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마당2022 여름호(247호)

건강 불평등의 사회적 책임에 대하여
-김승섭의 『우리 몸이 세계라면』을 읽고

남선진(창북중학교, 교사)1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교사로서 나는 어떤 태도를 가지고 교육에 종사해야 하는가 종종 생각한다. 내가 역사를 가르치는 목적은 무엇일까, 우리 아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자라나길 원하는 걸까, 그래서 난 결국 그런 모습을 갖출 수 있도록 교육하고 있는 걸까 등에 대해서 말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나는 비판적 사고력을 갖추고 소수자에 마음을 쓸 줄 알며 부당한 것을 참지 않고 해결하려고 하는 그런 시민을 길러내고 싶어 했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렇기 위해서는 교사 스스로도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이 예리해야 한다. 이 책은 그런 예리함을 유지하게 해 준다. 과학 혹은 지식이라는 것이 얼마나 권력에 가까이 있을 수 있는지, 우리가 인지하거나 인지하지 못하는 불평등이 얼마나 건강과 죽음의 불평등을 가져오는지, 사회적 시스템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당위에 질문하는 우리의 자세가 얼마나 필요한지. 이 책은 간결한 문장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고 있다.

지식의 사회사: 담배 회사는 어떻게 지식 생산에 관여하고 있나

흡연자에 대한 사회인식은 날로 나빠지고 금연 캠페인, 금연 교육은 교육현장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흡연은 지속되고 있다. 담배 포장지에 혐오스러운 사진을 넣고, 금연 광고를 내보내고 있음에도 말이다. 저자는 여기에서 담배 회사의 마케팅과 지식 생산을 지적한다. 담배 회사는 담배의 유해성에 대해서 사실 명확히 알고 있었다. 담배 회사의 모델이 사장에게 왜 당신은 흡연하지 않느냐고 물었을 때 한 그의 대답, “우리는 흡연하지 않고 그저 팔 뿐이지요. 우리는 그 권리를 젊은이, 가난한 사람, 흑인, 그리고 멍청한 사람들을 위해서 남겨둡니다.”라는 말에서도 우리는 그들이 유해성을 알고 있었음을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담배 회사는 그들의 생존을 위해 담배의 유해성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떨어뜨려야만 했다. 그것은 과학자들과의 공고한 관계로 가능했는데, 대표적인 예가 오스트리아의 생리학자 셀리에 박사이다. 오랜 기간 담배 회사의 펀딩을 받은 셀리에는 스트레스를 현대인 질병의 발병 원인으로 꼽으며 흡연과 질병 발생 사이의 인과 관계를 흐리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 최근에는 필립 모리스라는 담배 회사에서 ‘연기 없는 세상(Smoke-Free World)’이라는 재단을 만들어 막대한 투자를 진행했다. 재단의 이름은 마치 담배가 없는 세상을 꿈꾸는 것 같은 뉘앙스를 주지만, 기만적이게도 이 재단은 연기가 나는 궐련 담배가 아닌 전자 담배로의 새로운 시장 전환을 꿈꾸고 있었다. ‘연기 없는 세상’은 궐련 담배보다 전자 담배가 훨씬 ‘덜 위험’하기 때문에 전자 담배를 ‘권장’한다. 여기에서 우리가 던져야 하는 질문이 떠오른다. ‘보다 안전한 담배’라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비흡연자들을 배려한 간접흡연이 없는 ‘연기 없는 세상’이 과연 맞나?

문제는 담배 회사들의 과학자 지원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이렇게 수행된 연구 결과들을 과연 신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실제로 저자는 1998년 《미국의사협회지》에 출판된 논문 「왜 간접흡연의 건강 영향에 대한 종설 논문은 다른 결론을 가지고 있는가」를 통해 근거를 제공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막대한 자금력은 여전히 지식의 생산에 영향을 미친다. 지식의 생산이 항상 윤리적일 수 없다는 사실은 참으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다. 저자의 지적과 마찬가지로 왜 어떤 지식은 마케팅을 위해 재생산되고, 어떤 지식은 생산되지 않는가의 문제는 과학자들이 함께 성찰해야 할 지점임이 분명하다. 학교에서 진로지도를 할 때, 학급의 한 학생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예전에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었어요. 개발도상국이나 저기 멀리 있는 국가들에 꼭 필요한 약들이 있대요. 그렇지 않더라도 난치병들도 약이 필요하고요. 그런데 그 약이 개발되지 않는대요. 왜냐면, 돈이 안 되니까요. 정말 이기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그래서 꼭 신약을 개발하는 과학자가 되고 싶어요.” 책을 읽으면서 그 학생이 문득 떠올랐다. “어쩜, 그대로네.” 혼잣말을 하면서, 이런 사회가 이어지지 않도록 가치를 생각하는 과학자가 길러지고 있는 것인지 조금 궁금해지면서 말이다.

