는 세상을 만들어 간다.”라고 말한다. 책은 이야기를 통해 나와 다른 사람,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과 앞으로 다가올 미래를 이해하는 창문이다. 다시 우리 학생들의 손에 책을 들려주어야 한다. 책을 읽을 여유와 시간을 확보하는 일은 어른의 책임이다. 책을 통해 나를 알고, 다른 사람을 이해하며, 세상을 바라볼 수 있는 인문 소양을 길러줄 책임이 학교에 있다.

나가며

지금까지 학생들에게 필요한 미래 역량으로 주도성, 공동체성, 세계 시민성, 생태 감수성, 독서를 통한 인문 소양을 이야기했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 언급한 것처럼 이러한 역량은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의 학교교육을 통해 이미 이루어져 왔다. 다만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 사회 변화와 시대적 요청에 따라 이러한 역량이 가져야 할 새로운 의미를 말하였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역량은 사실 직접적인 경제적 이득을 가져다주거나 상품성이 높은 일들은 아니다. 주도성을 기른다고 하여 곧바로 좋은 학교에 진학하는 것도, 공동체성을 함양한다고 하여 원하는 직업을 얻는 것도, 세계 시민성과 생태 감수성을 기른다고 해서 돈을 버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를 통해 개인과 사회가 얻고 누릴 수 있는 교육적 가치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당장 경제적 가치를 가져다주는 일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하려는 곳이 많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이윤이 아니라 그 너머의 교육적 가치를 고민하고 실천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학교뿐이다. 학생들에게 필요한 미래 역량을 학교가, 학교만이 기를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