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획2024 봄호(254호)

건강한 관계맺기를 위한
학교공동체 세우기
: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하다

박희진 (계명대학교, 교수)

매 학기 초에 교육학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본인이 가지고 있는교육에 대한 인상, 정의, 바람을 한두 단어로 표현해 보라고 주문한다. 첫 강의, 낯선 이들 앞에서 본인의 생각을 솔직히 이야기하는 것이 어렵지 않을까 우려하지만 정작 학생들은 거침이 없다. ‘성장’, ‘필수’, ‘평생’, ‘학생’, ‘교사와 같이 무난한 답을 하는 학생이 다수이다. 하지만 온라인 보드에학생이라는 죄로 학교라는 교도소에서 일어나는 일로 요약되는, 인터넷상에서 떠도는 글을 복사해서 붙여놓는 학생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부류의 글에 대한 나머지 학생들의 반응이다. 부정적인 반응은 찾아보기 어렵고 오히려 재치있으면서 그럴듯한 비유라는 반응을 보인다. 교직을 희망하여 교육학 이론 강의를 수강하는 학생들의 이러한 반응에 적잖이 실망스럽지만, 비단 강의 수강생들만의 시각은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씁쓸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더 크다.

학교에 대한 섣부른 추측에서 비롯된 문제가 아닐까?

한 공중파 예능 프로그램에서 비슷한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다. 연사로 나선 저명 건축가가 한국 사회 창의력 부재의 문제를 주제로 삼아 강의하면서 학교를 교도소에 비유했다. 심지어학교와 교도소는 식판으로 식사하는 유일한 곳이다. 우리는 다들 판상형 아파트에서 살면서 자녀를 아파트 상가에 있는 학원에 보낸다. 이러니 창의력이 자랄 틈이 없다.”라는 요지의 주장을 펼쳤다. 카메라에 잡힌 패널들의 얼굴은 안타까움으로 가득했다. 반박하는 사람은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이 건축가가학교가 그러하다.”라고 주장할 때, 본인의 고등학교 시절 경험과 당시 시설을 인용하며 설명했다는 것이다. 지천명을 훌쩍 넘긴 이 건축가가 족히 30년은 지난 기억을 근거 삼아 한국 사회 문제의 원인을 현재 학교교육에서 찾을 때 대부분의 청중은 큰 깨달음을 얻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식판과 박스형의 학교 건물, 아파트 상가가 왜 문제인지에 대해 질문하는 패널은 없었다. 식판은 편리한 식기일 따름이고, 18살의 나이로 반 클라이번 콩클에서 우승하면서 세계적인 피아니스트로 발돋움한 임윤찬은 아파트 상가 피아노 학원에서 처음 피아노를 접하고 재능을 발견했음에도 말이다.

이 강의 장면이 별문제 없이 송출된 것을 보면 해당 발언은 프로그램의 취지에 크게 어긋남이 없었던 것같고, 방송 후에도 이렇다 할 소동이 없었던 것을 보니 한국 사회정서에도 크게 위배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렇다면 이 건축가의 말, 그리고 그에 대한 패널과 청중의 반응이 학교교육에 대한 한국 사회 구성원의 인식을 어느 정도 드러내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한국 사회의 주요 언론과 매체를 통해 오피니언 리더들의 기억 속 학교, 특히 입시와 시험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흔한 일이다. 입시철이나 주요 교육정책 변화가 있을 때면, 교육 외 분야 전문가들이 30~40년 전 혹은 심지어 50년 전 본인의 학창시절을 회고하면서 그 기억을 근거로 오늘 우리 학교교육의 개선점과 방향을 논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논의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의 학교 시설과 문화, 교원의 역량과 자질, 교수·학습 평가 방식에 큰 변화가 없었다는 점이 선행적으로 입증되어야 할 것이다. , 논의의 주된 근거가 한 사람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오래전 학교의 단편이기에 이를 근거로 오늘 우리가 당면한 학교교육의 방향이나 입시와 같은 중요한 사안을 논의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인용한 기억이 과거의 학교에 대해 정확하고 대표적인 정보를 포함하고 있어야 하고, 더불어 그 정보가 오늘 우리 학교의 현실과 큰 차이가 없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학교를 교도소에 비유하는 강연이 공중파를 통해 대중에게 전달되기 전에, 대한민국의 학교가 지난 30~40년 간 같은 모습으로 구성원들을 옥죄이고 있는 공간에 머물러 있는 것이 사실인지, 너무도 답답하고 열악한 곳이라서 심지어 교도소에 빗대어 비판해도 될 만큼 형편없는 곳, 억압적이고 비교육적인 곳인지, 오늘날 우리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근본적으로 창의적일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진지한 물음과 확인 절차는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이를 접한 대중들 또한 교육 외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있는 한 사람의 오래전 학창 시절의 기억에 의존해서 오늘의 교육을 논하는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거나 비판적이기보다 허용적, 수용적인 태도를 보인다. 지금 우리의 관심 속 학교는 2024년 현재 대한민국의 학교인데도 말이다.