제국주의와 과학: 몸에 새겨진 인종주의, 그리고 식민지

과학이 권력과 힘을 합친 예는 이밖에도 많다. 역사교사로서 개인적으로 바라볼 때 과학이 역사적으로 가장 정치적이었던 시기를 꼽는다면, 아마도 19세기가 아닐까 한다. 19세기는 ‘과학’의 이름으로 인종을 구분하고, 우열을 가리던 시기였다. 다윈의 진화론은 사회진화론으로 응용되었고, 곧 ‘우월한 백인’ 이 ‘열등한 흑인과 아시아인’들에게 문명을 전해주는 것은 백인들의 ‘명백한 운명’이라는 논리가 만들어졌다. 그리고 흑인들의 열등함을 증명하기 위해 서양에서는 두개골의 치수를 재고, 혈액형과 신체를 비교하면서 과학으로 인종주의의 존재가치를 입증했다. 이런 경향은 20세기 우생학의 발전으로 이어져 비극적 결과들을 초래했다.

서양의 대열에 합류한 일본도 마찬가지여서, 그들은 동일한 아시아인임에도 불구하고 체질인류학과 혈액형의 분석을 통해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열등하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증명하려고 했다. 지금으로서는 어처구니없어 보이는 결과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의 이름을 빌린 이 논리는 저자의 말 그대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2등 시민으로서 식민지 조선인들의 위치를 단단히 자리매김시켰기 때문이다. 이러한 2등 시민으로서 조선인들의 위치가 건강의 불평등을 야기했다는 점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사실 이러한 인종주의가 얼마나 허구적이고 만들어진 개념인지에 대해서는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어도 알 수 있다. 얼마 전 학생들과 수업에서 “민족과 인종은 존재하는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자, 플래시 대 퍼거슨 판결2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플래시를 흑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백인이라고 볼 수 있을까? 같은 언어와 습속과 아이덴티티를 공유하고 있다면, 요즘 나오는 조○단은 우리 민족일까, 아닐까?”가 질문이었다. 학생들은 짧은 시간 속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고, 나는 혼란을 즐겼다. 제노사이드와 혐오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 나온 것이었기 때문에 오랜 시간 이야기를 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문제 의식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우리가 생각하는 유대인의 외모적 특성을 나치가 만들어 놓았다는 것, 우리가 그것을 알게 모르게 그대로 이어받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것, 19세기 만들어진 인종주의의 스테레오 타입을 어쩌면 반복하고 있을 수도 있다는 사실들은 늘 경계해야 하는 지점이다.

건강 불평등: 차별은 어떻게 건강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가

불평등한 사회는 건강의 불평등을 초래한다. 소수자에 대한 편견이 만연하고, 사회적 약자들을 배려하지 않는 사회 속에서 그들에게는 본인의 몸과 건강을 챙길 수 있는 기회도, 여력도 마땅치 않다. 소득의 불평등과 약자에 대한 차별은 신체적 건강의 불평등을 야기한다. 소득수준에 따라 영유아의 사망률이 다르다는 사실, 중대한 질병에 걸렸을 때 쉽게 치료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어쩌면 누구나 예상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하지만, 저자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만성적인 차별 행위가 어떻게 건강에 영향을 끼치고 있는지까지 분석하고 있었다.

