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페이퍼2022 겨울호(249호)

공존과 다양성의 열린 공동체에 관한
교육적 탐색-생명세계와 낭시(Nancy)의
공동체 사유를 중심으로

  ※ 이 글은 서울교육 이슈페이퍼 2022년 제5호(통권 40호)를 재구성한 것이다.

주정흔(서울특별시교육청교육연구정보원 교육정책연구소, 선임연구위원), 양형진(고려대학교, 교수)

Ⅰ. 들어가기

인간의 과제, ‘함께-살기’

인간의 삶을 표현하는 데 있어 ‘혼자 사는 세상이 아니다’라는 말처럼 평범한 말이 있을까? 모든 인간은 서로 다른 존재자들과 더불어 살아간다. 꽃과 나무, 새와 짐승, 강과 바다, 작은 풀벌레 하나까지 조금만 눈을 돌리면 나와 무관하지 않은 자연의 존재자들이 무궁무진하다. 또한 홀로 살 수 없는 인간은 서로 크고 작은 무리를 지으며 그 무리 내의 타자와도 함께 살아간다. 그런데 이 자명하고 평범한 ‘함께-살기’는 결코 쉽지 않은 과제이다.

대량멸종과 기후변화와 같은 전 인류적 재난은 ‘인간과 자연’의 함께-살기의 어려움을 보여준다. 같은 종(種)인 ‘인간과 인간’ 사이의 함께-살기 역시 용이하지 않다.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 역사, 이데올로기를 형성하는 인간의 무리에서 경쟁과 갈등이 빚어내는 불평등과 차별, 혐오 등은 함께-살기를 압도하는 듯하다. 특히 이번 코로나19라는 질병 재난은 이러한 어려움을 증명하듯 다양한 문제 사태를 드러내면서 우리에게 함께-살기, 즉 ‘공존’이라는 당연하지만 쉽지 않은 과제를 던졌다.

공동체에 대한 성찰과 공존 교육

그 어느 때보다 공존에 대한 문제의식과 공존 교육의 필요성이 고취되고 있다. 그러나 분열된 현실에 대한 비탄과 함께 공존의 불가피성을 강조하는 논의는 넘쳐나지만 결론은 다시 공존이 필요하다는 것으로 돌아가거나 선언적인 구호가 되기 쉽다. 교사로서 학생들에게 공존을 가르친다면 다양성을 존중하며 함께 사는 것이라는 말 외에 무엇을 더 설명할 수 있을까. 다양성을 인정해야 하니 나도 옳고 너도 옳다고 하면 공존일까. 공존역량으로 목표를 세워 몇 가지 교육활동을 제공하면 공존하는 능력이 생기는가. 공존을 위한 합의는 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상태를 합의라고 할 수 있을까.

지금 공존이 요청되는 일련의 문제들은 모두 ‘인간’의 행위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즉 자연이든 같은 인간 사이의 문제이든 공존 교육은 인간의 행위와 관점에 대한 근원적인 성찰과 전환적 사유에 관한 것이다. 결국 공존 교육은 우리가 어떤 인간으로 살아야 하는지, 왜 함께 존재해야 하는지, 어떻게 함께 해야 하는지를 묻는 존재론적인 성찰을 요청한다.

이에 이 글에서는 존재론적 성찰의 한 지점으로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의 필요성을 제기하고자 한다. ‘함께 있다’,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의 공존은 이미 ‘공동체’를 함의하고 있는 개념이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크고 작은 공동체를 이루며 그 안에서 유기적인 질서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공존을 위협하는 현실의 문제 사태 역시 공동체와 무관하지 않다. 양립 불가능한 서로 다른 외침으로 분열된 광장, 정책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를 수렴하는 공청회에서조차 나와 다른 목소리는 차단하고야 마는 격렬함 역시 공동체의 한 모습이다.

이 글은 ‘우리가 지금 공동체라고 상정하고 있는 공동체는 과연 공존 사회를 정말 가능하게 하는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우리가 처해있는 공존의 문제는 공동체를 바라보는 우리의 사유방식 그리고 공동체 개념에 내재된 특질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이에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기존의 공동체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코로나19 이후 우리가 지향해야 할 새로운 공동체 모습을 안내함으로써 공존 교육의 개념적 토대 구축에 기여하고자 한다.