학교교육에 대한 비판에는 허용적이지만, 성취에는 비관적

역설적이게도 지난 반세기 동안 대한민국 학교교육은 국제 사회에서 특별한 예시로 거론될 만큼 많이 변화, 발전한 것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지난 2015년 인천 송도에서 15년 만에 개최된 유네스코의 세계교육포럼에서 전 세계 200개 가까운 국가의 대표들이 대한민국 교육 발전의 역사와 특징에 대해 귀를 기울이는 시간이 별도로 마련되기도 했다. 한국의 교원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문성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고, 학교교육의 성과, 형평성 지표에서 우리나라 교육은 항상 우수 사례로 거론된다. 물론 이와 같은 국제 사회의 한 줄 세우기가 가지는 문제점과 한계도 있다. 그런데 정작 한국 사회 언론과 여론이 주목하며 비판하는 쟁점은 불완전하고 오류를 내재한 국제 사회의 평가 지표나 랭킹 시스템, 그리고 이의 오남용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국 교육의 우수한 성과에 관한 의구심이다. 매우 높은 랭킹을 보일 때는점수가 높다고 해서 성과가 좋은 것은 아니다.”라는 논조의 비판이 대대적으로 이루어지고, 그 랭킹이 몇 단계 낮아지면 순위에서 밀린 것이 이슈가 된다. 비슷한 수준을 보이는 싱가포르나 핀란드의 사례는 탐방과 학습의 대상이 되지만 정작 오늘 우리 학교교육의 성취에 대한 관심은 그렇게 높지 않은 것 같다.

그렇다면 왜 한국사회 교육분야 외 전문가들의 개인적 기억에 의존한 학교교육의 문제 진단 혹은 해법 찾기에는 지나칠 정도로 허용적이면서, 그 성취에 대해서는 이토록 비관적인가. 이러한 한국 사회의 학교교육에 대한 시각이 오늘 우리 교육공동체가 마주한 위태로움과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닐까. 지금 우리 학교는 그동안의 성과를 뒤로하고 다시금 공동체를 세우는 과업을 마주하게 되었다. 건강한 교육공동체가 무엇인지, 어떻게 재건할 것인가에 대해 논의하기 위해서는 학교교육에 대한 우리 사회의 시각을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학교교육을 논할 때 우리는 동일한 가치를 지향하고 있는지, 그 가치는 우리 공동체가 지향할 만한 것인지 먼저 확인해 보자는 것이다.