급격한 스트레스를 받더라도 해당하는 상황이 사라지면 인체의 스트레스 반응은 정상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것이 일시적 상황이 아니고 항상 만연해 있는 상태라면, 스트레스로 인한 반응이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정상 상태를 만들고 인간의 몸을 병리적으로 변화시킨다고 한다. 이 말에 따르면 항상 만연해 있는, 만성적인 스트레스 상태에 노출된 사람들의 경우 병리적 반응이 신체적·정신적인 방향에서도 증가할 것임은 당연하다. 그리고 저자는 2012년 ‘다문화 가족 실태조사’라는 논문을 통해 결혼이주민들의 차별에 대해 언급하면서 이들이 차별로 인한 건강 문제에 노출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염려했다.

문제는 우리 사회에서도 인종주의적 요소와 인종 차별이 실재한다는 사실이다. 다문화 가정의 아이라는 시선, 혼혈아라는 시선은 이미 차별을 내재한다. 그리고 이런 시선들이 그들의 건강 상태에 영향을 미칠 것임은 어쩌면 예상되는 바이다. 늘 누군가에게 “너는 달라, 우리랑 다르지.”라는 타자화와 구분짓기를 당한다면, 누군들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있을까. 이미 폐기된 인종주의적 잣대를 가지고 사회를 바라보지 않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요한 세계시민으로서의 자세임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타자화와 구분짓기가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이들을 배제하고 집단적인 쇼비니즘으로 전향할 수 있다는 사실과 함께.

우리에게 필요한 지식을 만드는 일에 대하여

과학이란 무엇일까? 과학자가 본인의 연구 가치와 윤리성에 대해 질문하지 않으면 어떻게 될까? 저자는 매독에 걸린 흑인 환자들을 치료하지 않고 관찰했던 미국의 터스키기 사건을 이야기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이 옳은 일을 한다고 믿으며 적극적으로 협조한 간호사 리버스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과학자들의 비윤리성을 지적한다. 이 사례는 연구에서도 인류가 지녀야 할 가치가 있다는 사실을 과학자가 잊어버렸을 때, 이것이 얼마나 비인간적일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책 전체를 통해 저자의 예리한 통찰을 볼 수 있었다. 책을 읽는 내내 연구자들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얼마나 중요한지, 사회 전체가 생산된 지식을 어떻게 비판적으로 수용해야 할지에 대해 올바른 질문을 던져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자로서 저자의 태도와 생각은 존경스러웠다. 이전의 저서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서도 질병과 건강의 사회적 책임을 묻고 있었는데, 더 넓은 관점에서 본인의 생각을 설명하는 느낌이었다. 문장은 간결하지만, 문장의 힘은 단단하다. 다양한 생각을 불러일으키고 우리가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지에 대한 통찰을 주는 책임에는 틀림없다. 특히 교육을 하는 교사로서 꼭 한 번 읽어보기를 추천한다.

  1. 현재 거꾸로캠퍼스 파견 근무 중이다.
  2. 플래시 대 퍼거슨 판결(1896)은 인종분리 정책의 원칙이 확립된 미국 대법원의 판결을 이른다. 1892년 호머 플래시는 기차의 1등석에 예약하여 앉아 있던 중이었다. 그때 기차의 차장이 다가와 1등석은 백인만이 이용할 수 있다며 그에게 흑인 칸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하였지만, 플래시는 본인의 예약석에서 이동할 수는 없다고 부당함을 주장하면서 이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결국 플래시는 보안관에 의해 체포되어 벌금을 물고 법원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주 법원은 플래시에게 벌금형을 선고했고, 항소한 플래시는 대법원에서도 패소했다. 문제는, 원고인 플래시는 8분의 7은 백인 혈통을, 8분의 1은 흑인 혈통을 가지고 있었다는 데 있었다. 플래시를 흑인 또는 백인이라 규정할 수 있을까? 인종주의의 이러한 허구성도 문제이지만, 플래시를 흑인으로 볼 것인가 백인으로 볼 것인가는 차치한다고 하더라도 더 큰 문제는 이 판결에서 인종차별적 원칙을 법률적으로 인정해 버린 데 있다. 이 판결에서 “분리하되 평등하다(seperate but equal)’는 원칙이 선고됨으로써 미국 전역에 인종차별적 분위기가 확산되었다는 사실을 볼 때, 법원은 판결의 무거움을 반드시 인식하고 있었어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