이에 본고는 근대 공동체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취하는 견해를 따른다. 그 중에서도 새로운 공동체 이론을 구성할 수 있는 지적 자원을 위해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 장-뤽 낭시(Jean-Luc Nancy, 1940-2021)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 ‘무위(無爲)의 공동체’에 주목하였다.1 낭시는 공동체를 존재론적으로 해명함으로써 기존의 공동체 개념을 해체하고 새로운 공동체 상을 제시한다. 낭시의 공동체론은 이해하기 난해한 것으로 유명하지만 새로운 사유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소화해야 할 대상일 것이다. 이 글에서는 철학적 논증에 초점을 맞추기보다 그가 제시하는 새로운 공동체 개념의 특질을 중심으로 열린 공동체로서의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새로운 공동체상에 대한 존재론적 논의에 앞서 학문 간 영역의 경계를 허물고 생명공동체의 존재양식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공존에 대한 당위적인 논의에서 한 걸음 나아가 생명공동체의 존재양식을 통해 공동체의 원형을 이해하기 위한 것이다. 진정한 공동체는 공존과 다양성의 바탕 위에서만 성립된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인간의 새로운 공동체는 그 자체로 공존의 가능성을 품고 있어야 한다. 인간을 포함하는 지구 생명은 그 자체가 거대한 공동체를 이룬다. 연관과 의존의 얼개 위에 세워진 이 거대한 생명공동체는 공존과 공생의 존재양식을 보여준다. 생명의 역사에는 진실이 있다.2

Ⅱ. 생명공동체의 존재양식

지구 환경을 바꾼 생명공동체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외부의 산소를 끌어들여 호흡해야 하고, 외부의 음식물을 먹으면서 영양분을 공급받아야 한다. 이처럼 우리 몸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 의존한다. 이 연관과 의존의 관계망은 우리 몸을 넘어 생명세계에 연결되고, 대기와 해양 등 물질세계를 포함하여 지구 전체로 확장된다.

생명세계는 순환의 연결망 위에서 존재한다. 지구 생명 전체가 참여하는 이 연결망은 하나로 엮여있다는 점에서 공간적이고, 38억 년 생명의 역사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시간적이다. 생명세계는 근원적 동일성에서 출발하여 거대한 연관과 의존의 망을 형성한 시공간적 공동체다.

지구 환경은 이 생명공동체가 만들어 낸 것이다. 산소를 통해 왜 그러한지를 살펴보자. 태양계의 다른 행성처럼, 원시지구에는 산소가 없었다. 지구에만 존재하는 산소는 초기 미생물인 남세균(cyanobacteria) 같은 원시 생명체가 광합성을 하면서 장구한 세월 동안 만들어 낸 것이다.

지구 생명의 역사는 여기서 극적으로 달라졌다.3 산소가 풍부해지면서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혐기성 미생물 대부분이 멸종됐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산소로 호흡하는 생명체가 생겨났다.4 성층권에는 오존층이 형성됐고, 오존층이 강력한 자외선을 막아주면서 지상이 생명이 살 수 있는 공간으로 변했다.5 우리가 지금 땅 위에서 숨 쉴 수 있는 것은 놀랍게도 세균 덕택이다.

이처럼 생명은 수동적으로 지구 환경에 적응한 것이 아니다. 능동적으로 지구 환경을 바꿨다. 지구 생명이 지구 환경과 역동적 상호연관의 망을 형성하면서 공진화한 공동체의 역사가 지구 생명의 역사다.6

도덕적 의무가 아닌 보편적 존재양식으로서의 공존

1967년 생물학계에는 ‘생명의 진화 역사에 있어 가장 중요하면서 극적인 사건’7이 있었다. 진핵세포의 진화에 대한 새로운 발견, 이른바 ‘세포내공생’ 이 발표되었다. 린 마굴리스(Lynn Margulis)에 의하면 현존하는 동식물의 세포는 단세포 생명체와 세균이 공생하면서 나타났다. 미토콘드리아나 엽록체는 처음에는 독자적인 원핵생물이었다. 이들이 단세포 생명체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가,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았다. 하나의 세포 안에 독자적인 DNA를 가진 또 다른 세포가 함께하게 된 것이다. 즉 세포내공생을 통해 이들은 단세포 생명체의 세포 소기관이 됐다는 것이다.

단세포 생물은 미토콘드리아와 공생함으로써 산소 호흡을 할 수 있게 됐다. 미토콘드리아가 만들어내는 에너지를 이용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면서, 현존하는 동식물의 조상이 됐다고 생각된다.8 단세포 생물은 광합성을 하는 세균과 공생함으로써 이들이 제공하는 당분을 사용할 수 있게 됐다. 움직이지 않고도 에너지를 얻게 되면서, 현존하는 식물의 기원이 됐다고 본다.9 미토콘드리아와 엽록체는 모두 생명 에너지를 생산한다. 세포는 이들이 만든 에너지를 이용하고, 이들은 세포가 주는 양분을 이용하여 증식한다. 현존하는 식물과 동물은 모두 이렇게 서로 이익을 주고받는 공생의 구조를 형성하면서 시작됐다.10 이는 지구 생명의 세계에서 공생은 보편적 존재양식임을 보여준다.

