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석(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교육정책연구소, 연구위원)
이 글은 2020년 교육정책연구소 자체연구 “서울학생자치 정책 발전방향 연구: 중학교 사례를 중심으로”(서교연 2020-68)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하여 재구성하였다.
1. 서론
올해는 1991년 ‘지방교육자치에 관한 법률’의 제정과 함께 ‘교육자치’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지 꼬박 30년이 되는 해이다. 헌법 제31조 제4항에 ‘교육의 자주성, 전문성, 정치적 중립성’의 보장이 명시되어 있지만 오랫동안 우리 교육은 ‘중앙집권적, 규제적’ 교육체제를 유지해 왔고, 교육자치는 이를 ‘분권적, 자율적 체제’로 전환시키기 위한 목적 아래 시도되었다(김성천 외, 2019; 조동섭, 2010: 44).
그런데 교육자치의 여러 영역 가운데 ‘학생자치’는 다음 두 가지 이유에서 특별히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이유는 바로 학교 안팎에서 그동안 자치의 기회를 가장 부여받지 못한, 프레이리(Freire, 1970)의 책 제목처럼 ‘억눌린 자들(the oppressed)’이 바로 학생이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학생들에게 학교는 ‘감시와 처벌’을 통한 ‘훈육’ 의 공간이었고(Foucault, 1977), 학교 밖에서도 ‘어린 애들은 공부나 해.’라는 이야기처럼 학생들은 ‘연령주의’나 ‘보호주의’의 강한 영향 아래 자신들이 마주하는 문제들을 스스로 고민하고 다루며 해결해나가는 ‘시민 주체’로 거듭날 충분한 기회를 제공받지 못하였다(오재길, 2017).
두 번째 이유는 최근의 두 가지 사회적 변화 때문이다. 먼저 2019년 이루어진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2020년부터 만18세가 된 학생들은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 그런데 이러한 변화는 단순히 학생들이 시민으로서 향유할 수 있는 권리 목록에 새로운 권리 하나가 추가되었다는 것 이상을 의미한다. 보다 적극적으로, 학생들은 이제 자신의 삶을 스스로 돌아보고,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들을 인식하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자신의 생각이나 요구들을 적절히 표현하고 조정하며, 그럼으로써 자신과 공동체의 삶을 스스로 결정하는 존재로 거듭나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학급임원 선거나 학생회 구성 및 운영 등을 통해 지금껏 제한적이나마 이러한 시민 주체로서의 경험을 가져다주었던 학생자치활동의 내실화가 더욱 절실해졌다.
선거 연령 하향에 더하여 최근의 ‘코로나19 사태’ 또한 학생자치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코로나19 가 보여주듯이 학생들이 살아갈 미래사회는 복잡하고 불확실한데, 이러한 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학생들이 스스로 자신의 상황이나 수준을 고려한 학습 혹은 삶의 계획을 세우고 주도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교육기술국장인 슐라이커(Schleicher, 2020)는 코로나19 사태와 미래교육의 방향을 논하며 기존의 탑 다운(top down) 방식, 즉 일괄적으로 정해진 교육정책이나 교육과정을 일방적으로 학교, 교사, 학생에게 전달하는 방식으로는 미래사회의 요구에 대응할 수 없다며 무엇보다 교사와 학생의 자율성이 중요함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이 지난 2015년 이후 ‘교복 입은 (민주)시민’이라는 슬로건 아래 학생자치 활성화를 위한 다양한 정책들을 펼쳐온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학생들이 직접 필요한 사업을 기획하고 예산을 산정하여 집행하는 학생참여예산제, 학급회-대의원회-학생회-학교장에 이르는 학생참여 선순환 체제 구축, 학생회실 구축 및 운영 지원 등 학생을 시민주체로 성장시키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이루어져왔다. 그러나 ‘자치’의 성격상 학교마다, 교사마다, 학생마다 학생자치를 이해하고 적용하며 실천하는 모습에 차이가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글에서 필자는 향후 학생자치가 보다 내실있게 그리고 활발히 이루어지기 위해 이루어져야 할 노력들을 제시해 보고자 하였다.