공동체의 가치를 전제로 하는 조직, 학교

프랑스의 사회학자이자 교육학자인 에밀 뒤르켐(Emile Durkheim)은 교육을 곧 사회화라고 주장하였다. 민중이 지배하는 공화국, 프랑스의 학교교육 목표는 마땅히 시민 사회의 건강한 일원을 길러내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그리고 그는 건강한 시민은 공동체의 가치를 내면화하고 재생산하는 존재라고 보았다. 직업 세계에서 필요한 기능과 지식을 연마하는 일 또한 사회화의 중요한 영역으로 간주하였다. 개인의 성장을 오롯이 개인의 것으로만 보지 않고 공동체의 맥락에서 이해한 것이다. 후에 그는 공동체의 가치를 내면화하는 전자의 사회화를보편 사회화’, 직업적인 훈련과 전문성 고양을 강조하는 후자를특수 사회화로 구분하여 설명한 바 있다. 그리고 공동체는 저마다의 의식과 의례(rituals)를 공유하고 전수하면서 결속을 다지고 유대감을 강화하는 방식으로 영속된다고 보았다. 다시 말해서 학교와 공교육은 근본적으로 한 사회 공동체의 구성원에 관한 것이며, 그 공동체가 부여하는 의미를 수행하는 기관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 사회가 바라는 학교의 모습은 어떠한가, 학교교육에 관한 비판과 논의가 과연 학교교육을 통해 공유할 우리 공동체의 가치를 염두에 둔 것인가.   

미래학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인류의 역사도 유사하다. 하라리는 자신의 글로벌 베스트셀러 『사피엔스』(2011)를 통해 인류사를 조망하면서 사피엔스가 유일한 인류로 생존한 비결은 다름 아니라 유연하게 사회적 협력을 이룰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바로 상상 속에 존재하는 것들을 함께 믿을 수 있는 독특한 능력, 공동의 신화라고 역설했다. 공동체를 이루어 공유할 의미를 창조함으로써 위기를 극복하고 임계치를 뛰어넘는 경험을 계속할 수 있었고, 결국 사피엔스만이 현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사람들은 더욱 복잡한 이야기의 네트워크를 만들어내고, 가상의 실재’, 혹은사회적 구성물로서 우리가 공유한 이야기가 곧 우리를 생존하게 한 키워드가 되었다는 것이다. 다른 종에 비해 우리 인류가 가진 힘이 강하거나 특별하기 때문이 아니라, 다만 우리에게는 우리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공동체가 해체되지 않고 유지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후작 『호모 데우스』(2015)에서 하라리는 개개인의 믿음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의사소통에 의존한 믿음, 즉 상호주관적 실재를 구성하는 일이 역사의 주요한 동인이 되었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상호주관적 의미망의 상실, 공동체가 함께 창조하고 부여하는 의미의 상실은 미래에 관한 우리의 예측을 서늘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우려한다.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물음이 우리의 존재와 의미를 앞서 견인하는 것을 그대로 둔다면 말이다.

학교교육을 통해 공유해야 할 가치와 기대

다시 한국 사회에서 학교는 어떤 곳인지, 학교교육을 통해 우리가 구성하고 공유하며 재생산하고자 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질문해 보자. 혹 우리가 학교를 통해 묻고 있는 질문은 우리의 존재와 의미에 관한 것이기보다 낱낱의 개인이 저마다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에 치우쳐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다. 대한민국 대부분의 구성원은 학교에서 긴 시간을 보낸 경험이 있다. 학교는 저마다의 머릿속에 저절로 상당한 분량의 기억을 축적하고 자리 잡는다. 영국 공영방송에서 전 세계에서 제일 어려운 시험이라고 보도할 정도로 악명이 높은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있는 날이면 인천국제공항 비행기의 착륙이 지연되는 것이 마땅할 정도이다 보니 입시에 대한 개인의 기억은 더욱 강렬하다. 그것은 단 하루만의 경험이 아니다. 영어 듣기 시험이 있는 날에는 대규모 산불이 발생하여 시급한 진압이 필요할지라도, 혹 소방서 헬기 소리가 방해될까 하여 소방관들을 강제 휴식시킬 정도로(NEW1, 2023. 4. 1.) 일상에서 반복적으로 강화된경험이다. 이렇게 강화된 경험으로 입증한 학교를 통해 우리 공동체가 지향해온 가치는 무엇인가. 혹 주변의 타인이나 심지어 내가 속한 공동체가 위험과 희생,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개별 학생들이 시험 성적에서 손해를 보는 일이 없도록 만전을 기해야 한다는 것이 우리 사회가 학교교육을 통해 우선적으로구현하고자 하는 가치인가.