세포 차원에서 보면 세균과 단세포 생명이 공생함으로써 현존하는 모든 동물과 식물의 조상이 됐다. 산소가 없던 지구를 산소가 풍부한 지구로 바꾼 것도 세균이었다. 그리고 지금 낙엽을 썩혀 영양분을 공급함으로써 숲을 무성하게 하는 것도 세균이다. 세균이 없다면 현재의 생명세계는 이루어질 수도 없었고, 이 세계가 지속될 수도 없다.

이처럼 세균을 포함하여 생명세계 전체가 하나의 공동체를 이룬다. 함께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공존이고, 서로 도우면서 협력한다는 의미에서 공생이다. 살아남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면서도 상대를 부정하지 않고 인정한다는 의미에서 공존이다. 자신의 고유성을 지키면서도 서로 돕고 이익을 나누면서 협력한다는 의미에서 공생이다. 생명세계에서 공존과 공생은 도덕적 의무나 책임감 때문에 마지못해 따라야 하는 원리가 아니다. 지구 생명이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생명의 존재양식이다.

공존의 전제로서의 다양성

진화가 만들어낸 생명세계는 다양성으로 가득차 있다. 모든 것이 개성 있게 연결되어 있는 복잡한 세계다.11 다양성의 중요성을 옐로스톤 국립공원의 회색늑대를 통해 알아보자. 마지막 늑대가 1926년에 사라지자 엘크의 수가 증가했다. 늑대를 탐탁지 못한 포식자로 여겨 무분별한 사냥을 방조한 결과였다. 엘크가 증가하자 풀과 낙엽 식물을 마구 먹어대면서 숲이 황폐화되고 초목이 죽고 땅이 침식됐다. 물가의 나무가 사라지면서 비버도 사라졌고, 이는 엘크의 생존마저도 위협했다. 풀과 초목이 부족하게 되면서 엘크가 집단 아사하기도 했다. 문제의 심각함을 인식한 후 우여곡절 끝에, 캐나다에서 포획한 늑대를 옐로스톤에 방출했다. 늑대가 도입되고 다시 엘크가 줄면서 공원의 식물군이 변화되었고 물가의 식물이 살아나면서 비버가 돌아왔다. 비버가 건설한 댐이 여러 수생 동식물의 서식처를 제공하면서, 수생 생태계도 이전의 건강함을 회복했다. 늑대가 코요테를 포획하면서, 코요테가 포획하는 여우의 수도 늘어났다. 이렇게 옐로스톤의 생태계는 이전의 건강함을 되찾을 수 있었다.

이는 생명세계에서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말해준다. 늑대가 없이 사슴만 있을 때 평화롭게 보일지 모르지만, 이건 겉모습일 뿐이다. 사슴을 잡아먹는 늑대가 있을 때, 사슴도 오히려 건강할 수 있다. 이는 생명종의 다양성 위에서만 생태계가 건강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건강한 공존은 다양성의 토대 위에서만 이뤄진다.

이 다양성은 단순히 같은 특질을 가진 여러 종류가 공존한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사슴과 토끼와 노루 등 여러 종의 초식동물이 있다고 해서 건강한 생태계가 이뤄지지는 않는다. 초식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육식동물이 필요하다. 생존을 위해서는 이처럼 질적으로 다른 다양성이 필요하다. 생명세계는 다양성의 기반 위에서 형성된 거대한 공동체다. 이것이 생명세계의 아름다움이다. 서로 ‘다르다는 것’만으로도 아름답다.

자기 정체성을 지키려는 싸움

생명세계에서 공존이나 공생은 다툼이 전혀 없는 평화로운 관계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치열한 다툼을 하면서 어렵게 얻어내는 상호 연관 내지는 의존의 관계다. 임팔라는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도망가고, 치타는 굶어 죽지 않으려고 쫓아간다. 둘 다 살아남기 위해 전력을 다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생존을 위한 치열함은 식물의 세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더 많은 햇빛을 받으려고 위를 향해 자라야 하고, 한정된 물과 영양분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뿌리를 뻗으면서 경쟁해야 한다. 심지어는 다른 식물의 성장을 억제하는 화학물질을 방출하기도 한다.12 푸른 숲은 평화롭게 보이지만, 그 숲을 이루는 식물들은 서로 싸운다. 싸우면서 공존하는 균형 잡힌 세계가 푸른 숲이다.