2. 학생자치 내실화를 위한 기본 원칙
가. 기본 원칙의 필요
사전적 정의에 따르면 학생자치는 ‘학생들이 자기 일을 스스로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보다 자세하게, 서울특별시교육청은 <학생자치활동 활성화 지원 계획> 속에서 학생자치를 ‘학교에서 학생 스스로 자율과 참여를 바탕으로 학생조직 구성 및 주도적 활동 전개로 학생의 권리 옹호와 민주시민의 자질을 키워가는 활동’으로 정의내리고 있다(서울특별시교육청 민주시민생활교육과, 2020). 학생자치에 관한 여러 연구들에서 내려진 정의들 또한 크게 다르지 않은데, 이러한 정의들 속에서 우리는 학생자치의 두 가지 핵심 키워드가 바로 ‘자율’과 ‘참여’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이광원, 2019; 이병환, 2012).
그런데 문제는 자율과 참여의 ‘양상’에 따라 자치활동의 궁극적 목적이라고 할 수 있는 민주적 시민성을 함양하기는커녕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자율과 참여라는 이름 아래 학생들에게 무제한적인 자유를 허용한다거나 아니면 학생 참여를 빙자한 학생 동원까지 허용할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학생 자치활동이 민주시민의 자질을 키운다는 교육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그 활동 과정에서 기본적으로 추구되어야 할 원칙들을 조금 더 분명히 그리고 상세히 할 필요가 있다. 이하에서 필자는 자치를 핵심 원리로 삼고 있는 민주 주의 이론, 학생 자율성이나 주도성에 관한 국제기구의 보고서 및 국제협약 등을 검토하여 학생자치활동 과정에서 충족되어야 할 다섯 가지 기본 원칙을 추려보았다.
나. 다섯 가지 기본 원칙
1) 현실성
학생자치활동의 첫 번째 기본 원칙은 바로 ‘현실성’이다. (학생)자치의 정의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자치활동의 대상은 바로 ‘자기의 일’이다. 학생자치활동은 그저 한번 해보는 ‘일회성 행사’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 학교 안팎에서 학생들의 삶에 실제 영향을 미치는 현실의 문제들을 직접 다룰 기회와 권한을 부여하는 것이다. 1989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어 1990년 발효된 <유엔아동권리협약> 제12조는 이러한 내용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능력을 갖춘 아동에게는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모든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표현할 권리를 보장”하여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욱 중요한 것은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으로 바로 본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한 의견 표명에서 나아가 ‘아동의 나이와 성숙도에 따라 그 의견에 적절한 비중을 부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학생들의 판단과 결정은 충분히 경청되고 ‘실제적인 변화’로 이어져야 함을 의미한다. 다만 여기서 실제적인 변화는 반드시 학생들의 의견이나 결정이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에 대한 공식적인 고려의 과정과 적극적인 반영 노력들이 뒤따라야 함을 의미한다.
2) 주도성
2019년 OECD가 미래 교육변화의 방향을 담은 「OECD 학습 나침반 2030」을 발표하였고, 그 속에서 ‘학생 주도성(student agency)’을 미래교육의 핵심으로 설정하였다(OECD, 2019: 6). 구체적으로 학생 주도성은 학생들이 ‘목적의식적(purposeful), 반성적(reflective), 그리고 책임 있는(responsible)’ 행위 주체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Leadbeater, 2017: 67). 학생들은 스스로 선택하고 헌신할 수 있는 목표를 수립하고, 그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시간과 노력을 투자하고, 자신과 자신의 활동에 대해 성찰하며, 그러한 행위의 결과로서 자신이 타자의 삶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사실에 책임을 지기도 해야 한다(74-75쪽). 이러한 주도성은 학생자치활동의 과정에서 마찬가지로 관철되어야 할 핵심 원리로 학생들이 자신들의 의지나 목적과는 상관 없는 외부로부터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자기의 이유’(자유)를 갖고 활동의 목표와 방식을 스스로 선택하며, 그러한 선택이 낳은 결과들을 돌아볼 수 있어야 한다(신영복, 2012).