학교교육의 가치와 방향을 재점검하는 과정에서 국제 사회의 최근 교육 논의를 참조해 볼 수 있을 것이다. 21세기를 맞이하면서부터 국제 사회에서는 교육 부문에서 공유해야 할 우선적 가치를 규명하기 위한 뜨거운 논의를 진행한 바 있다. 불확실한 미래사회를 가장 효과적으로 대비하는 방법이 교육을 통한 준비라는 논리에서 비롯되었다. 대표적인 결과물로 2015년 세계교육포럼과 인천선언, 같은 해 국제연합(UN: United Nations) 총회를 통해서 결의한모든 이를 위한 질 좋은 교육(quality education for all)’ 및 세계시민성 함양을 포함하는지속가능한발전목표(SDGs: Sustainable Development Goals)’가 있다. SDGs는 범세계 국가 차원의 목표라는 점에서 상징성이 있지만, 교육목표가 다른 여러 발전 목표와 함께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수사적 선언으로 그칠 한계가 있다.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Organis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에서도 미래사회를 대비한 교육 방향에 관한 논의를 계속해왔는데, 사실 OECD 교육 2030(OECD Education 2030: The Future of Education and Skills)은 최근 국제 사회의 가장 주목을 받는 교육 논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주목할 것은 OECD가 수년간의 국가 간 협업을 통해 도출한 교육의 가치와 목표이다. 바로 학생 행위주체성(student agency)의 구현을 미래사회 인재상으로 제시한 것이다(OECD, 2018a; OECD, 2018b; OECD, 2019). 문화, 사회, 경제, 과학, 환경 등 모든 분야에서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과 불확실성의 수준이 높은 시대가 예견되면서, 변혁적 주체로서의 인간상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기 자신의 웰빙뿐만아니라 타인과 공동체의 안녕, 나아가 환경에 이르기까지 더 나은 상태로 만들 수 있는 존재를 길러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위기와 불안함이 가중되는 시대에 우리는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유연한 사회적 협력이 가능한 존재의 구현이라는 사피엔스의 숙명을 다시금 마주한 것이다.

학교교육조차 소비재로 환원해버리고 있지는 않은지

OECD가 제안한 인재상인 학생 행위주체성은 2022 개정 교육과정과 교육정책에도 반영되고 있다. 국가 교육과정에서는 2007 개정 교육과정에서부터 이어져 온 미래 핵심 역량 논의의 맥락 속에서 자기 관리 역량, 지식정보처리 역량, 창의적 사고 역량, 심미적 감성 역량과 같은 개인적 차원의 역량과 함께 협력적 소통 역량과 공동체 역량과 같이 공동체 구성원으로서 요구되는 역량이 지속적으로 제시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제 사회의 논의, 국가교육의 방향과 목표가 실제 교육정책과 학교교육 현장에서 충분히 공유되고 제대로 구현되고 있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말 그대로 경제 협력과 개발을 위한 국제기구인 OECD에서조차 교육 논의를 개인의 이익을 초월하여, 주변 타인과 공동체와 환경을 염두에 두고 진행하고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한국 사회 학교교육 논의에서는 마치 교육이 소비재로 환원해버린 것 같은 현상이 목도된다. 일례로, 중앙정부의 정책 논의에서조차 교육수요자, 공급자, 교육서비스와 같은 용어가 무비판적으로 사용된다. 이런 언어의 사용은 마치 학교교육 또한 일정 비용을 치르면 사용자가 만족할 만한 서비스나 재화가 공급되어야 하는 것처럼 오해하게 만들기 십상이다. 공교육에서 소외되는 학생이 단 한 명도 없어야 하기에, 눈앞에서 비용을 지불하는 소비자에게 제공되는 서비스나 제품의 품질을 확인하는 것과 같이 교육의 질 제고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과 같은 순수한 의도일 수 있다. 하지만 자칫 공교육의 가치조차 소비재로 환원해버리는 위험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 학생과 학부모가 스스로를 소비자 혹은 고객으로 인식하고, 제공되는 교육서비스가 개별 욕구를 충족시켜줘야 한다고 기대한다면 교원과 학교에 무리한 요구를 하게 될 여지가 생길 수 있다.