식물끼리의 경쟁도 치열하지만, 식물은 먹히지 않기 위해 병원균이나 동물과도 싸워야 한다. 다양한 천연 항균 물질은 병원균과 싸우기 위한 식물의 무기다.13 심지어는 병원균과 싸우기 위해 활성산소를 만들고, 싸움이 끝나면 활성산소를 제거하고 정상으로 돌아가기 위해 항산화 물질을 만들기도 한다.14

공생: 자기 고유성을 잃지 않는 헌신과 협력

자기정체성을 지키려는 싸움은 수세적인 입장이다. 생명세계는 여기서 놀라운 진보를 이룩했다. 바로 공생이다. 많은 식물이 균류와 공생하면서 인산을 흡수하고, 콩과식물은 뿌리혹박테리아와 공생하면서 질소를 얻는다. 속씨식물은 곤충에게 꽃가루를 제공하고, 곤충은 식물을 수정시켜준다. 곤충을 불러들이기 위해 눈에 띄는 꽃을 피우고, 향기를 풍기고, 곤충에게 줄 꿀을 준비하기도 한다. 열매를 만들어 동물에게 먹이를 제공하고, 이를 먹은 동물은 씨앗을 멀리 날라준다.

사실 움직일 수 없는 식물에게 곤충은 꽃가루를 탐하는 큰 적이었다. 이런 곤충을 위해 꽃을 피우고 꿀과 열매를 제공하는 것은 일견 희생으로 보인다. 그러나 꿀과 열매를 만들어 제공한다고 해서 씨앗을 널리 퍼뜨리려는 원래의 목적이 손상되지는 않는다. 속씨식물은 오히려 이를 통해 자신의 유전자를 널리 퍼뜨리는 공생의 방법을 알아냈다.15 공생은 이처럼 희생이 아닌 헌신, 예속이 아닌 협력이다. 자신의 고유성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번성하는 기적을 이루는 것이 공생이다.

Ⅲ. 인간의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

1. 동일성의 공동체와 공존의 한계

생존의 과제, 실존의 과제

인간을 비롯하여 무리를 지어 살아가는 동물들은 무리 내의 타자와 더불어 질서를 이루어야 하는 과제를 안고 있다. 먹을 것을 구하고 맹수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무리를 형성하게 되었고, 무리가 클수록 생산과 방어에 유리하였다. 그러나 무리가 커지면서 먹이나 잠자리를 두고 경쟁과 갈등이 발생하게 되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열과 동맹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들은 먹이를 습득하고 외적에 대항하는 일뿐만 아니라, 무리 내에서의 자신의 서열과 다른 구성원과의 관계를 생각해야만 했다.16

이후로 인간은 신체를 대신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고, 문자와 각종 교통수단을 발명하게 되었고, 여타의 동물과 비교할 수 없는 규모의 집단을 형성할 수 있었다. 이후 인간은 분업이라는 특별한 생산양식을 갖게 되면서 생산성이 높아지고 그만큼 생존 가능성도 커졌다. 인간은 분업에 의해 서로 다른 지위와 역할을 갖게 되었고 생존을 위해 만든 질서는 ‘구조화’되었다.

이에 따라 인간은 보다 안정적으로 살아가게 되었지만 구조화된 질서가 인간의 사고와 자아를 압도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졌다. 자신의 행위가 갖는 의미와 타인과의 관계맺음을 인식하지 못한 채 기계의 부속품 같은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다. 이제 인간은 생존의 과제뿐만 아니라, 실존을 위해서도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사회학자들을 비롯하여 정치학, 윤리학, 교육학 등에서는 이 과제에 대한 해결책으로 공동체에 주목했다.17 플라톤의 정치공동체의 이상에서부터 마르크스주의에 이르기까지 공동체는 인간 사회가 구축해야 할 이상적인 사회로서 추구되어왔다.

공동체는 공존을 보장하는가?