3) 포용성
자치는 비단 어떤 특별한 능력을 갖춘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이 아니다. 또한 자치는 학생회와 같이 어떤 특별한 조직에 속한 이들에게만 허락된 것도 아니다. 자치는 자신에게 영향을 미치는 일에 대하여 자유롭고 평등하게 선택하고 행동할 수 있는 민주적 삶의 양식 그 자체로 모두가 향유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공화주의자 페팃 (Pettit, 2019: 127)이 ‘함께 행사 가능하고(co-exercisable), 모두가 만족하는(co-satisfying)’ 자유를 강조한 것, 민주주의 이론가 달(Dahl, 1999: 58-59)이 이상적 민주주의의 조건들(효과적 참여, 평등한 선거권, 계몽된 이해, 의제에 대한 통제권)을 열거하며 마지막 다섯 번째로 모든 이들이 앞선 민주주의의 조건들을 고르게 향유할 수 있어야 한다며 ‘포용(inclusion)’을 강조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이다.
4) 공동체성
아무리 자유로운 활동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진공’ 속에서 발생하는 것은 아니다. 학생자치활동도 학교라는 다양한 교육 주체들이 함께 어울려 지내는 공동체적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이다. 학생들 역시 학교라는 공동체 속에서 완전히 독립된 개인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공동체에 영향을 주고받는 ‘공동체적 개인’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학생들은 자신들에게 주어진 적절한 권한을 인식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행사하되 그러한 자율적 권한의 행사가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에게 끼치는 영향을 고려해야 하고 권한의 효과적인 행사를 위해 다른 공동체 구성원들과 협력해야 한다. ‘민주적 자치’를 주장한 헬드(Held, 2010: 526)가 사람들이 자기 자신의 삶의 조건을 돌아보고 그것에 영향을 미치는 사안에 결정권을 행사할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녀야 하며 동시에 ‘이런 틀을 타인의 권리를 부정하는 데에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5) 성찰성
앞서 주도성에 대한 설명 부분에서 잠시 언급되기도 하였는데, 어떤 활동을 해보는 것만큼 중요한 것은 자신의 활동을 돌아보는 것이다. 학생들은 자치활동의 과정을 돌아보며 자신들의 판단과 행동에 대해 책임지는 것을 배울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경험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은 듀이(Dewey)에 의해 특히 강조되고 있다. 그에 따르면, 경험은 단순히 ‘해 보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해 보는 것으로서의 경험은 변화를 가져오지만 그 변화는 만약 거기서 흘러나오는 결과라는 되돌이 물결과 의식적으로 관련되지 않으면 무의미한 옮김에 불과하다’(Dewey, 2007: 227). 따라서 우리가 경험으로부터 배움을 얻기 위해서는 ‘비록 불완전한 것이나마 사고가 반드시 개입되어야 한다’(234쪽). 요컨대 경험이 일시적으로 소비되는 것이 아니라 ‘누적적 성장’으로 의미를 지니려면 경험 그 자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 대한 성찰이 반드시 동반되어야 한다(228쪽).
3. 학생자치 활성화를 위한 학교와 교사의 역할
앞의 다섯 가지 원칙이 학생자치활동의 내실화를 위해 고려해야 할 것들을 제시했다면, 이하에서는 학생자치 활성화를 위해 학교와 교사가 어떤 역할들을 수행해야 하는지 간략하게 다루어보고자 한다. 여기서 제시된 학교나 교사의 역할은 서울특별시교육청의 자치활동 우수학교로 선정된 학교를 포함한 다양한 유형의 학교에서 자치 활동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교사(11명)와 학생(17명), 학생자치 나눔 컨설팅단 소속 교사(7명)를 대상으로 진행한 인터뷰를 바탕으로 작성된 것이다.