실제로 지난 반세기에 걸쳐 대한민국은 교육 기회의 비약적인 확대와 공교육 기관의 발전을 경험했다. 더불어 지난 10여 년간 우리의 학교 현장에서는 상당한 개혁, 혁신의 열매를 거두었다. 위로부터의 요구가 아니라 교원이 자발적으로 시작한 학습모임들이 전문학습공동체로 정착되었고, 학교 개혁과 수업 개선의 노력이 혁신학교 정책으로 수용, 확대되었다. 학교공동체를 세우고 가꾸기 위한 노력에도 상당한 진전이 있었다. 학생, 교원, 학부모가 학교교육의 주체가 되어 소통하고 협력하기 위한 다양한 실천이 있었으며, 이제는 학교공동체의 범위를 확장하여 학교 행정직원과 지역사회 주민에 이르기까지 적극적으로 포섭하여 교류하고 협력하고자 하는 노력이 다방면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마을교육공동체 논의도 이 중 하나이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어쩐 일인지 학교현장에서 소위 민원으로 어려움을 겪는 일이 증가하고 있는 것 같다. 예비교원들을 대상으로 한 강의에서 학부모의 교육 개입이라는 화두를 던졌더니, 학생들은 학부모의 민원으로 해석하였다. 학교 현장의 이와 같은 어려움이 일부 학부모나 학교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에는 공교육 정상화 담론이 끊이지 않는다. 특히나 사교육비와 사교육 영향의 증대, 학부모에게 가중되는 부담 등의 맥락 속에서 공교육 질 제고에 대한 요구는 거세진다. 그런데 과연 학교교육에 모자람이 많아서 한국 사회 사교육 시장이 확대되고 그 영향력이 커지고 있는 것인가. 오히려 학교교육이 가지는 미래적, 공동체적 가치가 아니라, 개인의 끊임없는 욕구라는 잣대로 학교교육의 가치를 평가하고있기 때문이 아닐까. 학교교육의 노력과 성과를 우리 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과연 교육제도나 정책의개선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인가

좋은 교육 제도와 정책이 마련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겠지만, 제도가 바뀐다고 해도 근본적인 문제는 해결되지 않을 수 있다. 일례로, 자유학기제나 고교학점제와 같은 새로운 정책 실행 이면에서 발생하는 민원과 불만, 애로의 성격을 살펴보면 학교를 바라보는 도구적 시각이 고스런히 드러날 때가 있다. 아래는 한 교육청 고교학점제 담당 장학사가 겪은 일이다. 아직은 시범 운영 단계에 있는 고교학점제 시행 중에 발생하는 애로사항의 예시로 등장한 내용이다.

이 일은 강좌 편성과 개설 과정에서 발생했다. 하지만 강좌의 주제나 우수한 강의자 섭외와 같은 교육 내적인 사안은 아니다. 고교학점제 수강 신청 과정에서 본인이 수강할 의사가 없더라도 일단 여러 과목을 선점을 해버리는 학생들로 인해 발생한 일이었다. 사전 수요 조사에서 수강 의사를 밝힌 적이 없고 실제 수강할 계획이 있지 않더라도 일단 여러 과목을 선점해서 나의 이익을 최대한으로 보장해두고자 한 학생들의 욕구 표출과 그로 인해 도미노처럼 발생해 버린 폐강, 수강 신청 실패에 관한 일이다. 아직 시범 단계에 있는고교학점제 시행과 이를 통한 다양한 교과목 개설이 이미 개인의 입시 준비 과정에서 유리한 입지 선점이라는 욕망의 관점에서 해석되고 소비되기 시작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 이 과정에서 타인과 공동체에 대한고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당초 수강 의사와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과잉 선점으로 마감된 강좌를 신청하지못 하게 된 학생들, 과잉 선점 이후 수강 철회한 학생들로 인해 폐강된 강좌들,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피해자와 행정 비용에 대한 고려 말이다. 다양한 고교교육 과정 개설을 위해 학생들의 진로, 진학 경험을 지원하고자 한 정책이 단지 개인의 이익만을 위한 선택과 소비재로 전락해버린 것은 아닌가 말이다. 뜻하지 않게 수강 신청에 실패한 학생과 학부모는 맞닥뜨린 불이익에 대해 거세게 항의하지만, 이 또한 배움과 학습의 손실에 관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오히려 개인적 차원의 욕구 충족 전략의 실패를 항의하는 것에 가깝다.