공존에 관한 한 포럼에서 공존의 어려움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언이 있었다. “개인의 이해와 공동체의 이해가 충돌할 때, 공동체를 따르지 않는 개인주의가 바로 공존을 어렵게 하는 문제입니다. 공동체를 회복해야 합니다.” 이 발언에서 개인은 곧 개인주의이고, 공존은 공동체의 이해를 따르는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개념의 범주착오가 발견되는 대목이지만,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개인을 공동체와 대립되는 개념으로 보고 있는 점, 그리고 ‘공동체의 상실(the loss of community)’이 공존을 위협하는 것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러한 인식은 공존에 관한 논의에서 자주 발견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공존의 문제는 정말 공동체의 부재에서 비롯되는가? 공동체의 강조는 우리를 공존의 세계로 이끄는가? 공동체에서 개인의 실존은 어떻게 존립 가능한가?

공동체는 주로 언어, 역사적 기억, 종교, 경제활동 양식, 문화적 전통 등 함께 같은 곳에서 오랜 기간 생활을 공유해온 집단 간에 공유하는 부분이 넓어지면서 형성된다.18 일반적으로 공동체는 ‘공동의 가치와 목적’을 가진 사람들의 결속체를 의미하는데, 이러한 공동의 지향은 일종의 정체성을 형성하면서 ‘동일성’을 추구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공동체는 집단 간의 다양한 ‘차이’로부터 생성된다. 공동체에서 개인은 그 차이를 자신의 정체성으로 공유하게 되고, 이를 공동체의 정체성으로 확장시킨다. 이렇게 확장된 정체성은 또 다른 구조를 형성하게 되고, 공동체 바깥의 사회보다 더 강한 ‘구조’를 갖게 된다. 공동체 안에서 개인의 목소리는 비록 개인의 입을 통해 발화되지만 결국은 공동체의 목소리와 다르지 않다. ‘많은 사람들의 단일한 목소리’19가 가능해지는 것이다.

동일성에 기초한 공동체는 집합 혹은 연합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형태의 공동체는 믿음, 자원, 기회, 필요, 위험 등의 여러 요소들을 공유하며 동질성과 결속성에 영향을 주고받는다. 하나의 공동체라는 동일성은 ‘경계’를 만들게 되고 결국 다른 구성원들이 들어오거나 생각이 다른 사람들이 있을 땐 언제든 흔들리거나 균열이 날 수 있는 한계가 있다.

‘차이의 공동체’의 한계

이에 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공동체에서 벗어나 차이를 인정하는 ‘차이의 공동체(community of differences)’가 강조되었다. 현실에서 이질적인 사람들이 단일한 목적이나 이념 아래 갈등 없이 조화를 이루며 통합하며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 따라서 서로의 이질성을 극복하고 공동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수용하는 관용(tolerance)과 협력이 필요하다. 차이의 공동체는 서로 다른 사람을 하나의 질서나 가치 혹은 규범에 통합하는 것을 지향하는 것이 아니라, 갈등을 최소화하는 가운데 각자의 개성과 자유에 따라 간섭받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지향한다.20

그러나 나와 다른 남을 인정하는 관용의 강조는 극단적인 상대주의를 허용하거나 자신의 관심 밖의 것에는 아예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소외를 가져온다. 특히 차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강조는 차이를 ‘다양성의 문제’ 로 환원시키기 쉽다. 즉 다양성이라는 이름으로 어떠한 공동체도 인정하지만 그 태도의 이면에는 ‘나는 나대로, 너는 너대로’라는 배타성이 자리하고 있다. 따라서 차이의 공동체 역시 동일성의 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한계가 있다.

2. 동일성의 해체

‘공동-내-존재’로서의 공동체

이번 코로나19와 관련하여 공동체 관련 연구자들이 특별하게 주목하는 공통적인 사건이 있다. 전염병으로 격리된 사람들이 발코니에 나와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을 향해 노래를 부르며 응원하고 인사를 나누며 서로의 안부를 묻는 모습이다. 죽음의 공포와 슬픔의 극한 상황에서 서로를 일으켜 세우고 연대하는 모습은 많은 사람에게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주었다. 이 모습은 전파를 타고 곳곳으로 번져갔고 이와 비슷한 위로와 감동의 사례들로 이어지면서 인간이 가진 또 다른 공동체성을 일깨워주었다.

이 공동체적 경험은 우리가 알고 있는 공동체와 그 특질에서 여러 가지로 다르다. 무엇보다 이 사건에 참여한 사람들 사이에는 지역, 성별, 나이, 종교, 문화, 직업, 이념 등 특별히 공유되는 그 어떤 동질성, 즉 공통점이 없다. 또한 그 사건의 중심이 되는 특정한 사람이 있는 것도, 결속을 위한 요구도, 지속성을 위한 규약도 없다. 무엇보다 실체도 없다. 그렇다면 이는 공동체인가 공동체가 아닌가?