가. 학교의 역할
1) 학교의 문제를 나의 문제로 느끼게 하기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거의 모든 일들은 학생들과 직·간접적으로 관련된 학생들의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많은 학생들은 학교에서 발생하는 일을 ‘자신의 문제’로 인식하지 못하고 따라서 그 일에 관심을 갖고 그 일을 위한 행동에 나서기 주저한다. 학교마다 마련된 다양한 소통의 창구가 현실에서 존재만 할 뿐 제대로 활용되지 못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따라서 무엇보다 학교는 학생들로 하여금 학교에서 발생하는 많은 일들이 학생들과 밀접하게 관련된 문제라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것의 출발은 학생들과의 적극적인 정보 공유이다. 학교(학급)의 비전이나 가치에서부터 시작하여 크고 작은 학교의 사안들에 대한 정보의 공유 속에서 학생들은 자신들이 속한 학교의 행위 주체로서 고려되고 있음을 느끼게 되고 ‘소속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여기서 공유는 단순한 정보의 전달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을 학생이나 다른 구성원들이 자유롭게 활용할 여지를 함께 담고 있어야 한다. 예를 들어 새로운 학년이나 학기의 시작 단계에서 학생들과 함께 학교(학급)의 비전이나 가치 등을 나누는 활동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단순히 학교(학급)의 비전이나 가치 등을 함께 정하고 선언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과 시간이나 교과 외 시간 등에서 구성원들이 이를 자유롭게 활용하도록 장려하는 것이다(창덕여중 공동체, 2020: 36-37).
2) 실감나게 하기
학생들이 참여를 통해 변화를 실감하는 것은 자치활동을 지속하는 큰 동기가 된다. 반대로 학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가 ‘벽 너머로 사라지는 것’ 같이 느끼게 된다면 참여를 주저하게 된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학생자치기구 등을 통해 제기된 의견들에 대한 ‘공개적’이고 ‘공식적’인 피드백 절차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절차의 존재는 의견의 수용 여부와 상관 없이 아니 오히려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학생들에 의해 표명된 의견이 학교장 개인의 상황과 판단에 따라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정해진 절차에 의해 언제나 분명하게 전달되고 또 언제나 그에 대한 반응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학급 차원에서도 안건에 제안자의 이름을 함께 기록 하는 ‘안건 실명제’와 같이 학급회의에서 제시한 의견이 이후 대의원회나 학생회에서 어떻게 논의되었는지 확인할 수 있어야 한다.
변화를 실감하는 것에 더하여 실감나는 활동 또한 학생들의 참여를 북돋운다. 특히 학생들이 활동을 개별적으로 단순 소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활동 결과가 보다 많은 사람들과 함께 공유되고 확인될 수 있을 때 참여의 동기는 커지게 된다. 예를 들어 대의원회의를 ‘마치 국회방송에서 중계하듯이 전교생이 각 학급에서 시청할 수 있도록 방송부에서 직접 촬영해 생중계’ 한다고 생각해보자. 물론 그것이 ‘언변이 좋은 몇몇 대의원들에게 휘둘려 엉뚱하게 결론을 맺으며 끝나’버릴 수도 있겠지만, 학생들은 자신들이 학급에서 제기한 의견들이 실제 전달되고 논의되 는 모습을 지켜보며 이후 보다 적극적이고 진지하게 학급회의에 임할 여지가 생긴다(이민영 외, 2017: 149-151).
3) 시간 확보하기
어떤 문제를 왜 그리고 어떻게 다룰 것인지 서로 다른 관심과 역량을 지닌 학생들이 모여 논의하고 조정하고 시행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당연히 한 달에 한 번 이루어지는 학급회의 시간만으로는 혹은 점심 시간 이나 방과 후 시간과 같이 이른바 ‘짜투리’ 시간만으로는 학생자치활동이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다. 따라서 학교 교육과정 속에서 정기적이고 충분한 자치활동 시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학생자치활동은 창의적 체험활동(자율활동)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는데 이 시간에는 여러 법정 이수교육들도 함께 진행되고 있어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는 것이 쉽지 않다. 몇 가지 대안이 존재하는데 각종 법정 이수 교육들을 교과교육 과정 속에 포함하여 진행한다거나, 법정 이수 교육 자체를 학생자치활동의 일환으로 기획한다거나, 더 적극적으로는 창의적 체험활동의 절대시수를 증대시켜 자치활동 시간을 확보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무엇보다 학생자치 담당교사 혼자만의 노력으로 이루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학교교육 과정 편성 시기인 2월은 새 학기 운영관련 업무로 너무 바쁘고, 그 속에서 교육과정 편성은 그저 성취기준이나 ‘학사일정에 따른 진도표 작성’으로 귀결되곤 한다(김은주, 2017: 282). 여기에 학교별, 교과별 교사 수급의 문제까지 고려하면 학교교육과정이 한번 편성되면 해가 지나도 바뀌는 경우가 거의 없게 된다(홍제남, 2020: 178). 따라서 우선되어야 할 것은 학교장을 비롯한 교사 전반이 학생자치활동의 필요성과 중요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공감하고 이를 위한 시간 확보의 노력을 함께 기울이는 것이다.