물론 제도적인 보완을 통해 예상되는 어려움과 문제점을 줄여가는 노력이 필요하다. 시범 운영 단계에서 이와 같은 경험을 수집하는 것 또한 제도의 점진적인 개선을 위한 노력 중 하나이다. 그러나 제도와 법이 세세하게 만들어지고 적용될수록 치러야 할 비용 또한 커진다. 제도와 법으로 규제하고 규정하지 않아도 교육공동체의 구성원들이 고려하고 지켜야 할 가치가 필요한 것이다.

관계가 중요하다

학자들은 공동체가 함께 창조하고 부여하는 의미와 이로 인한 연결망의 유용성을 사회 자본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공동체 안에서 관계망을 이루고 작동하게 하는 가치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바로 연결망 내 구성원들 간 상호 의무와 기대, 신뢰, 호혜적 규범과 효과적인 제재 장치가 공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공공의 이익 창출을 염두에 두고 대단위 연구를 수행한 하버드대학의 정치학자 로버트 푸트남(Robert Putnam)은 호혜적 규범과 신뢰성을 사회관계와 함께 사회 자본의 핵심 구성 요소로 보았다. 대표적인 저서 『Bowling Alone(1995, 2020)을 통해 미국에서 볼링을 즐기는 사람의 수는 더 늘었지만, 볼링 클럽에서 활동하는 사람은 줄었다는 점에 주목하여, 미국 내 사회 자본의 감소와 이의 사회적 영향 관계를 경험적 자료를 통해 입증하였다.

개인의 행복감이나 가까운 친구의 수 같은 지극히 개인적인 부문의 부정적인 영향에서부터, 지역사회 구성원들에 대한 무관심이나 참여율 저조, 정치에 대한 무관심과 혐오, 민주주의의 퇴보에 이르기까지 사회 자본의 전방위적인 영향 관계를 살펴본 것이다. 특히 사회가 다원화, 다양화, 다인종화되면서 끈끈한 관계(bonding capital)와 교각으로 연결된 관계(bridging capital) 두 가지 모두가 중요하고 강조하였다. 끈끈한 관계는 나와 나이, 종교, 이주 배경 등이 유사한 사람들 사이에서 맺어지는 관계를 뜻하고 교각으로 연결된 관계는 다양한 사람들을 가로지르며 맺어지는 관계를 뜻한다.

하지만 사회 자본에 관한 논의를 관계조차 전략적이고 유용한 방향으로 맺어야 한다는 도구적 접근으로 호도해서는 안 된다. 사람 간의 관계조차 자원이자 수단으로 전락시켜버리는 시도는 의문의 여지가 없는 경계의 대상일 따름이다. 문제는 한국 사회가 유례없이 강력한 금권주의적, 물질주의적 사회로 변모해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미국 퓨리서치센터의 2021년 조사에 의하면 조사 대상국 중 유일하게 한국사회 구성원들은 물질적 행복(marterial well-being)을 자신의 삶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라고 응답한 것으로 드러났다. 다른 대부분의 국가 구성원들은 가족을 최우선의 가치라고 응답하였다는 점에서 구분된다. 더군다나 한국 응답자의 62% 2, 3순위에 대한 응답을 하지 않고, 한 가지만을 우선되는 가치로 꼽았다는 점에서 집중도가 매우 높았다. 삶의 최우선순위로써 자신의 물질주의적 지향에 대해 매우 분명한 입장을 표명한 응답자가 많았다는 것이다. 비슷한 현상이 공공도서관 희망도서 신청 목록에서 드러났다. 2023년 지자체가 운영하는 도서관 중 다수가 재테크 분야 희망도서 구입 신청을 잠정 보류, 혹은 중지한다는 공고를 게시하였다. 주식, 부동산, 가상화폐와 같은 분야의 도서 구입 신청 비중이 지나치게 높은 데다가, 해당 분야의 책이 도서관의 비치용으로 적절하지 판단 때문이었다. 예상되는 민원과 불만에도 불구하고 도서관의 공공성을 지키기 위한 담당자의 직업 윤리 의식의 발로로 평가된다.