낭시는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위해 ‘공동-내-존재(Being-in-common)’라는 명제를 제시한다.21 낭시가 보는 인간 존재인 ‘나’는 타자를 떠나 설명될 수 없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언제나 이미’ 세계 속에 던져진 ‘세계-내-존재’이다. 인간에게 타인/타자의 문제는 나와 함께일 수밖에 없는 ‘공동존재(Being-with)’의 문제이다. 따라서 공동존재는 존재에다 공동을 더하기 식으로 ‘첨부’하는 것이 아니라 심장에 공동을 위치시키는 것으로, “존재문제의 가장 고유한(proper) 영역”으로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22

의존과 연관의 관계를 떠난 생명이 있을 수 없듯이 공동-내-존재인 우리는 나의 기원이 타인에게있고, 타인의 기원이 나에게 있는 존재이다. 타인은 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나는 ‘내’가 아니고, ‘우리’ 이다. 유의해야 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우리는 일인칭대명사로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우리’(예를 들면 우리 집, 우리 학교 등)와 다르다. 또한 “우리는 남이 아니다”라며 서로 같은 가치 혹은 신념, 문화 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며 공동체를 구성하려는 시도와 혼동해서도 안 된다. 이는 낭시가 가장 배격하고자 하는 공동체의 모습이다.

3. 공동체 없는 공동체

단수성 속에 존재하는 복수, 복수성 속에 존재하는 단수

새는 새이고 꽃은 꽃인 것처럼 생명이 있는 모든 것들은 저마다 자신만의 고유성을 갖고 있다. 인간 역시 자신만의 고유의 세계를 지닌 단독자라는 점에서 단수성(singular)을 갖고 있다. 그런데 낭시가 말하는 공동-내-존재의 중요한 특징은 ‘항상 자기 밖으로 열려진 존재, 타자에게 노출되어 그로 향하는 존재, 또 그와 만나서 만들어내는 관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존재’23이다. 결국 단수성은 다른 단수성들과의 ‘관계’를 통해서만 복수(plural)가 된다.

낭시에게 공동체란 서로 간의 ‘융합’이 아니라, 단수성들의 ‘상호 노출’이다. 좀 더 풀어서 말하면 자기 고유의 정체성을 잃지 않은 서로 간의 상호작용과 의사소통을 통해 타자들에게 자신의 고유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공존을 위한 공동체는 특정한 형태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매순간 새롭게 형성되는 것이어서 특정한 무엇인가가 공동-내-존재 안에서 절대화되지 못하도록 일종의 ‘소통’ 혹은 ‘관계’ 안으로 끌어들인다. 즉 낭시에게 공동체는 특정한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간의 소통과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그 고유한 모습을 드러낸다.

소통, 자기 파열의 산물

그러나 소통과 상호작용은 단순하지 않다. 세포 하나, 작은 식물 세계도 그 공존의 이면에 자기 고유성을 지키려는 ‘치열한 싸움’이 있는 것처럼, 자기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타자와 소통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소통이란 과연 무엇일까? 소통은 특정 메시지나 의미의 전달 자체가 아니라 일종의 ‘내적 체험’의 상태이다. 낭시에게 진정한 소통으로 가는 유일한 출구는 자기 스스로 ‘내가 아닌 나’, 즉 자기의 고유성을 버릴 때 나타난다. 이는 일종의 황홀경에 대한 공동성(공통성)의 내적 체험을 통해 자신을 버릴 때 비로소 얻어진다.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인간은 누구나 죽음에 이르는 유한한 존재라는 점이다. 자기 파열은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고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믿었던 것들이 신화였음을 깨닫고 절대적 선이 될 수 없음, 영원하지 않음을 깨닫는 상태이다. 낭시는 자신의 내재성이 파열되는 상태를 ‘찢긴 상처’로 비유한다. 소통이란 이렇게 찢어진 상처로 드러나 나의 속살과 타자가 만나는 순간이다. 낭시는 이러한 소통에 대해 바깥으로의 열림, 타인에게로의 열림이라는 의미에서 ‘존재론적 열림의 사태’로 표현한다.