물리적 시간을 확보하려는 노력에 더하여 학교교육 자체를 자치활동에 도움이 되는 방식으로 만들 수도 있다. 학생들의 자치활동이라는 것이 단순히 교과 외 시간에 이루어지는 ‘이벤트성 행사’로 국한될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자치는 <교육기본법>이나 국가교육과정 등에 명시되어 있듯이 자율적이며 책임있는 민주시민으로 성장하기 위한 모든 교육활동을 관통하는 핵심가치이자 원칙이다. 따라서 학교교육과정 전반을 ‘자치친화적’으로 만들 수 있다. 예를 들어 교과교육 시간에 앞서 제시한 다섯 가지 기본 원칙들을 고려한 수업을 진행할 수 있고, 또 한 학교 의 사례처럼 수업을 비롯한 모든 학교 내 활동을 자치역량을 증진시키기 위한 계기로 만들 수 있다. 이 학교에서는 ‘SELF’라 이름 붙은 하나의 ‘플랫폼’을 운영하고 있는데 SELF는 ‘Search, Event-planning, Learning, Feedback’ 의 약자로 학생들이 스스로 찾아보고, 계획을 수립하며, 이를 위해 필요한 학습을 하고, 활동 후에는 그 활동을 돌아보는 것을 의미한다. 이 SELF는 수업, 동아리 활동 등 학생들이 학교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준거가 되는 것으로 SELF 노트 또한 따로 존재하여 학생들은 자신들의 활동을 이 기준에 맞춰 기록하게 된다.
4) 적극적인 권한과 기회 부여하기
학생자치 활성화를 위해 보다 많은 영역에서 보다 많은 권한과 기회를 학생들에게 부여해야 한다. 참여를 통해 변화를 경험하는 것만큼 강한 참여의 촉매제는 없다. 물론 당장 학교의 모든 영역에서 학생들에게 권한을 부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학생회나 동아리와 같은 학생중심활동에서만큼은 학생들의 주도성이 충분히 발휘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능하다. 예를 들어 선거가 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듯이 학생임원 선발이나 학생회 구성은 자치활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학생들이 이때 다양한 선거제도와 보다 민주적인 조직 운영 방식들을 스스로 찾아보고 준비하여 실행에 옮겨볼 수 있도록 하면 어떨까? 아마 학생들은 정당 기반 비례대표제 방식을 도입할 수도 있고, 소수자를 고려한 학생회 구성 원칙을 정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학교라는 공간을 아이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의 실험 공간’으로 만드는 것이다(Pinar, 2010: xvi). 동아리 활동도 마찬가지이다. 학생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동아리를 만들어 함께할 친구들을 모집하고 운영에 도움을 줄 담당 교사를 추천할 수도 있다.
5) 모두의 참여를 위한 다양한 교육/활동 기회 만들기
서울특별시교육청은 모든 학생 하나하나가 각자의 잠재력과 개성을 발휘할 수 있는 이른바 ‘온리원’ 교육을 지향하고 있다. 1 학생자치활동도 그동안 학생회 중심 활동이라는 비판에서 벗어나 ‘모두를 위한 자치’로 거듭나기 위해 학교에서는 학생들의 개별성을 담아낼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무엇보다 학급자치를 활성화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데, 이는 다시 학급자치의 활동을 다른 대의원회나 학생회의 활동과 유기적으로 잘 연결시키는 노력과도 맞닿아 있다. 여기에 더해 학생들이 학교 곳곳에서 다양한 형태로 스스로 활동을 기획하고 실행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스웨덴에서 시민교육의 일환으로 3~5인 정도의 소규모 학습공동체를 적극 지원하는 것처럼 학교에서도 보다 ‘가벼운 공동체’에 대한 지원을 통해 학생들이 더 적은 부담으로 더 많은 활동을 스스로 기획하고 실행에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줄 필요가 있다(Manzini, 2019, 임현진, 2020: 27에서 재인용).