사회 자본의 개념이 유용한 것은, 오히려 사람과 관계가 중요하다는 근본적인 이치를 효과적으로 일깨우는 데 있다. 구성원들 간 상호 의무와 기대, 신뢰, 호혜적 규범과 효과적인 제재 장치를 통해 긍정적인 사회적인 행위와 가치 규범이 지켜져 왔기 때문이다. 또한 부정적인 행동의 경우, 이를 효과적으로 제재하여 공공의 가치와 선을 유지하면서 공동체가 존속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물질주의적, 금권주의적 사회에 속한 학교 안에서 구성원들이 신뢰와 호혜적 관계를 회복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사회가 학교교육을 바라보는 시선이 개인 욕망의 중심에 머물러 있을 때에도 여전히 학교공동체 내에서, 그리고 지역사회와의 관계 속에서 하라리가 말하는 유연한 사회적 협력이 가능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함께하는 목표가 중요하다

이스라엘에 거주하는 유대인들과 팔레스타인의 관계는 갈등을 대변하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하지만 이들 간에도 공존과 공생을 위해 노력하는 단체들이 있다.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적용하면서 유대계와 팔레스타인계 아동·청소년이 함께 참여하는 프로그램의 효과와 한계가 보고되기도 한다. 하지만 갈등 당사자가 단순히 한자리에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해서, 고든 올포트(1954)의 접촉 이론에서 말하듯 접촉의 빈도가 증가했다고 해서 갈등 당사자 간 상호 신뢰 구축과 소통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닌 것으로 나타났다. 더불어 정확한 지식과 정보를 통해 오해를 해소하고, 갈등의 원인에 대해 인지적으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특히 동일한 목표가 주어질 때 갈등과 긴장의 강도가 경감되고 소통과 신뢰가 증가하는 것으로 보고되었다. , 함께하는 목표가 중요한 것이다.

상대방을 악한 존재, 소통이 불가한 존재로 규정해버리는 순간 문제의 해결은 요원해진다. 협상 전문가인 Fisher Ury는 저서 『Getting to yes(2011)에서 심각한 갈등의 상황에서조차 상대와 내가 중재, 갈등의 종식, 혹은 평화와 같은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이 첫 번째 걸음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지금 현재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현상만을 볼 때는 상대방과 내가 원하는 바가 분명히 다르고, 입장 차이가 분명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공통적인 목표를 찾을 수 있고 찾아야만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적국이 협상 테이블에서 마주하고 있다 할지라도, 서로가 원하는 것은 파국이나 공멸이 아닌 해결과 평화라는 점을 공통의 목표로 분명히 인식해야 기꺼이 함께 소통하고 해결책을 모색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학교교육공동체가 건강하게 재건되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오랜 기간 우리 사회가 덧씌운 학교에 대한 오해와 짐을 하루 아침에 벗을 수는 없다. 학부모가 가진 불안을 완전히 잠재울 수 있는 방법도 없다. 교사가 겪고 있는 박탈감을 온전히 해소할 수 있는 방법 또한 찾기 어렵다. 우리가 가진 문제를 온전히 잠재울 수 있는 제도나 정책이 있을리 만무하다. 불안한 학부모, 지친 교사, 학교에 대한 왜곡된 시선을 거두지 않는 사회구성원들이 각자의 주장이나 방식으로 학교공동체를 세워갈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포기하게 되면 결국 가장 어려움을 겪게 되는 것은 우리 아이들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러함에도 우리 아이들의 미래와 웰빙을 공통 분모로 공유하고 있는 것, 이것이 시작점이다. 유발 하라리가 말하듯, 우리 아이들을 위해 들려줄 새로운 이야기를 찾기 시작해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