무위(無爲)의 공동체

지금까지 인간은 사회적 위기가 있을 때나 해결해야 할 특정한 문제사태가 있을 때 공동체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으로 답을 찾았다. 이들에게 공동체는 하나의 ‘실체’로서 공통된 목적을 위해 ‘작동시킬 수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낭시는 이를 강력하게 부정한다. 그에게 ‘인간의 공동체’가 가진 중요한 문제점은 바로 공동체의 이상 저변에 인간을 최고의 내재적 존재로 보는 절대적 믿음이다. 여기서 절대적 개인은 모든 사유의 중심에 있으며 나와 다른 ‘저 편’에 타자 혹은 타인이 존재한다. 나와 다른 너와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동일성의 이념을 공유하는 공동체를 ‘제작’할 수밖에 없다.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는 우리 삶 속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인위적인 노력이나 의도로 작동 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낭시에게 공동체는 우연한 사건으로서 공동으로 나타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낭시에게 공동체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 ‘공동체 없는 공동체’ 혹은 ‘무위의 공동체’로 표현된다. 무위(無爲)는 말 그대로 어떠한 조작이나 힘을 가하지 않은 생명공동체와 같은 자연적인 상태이다. 하나의 중심을 향해 집결하는 공동체를 해체할 때 비로소 개인의 단수성과 공동-내-존재가 화합할 수 있고, 사람 사이의 차별이 사라지며, 타자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최소화시킬 수 있다.

Ⅳ. 맺음말 : 공존과 다양성의 열린 공동체를 위하여

코로나19를 계기로 비대면이 일상화되면서 공동체의 붕괴를 우려하며 공존의 필요성과 함께 공동체성의 회복을 요청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 글은 지금까지 우리가 익숙하게 알고 있는 공동체는 과연 공존사회에 유효한가라는 질문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지금의 공동체는 과연 공존과 다양성이라는 미래를 담보할 수 있는지 비판적으로 성찰하고, 공동체에 대한 새로운 사유를 촉구하고자 하였다. 이에 공동체에 대한 존재론적 이해를 모색하기 위해 생명공동체에 내재된 공존의 존재양식을 일종의 반영적 거울로 삼고, 낭시의 ‘공동-내-존재’ 개념을 중심으로 대안적 공동체의 특질과 방향을 탐색하였다.

지금 우리 사회에 대한 공통적 인식은 갈등과 분열의 사회라는 점이다. 굳이 국제보고서의 갈등지수24로 증명하지 않아도 될 만큼 우리는 “참, 편안하지 않은 사회”에 살고 있다. 갈등과 분열은 교육현장에도 예외 없는 현상으로, 정치적 중립을 기본으로 하는 교육정책에도 보수와 진보의 잣대가 우선되고 있다. 이러한 공동체는 생존의 문제도, 실존의 문제에도 유효하지 못하다. 오히려 갈등의 중심에는 근대적 공동체가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다. 위기와 재난에서 공동체는 사람들을 연결하기도 하지만 서로를 배척하게 만들 수도 있음을 우리는 반복적으로 경험하고 있다.

근대적 공동체는 그 발생부터 동질성을 바탕으로 강한 경계를 형성하는 속성이 있다. 집단의 순수성과 동질성을 강조하는 공동체는 개별 존재의 고유성(단수성)을 부정한다. 따라서 경계 밖에 존재하는 모든 것을 인정하지 않는 배제와 차별을 가져올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공동체를 다시 강조하며 또 다른 정체성을 중심으로 팬데믹 이후의 공동체를 ‘제작’하려는 시도는 또 하나의 환상이며 들뢰즈(1972/1997)가 말한 ‘차이 없는 반복’, ‘헐벗은 반복’이 될 것이다.

낭시는 공동체에 대한 부정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해체-재구성을 통해 새로운 공동체를 향한 대안적 개념 틀을 제시한다. 공교롭게도 이 개념 틀은 생명공동체의 보편적 존재양식인 공존과 공생의 모습과 중첩된다. 낭시에게 모든 인간은 타자의 문제가 나의 문제일 수밖에 없는 의존과 연관으로 이루어진 공동-내-존재이다. 그의 ‘공동체 없는 공동체’는 단수성을 함몰시키는 복수가 아니라 자기 정체성을 잃지 않으면서 상호작용과 소통을 통해 자기의 고유성을 드러낸다. 즉 기존의 동질적인 정체성에 기초한 관계가 아닌, ‘관계에 기초한 정체성’을 의미한다.

한편, 낭시가 강조하는 소통은 공존교육의 숙제인 ‘공존을 위한 합의는 대체 어떻게 이루어지며 어떤 상태를 합의라고 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에 의미 있는 통찰을 준다. 흔히 합의는 다수결의 원칙 혹은 합리적 이성에 기댄 토론으로 획득되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다수결 원칙은 갈등을 봉합할 뿐 대립적 구도는 변치 않는다. 합리적 이성에 기댄 토론 혹은 대화만으로는 자칫 상대의 세계를 건드림으로써 또 다른 저항을 불러일으키거나 소통의 의지와 노력을 접게 하기도 한다.