기존의 활동 방식 또한 아래로부터의 참여를 촉진하는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주로 학생회가 주도하는 다양한 학생 행사들도 반드시 학생회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도맡아 할 필요는 없다. 도시형 대안학교로 출발하여 현재는 경기도 혁신학교로 운영되고 있는 이우학교에서는 보다 많은 학생들이 여러 학교 행사들에 준비위원회를 만들며 함께 참여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었는데, 예를 들어 가장 큰 학생 행사라고 할 수 있는 학교 축제 역시 학생회가 ‘주최’하되 별도 준비위원회가 ‘주관’하는 방식을 택하였다(이우학교 십주년기념사업회, 2013: 219).
6) 안정적 활동을 위한 기반 구축하기
학교는 학생자치활동이 해마다 거의 새롭게 구성되는 학생임원이나 학생자치 담당교사에 따라 좌우되지 않고 안정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도록 기반을 구축할 필요가 있다. 학교 내 학생자치 관련 규정이나 지침들을 (정비가 아닌) 정리하거나, 학교가 학생자치활동을 위해 활용 가능한 인적, 물적 자원들을 확인 및 추가 확보하거나, 학교홈페이지 등을 활용해 그동안의 학생자치활동 자료들을 기록·보관하여 새로운 학생과 교사들이 손쉽게 도움을 얻을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여기에 더해 학생자치활동 담당교사를 위한 지원 노력도 반드시 병행되어야 한다. 현재 학생자치 업무는 많은 학교에서 온갖 학생 관련 일들을 떠맡아야 하는 일종의 ‘기피 업무’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럼에도 담당교사들이 지원 업무를 보다 효과적, 효율적으로 할 수 있도록 담임 배정 제외, 2인 담당 체제 구축, 학교장 및 일반교사 인식 개선 등의 조치를 적극적으로 고려해야 한다.
나. 교사의 역할
학생자치활동이라고 해서 그것이 학생만의 활동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 주도성을 소개한 OECD 보고서에서 ‘공동 주도성(co-agency)’이라는 개념을 함께 소개한 것처럼 학생자치활동 역시 교사와의 상호협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OECD, 2019). 더욱이 자치에 대한 인식, 관심, 경험이 낮은 상황을 고려할 때 교사는 학생들에게 적절한 자극을 주어 활동을 촉진하고 또 활동의 원활하고 내실있는 진행을 위해 다양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1) 제안자로서 교사
첫 번째는 제안자로서 교사의 역할이다. 학생자치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전반적으로 높지 않은 상황 속에서 교사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학생들이 자치활동에 대해 관심을 갖고 참여할 수 있도록 특정한 시기나 학교(학급)의 상황에 부합하는 다양한 활동을 기획하고 제안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학기 초에는 교육청에서 제작한 사례집이나 자치활동 매뉴얼 등을 활용하여 어떤 자치활동들이 가능할지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가질 수도 있고, 학기 말에는 학생들이 자신들의 활동을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를 마련하여 줄 수 있다. 다만 주의할 것은 이러한 교사 주도의 학생자치활동은 어디까지나 자치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낮은 단계에서 학생들의 의지를 촉발시키기 위한 최소한의 수준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학생들은 스스로 문제를 발굴하고 제기하기 보다는 주어진 과제를 수행하는 데 익숙해지게 된다.
2) 촉진자(연결자)로서 교사
두 번째는 촉진자로서 교사의 역할이다. 기본적으로 자치 담당교사는 학생들이 자치활동의 과정 속에서 주어진 일들을 잘 처리해낼 수 있도록 학교 안팎의 다양한 자원들을 잘 활용하고 지원해야 한다. 나아가 자치활동이 일단 시작되면 교사는 학생들이 해당 활동의 목표나 주제에 대하여 더 많이 생각하고, 더 많이 표현하고, 더 많은 활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촉진해야 한다. 이러한 과정 속에서 자치 담당교사는 물론이고 학교 내 모든 교원들 나아가 지역사회에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위한 ‘잠재적 촉진자’가 될 수 있도록 공감대를 형성하고 인력풀을 구성하는 노력도 필요하다. 학생과 학교 안팎의 다양한 (특히 전문적) 자원과 기회를 연결시켜 경험의 다양성과 질을 높이려는 ‘연결자’로서의 역할은 수없이 다양한 정보와 기술 그리고 새로운 활동 영역이 끊임없이 개발되는 미래사회에서는 특히 중요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엄윤미·한성은, 2020: 81-82).