생명세계가 선택한 공존은 경쟁이 아닌 협력이고, 상대를 죽이려는 싸움이 아니라 상대와 생존 공간을 나누는 상생이다. 서로 돕고 나눔으로써 서로 번성하면서 자신의 고유성을 확장한다. 그런데 생명세계의 협력 혹은 나눔은 자신에게 없던 새로운 기관을 만들어내고, 자신을 바꾸는 자발적으로 선택한 치열한 자기 변화이다. 낭시에게 소통은 치열한 자기성의 파열로 얻어지는 내적 상태이다. 공존을 위한 소통은 타자를 향해 다가가려는 ‘열어젖힘’과 자기성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 자발적인 내려놓음의 모습으로부터 시작될 수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교육은 공동체를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으로 받아들였고, 공동체성을 길러주는 주요한 통로로 기능해왔다. 우리의 교육현장은 크고 작은 공동체들로 이루어져 있으며, 교육정책들은 공동체를 통해 그 목적하는 바를 달성하고자 한다. 그러나 학교는 그 사회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비전이 투영되는 곳으로 분열과 갈등을 오롯이 담아내고 있다. 이런 현실에서 낭시의 사유는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작동하는 우리의 공동체에 대한 성찰과 전환을 요청한다. ‘다양성이 꽃피는 공존교육’은 차이와 다양성, 개방성, 나아가 불화까지도 인정할 수 있는 열린 공동체에서 비로소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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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King’s College London & IPSOS(2021). Culture wars around the world: how countries perceive divisions.

 

  1. 낭시는 데리다(J. Derrida), 비에스타 등과 함께 공동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는 대표적인 학자이다.
  2. 이나가키 히데히로(2022), 『패자의 생명사』, p.10.
  3. H. D. Holland(2006), pp.903-915.
  4. 이일하(2014), p.349-350; Bennett & Shostak (2007), pp.212-213.
  5. Palmer(2018), p.210; 최재천(1998), pp.105-123.
  6. 생명세계와 지구 환경의 전체를 거대한 생명체라고 보는 시각이 러브록(James Lovelock, 1994)의 ‘가이아’와 장회익(1998)의 ‘온생명’이다.
  7. wikipedia(https://en.wikipedia.org/wiki/Endosymbiont)
  8. 이나가키 히데히로(2015), 『싸우는 식물』, pp.102-106.
  9. 톰 웨이크퍼드(2004), 『공생, 그 아름다운 공존』, pp.166-168.
  10. 이나가키 히데히로(2022), pp.17-23.
  11. 아나가키 히데히로(2015), pp.34-35.
  12. 아나가키 히데히로(2015), pp.34-35.
  13. Ibid., pp.69-72; pp.112-114.
  14. Ibid., pp.69-85.
  15. 아나가키 히데히로(2022), 12장, 13장
  16. 서근원(2004). 산들초등학교의 교육공동체 형성에 관한 교육인류학적 연구. p.2(Bauer & Ziegler, 2001/2003 재인용)
  17. 서근원(2004). pp.2-4 참조.
  18. 천경호(2019), 적극적 평화로서의 공존의 가치. 『통일과 평화』, 11(2). p.76.
  19. Jean-Luc Nancy(1986). 『무위의 공동체』, p.70.
  20. 서근원(2004). p.12.
  21. 낭시는 공동체를 새롭게 사유하기 위해 하이데거의 실존론적 현상학으로 인간을 해석한다. 하이데거와 낭시 모두 인간을 필연적으로 ‘공동존재(Mitsein)’로 본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는다. 그러나 하이데거의 철학은 후반부로 가면서 개인의 ‘고유성’에 방점을 찍는 반면, 낭시는 공동존재(Being-with)를 ‘존재 문제의 가장 고유한 영역’으로 접근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22. 이문수(2020). 360 Nancy. 2001. p.32(재인용)참조.
  23. 이문수(2020). p.363(Nancy, 1991. pp.29-32참조). 낭시는 이를 ‘외존(exposition)’이라는 용어로 표현하는데, 이는 낭시의 공동체를 이해하는 열쇠 같은 단어이다.
  24. 영국의 Kings College London(2021)에서 조사한 각 분야의 갈등지수에서 한국은 정치, 이념, 성별, 세대, 빈부격차, 지역, 정당과 관련한 갈등이 1, 2위 등 상위에 해당되는 결과를 보임으로써 ‘문화전쟁이 가장 심한 나라’로 불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