3) 지지자로서 교사
세 번째는 지지자로서 교사의 역할이다. 마스켈라인과 시몬스(Masschelein and Simons, 2020: 44-45)에 의하면 학교는 학생들이 사회나 가정의 요구로부터 벗어나 자유롭게 ‘무엇이든 해볼 수 있는 평등과 자유의 시·공간’을 제공해 주어야 한다. 학교는 이렇게 평등을 전제로, 세계를 공공재로 제시하고, 그럼으로써 아이들로 하여금 ‘흥미와 호기심을 형성하고’, 아이들에게 실제 해보게 함으로써, 아이들이 ‘세계를 새롭게’ 하도록 돕는다(213쪽). 학생자치활동의 경우에는 더더욱 그러하다. 아이들은 교사가 자신들의 활동에 대한 ‘신뢰’와 ‘기다림’을 보여줄 때 새로운 시도를 이어나가게 된다. 교사는 학생들의 자치활동에 대하여 그것의 성공 여부와 상관 없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고 때로는 실패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학생들이 보다 편안한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실험(경험)들을 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4) 협력자로서 교사
네 번째는 협력자로서 교사의 역할이다. 교사는 학생자치의 모든 과정에서 학생과 동등한 입장에서 협력하는 존재여야 한다. 학생들의 자치활동을 ‘허락’하는 존재가 아닌 학생들과 함께 고민하고 협력하는 교사라고 할 수 있는데, 나아가 교사는 학생들의 활동을 ‘외부’에서 지켜보고 돕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경우에는 함께 활동을 진행하기도 해야 한다. 이렇게 함께 문제를 고민하고 해결하는 공동의 활동 경험 속에서 교사는 학생들에게 ‘자기 삶의 마디를 만들어가고 스스로 성장하는’ 동료 시민으로서 ‘삶의 모범’을 보일 수 있다(고병헌, 2020: 39-41).
4. 결론
코로나19라는 상황 속에서 아이들은 지난 한 해 많은 것을 잃었다. 무엇보다 아이들은 친구는 물론이고 사람들을 만나 함께 활동하며 보내는 시간을 잃었고, 그러한 활동을 통해 자존감, 소속감, 정체성 등 ‘튼튼한 마음’을 형성할 기회를 잃었다(김현수, 2020). 마찬가지로 대면 활동을 중심으로 해오던 학생자치도 제대로 이루어질 수 없었다. 본 연구를 위해 인터뷰에 응한 교사와 학생 역시 모두 아쉬움을 가득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화된 상황 속에서 변화된 방식으로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었다. 모두가 처음 맞이하는 코로나19라는 문제적 상황을 함께 공유하고, 그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또 교육 활동을 계속해나가기 위한 노력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역수칙을 널리 알리기 위한 비대면 활동, 온라인으로 진행된 교장 선생님 환송회, 힘든 시기를 보내는 서로를 위로하기 위한 음악회와 시낭송회 등 온·오프라인 공간을 활용한 자발적 노력들이 지속되었다. 위기의 상황에서 보여준 이러한 모습들, 즉 조금은 서툴고 부족하고 그래서 조심스러울지 몰라도 스스로 고민하고 실천하며 성숙해 가는 것, 이것이 자치가 필요한 이유이고 자치의 힘일 것이다. 코로나19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지만 다가오는 새로운 학기에는 더 많은 새로운 활동들을 함께 모색하고 실천할 수 있길 바란다. 그래서 밀(Mill, 2015: 113)이 표현했듯, 학생들이 ‘내면의 힘에 따라 온 사방으로 스스로 자라고 발전하려 하는 나무’처럼 성장하길 또한 바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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