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2023 여름호(251호)

그림책, 같이 보실래요?

강연실 (서울특별시성북강북교육지원청, 교육장)

엄마 무릎

어릴 적 우리 엄마는 우리들을 무릎에 앉히시고 이야기를 자주 들려주셨다. 형제들끼리 다투기라도 한 날에는 어김없이 다양한 ‘의좋은 형제’ 이야기를 풀어내셨고, 설날에는 만두를 빚으면서 도란도란 재미있는 옛날이야기도 들려주셨다. 비단 치마로 언니의 꿈을 사서 서라벌 왕후가 되었다는 보희와 문희 자매 이야기도 엄마에게 처음 들었고, 일본 설화 모모다로상 이야기도 어렴풋이 기억난다. 변변한 책도, TV도 없었던 그 옛날, 내가 아는 대부분의 이야기는 엄마 무릎에서 시작되었다. 세월이 흘러 엄마의 이야기는 시간 속에 묻혀 버렸지만, 그때 그 느낌만큼은 내 마음속 깊이 남아있다. 나는 그저 좋았다, 엄마 무릎이. 엄마의 이야기가.

치과의사 드소토 선생님

학교에서 구강검진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인근 치과의사 선생님이 교실로 직접 오셔서 아이들의 치아를 검사하고 그 결과를 건강기록부에 기재해 주셨다. 치과 검진을 두려워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갓 입학한 1학년 중에는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들도 간간이 있었다. 그런 날은 윌리엄 스타이그의 『치과의사 드소토 선생님』이 ‘딱’이다. 조그만 생쥐 치과의사가 커다란 동물들의 이빨을 치료하는 그림을 보면서 한바탕 웃고 나면 백발백중이다. 우는 녀석 하나 없다. 참 신기했다. 그림책이.

<『치과의사 드소토 선생님』 중에서>

‘좋은 선생님이 될 수 있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신규교사 임용식에 참석한 새내기 선생님들.
피터 레이놀즈의 『점』을 읽어 주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베티, 그 베티가 무심코 찍은 점 하나를 금빛 액자에 곱게 간직했던 미술 선생님. 선생님의 작은 손길, 부드러운 눈길, 따뜻한 마음길이 아이를 자라게 한다. 꽃길보다 가시밭길을 만나리라. 아이들이 잘 따라와 주지 않을 때 미술 선생님의 이 한마디를 기억하자고 했다.

“자! 이제 네 이름을 쓰렴.”

<피터 레이놀츠의 『점』 중에서>

아마도 너라면

“아마도 넌 네가 얼마나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는지 모르는 게 아닐까? 그리고 아마도 넌 네가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아직 모르는 건 아닐까?” 자신의 존귀함을 놓치고 낮은 자존감으로 삶이 즐겁지 않은 학생들, 인생의 방향을 찾지 못해 방황하는 청년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 줄까? 이들에게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자 발견한 코비 야마다의 『아마도 너라면.』 페이지 하나하나 아름답고 강렬한 그림, 깊은 울림을 주는 묵직한 문장들 덕분에 오히려 내가 위로를 받는다. 읽을 때마다 다시 일어설 힘을 얻는다.

그림책이 우리에게 이렇게 말을 걸어온다.
“넌 이제껏 없었고 앞으로도 결코 없을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고.

그림책 열풍이 뜨겁다. ‘K-그림책’이라고 할 만큼 외국에서도 우리나라 그림책은 선풍적인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그 열풍에 불을 지핀 사람은 지난해 아동문학계의 노벨상인 ‘한스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을 수상한 이수지 작가이다. 이수지 작가는 글 없는 그림책 작가로 유명하다. 『여름이 온다』, 『파도야 놀자』, 『그림자놀이』 등 예술성과 실험성이 높고, 글자가 없는 그림책을 주로 그린다. 이미지의 힘일까? 시각 언어로서의 그림책은 때로는 문자 언어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를 준다. 게다가 열 명의 아이가 읽으면 열 가지 각기 다른 스토리가 만들어지니, 같은 그림으로 열 권의 서로 다른 책이 나오는 셈이다. 창의성과 확장성이 대단하다. 이보다 더 훌륭한 수업 자료가 또 있을까?

백희나 작가도 단연 독보적이다. 『알사탕』, 『구름빵』, 『장수탕 선녀님』 등을 집필한 백희나 작가는 2020년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추모상’을 수상했다. 인형을 모티브로 입체적인 캐릭터와 생생한 시각 이미지를 중시하기 때문에 그의 그림책을 읽고 나면 마치 한 편의 인형극을 본 듯한 느낌이다. 『알사탕』을 처음 만났을 때의 감동! ‘마음이 들리는 알사탕이라고?’ 그 기발한 발상에 놀랐고, 페이지 전면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로 채운 한부모 가정 덥수룩한 수염을 가진 아빠의, 아들 동이를 향한 큰 사랑에 코끝이 찡했다.

K-그림책 열풍의 중심에는 단연코 교사가 있다. 최근 수업을 참관해 보면 동기 유발 단계에서 그림책을 읽어 주거나, 교과서 대체재 수준을 넘어 오히려 메인 텍스트로 그림책을 활용하는 교사들을 제법 많이 만난다.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좋그연, 대표 이현아)’1라는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열 다섯 명의 초등학교 교사들로 이루어진 그림책 공부 모임이다. 이들은 교육청이나 연수원 강의는 물론 스스로 온·오프 강연도 만들고 그림책 소모임을 열기도 한다. 이들의 연수는 한 번도 안 들은 선생님은 있어도 한 번만 들은 선생님은 없다고 할 정도로 인기가 높다. 그림책을 소통의 매개로 마음을 나누고 그것을 수업에 접목한다. 아이들에게 읽어 주는 것은 기본이고 아이들을 그림책 작가로까지 성장시킨다. 신세대 교사들답게 자신들의 그림책 수업 경험을 SNS로 소통하고 널리 공유한다.

중·고등학교에서의 그림책 수업도 초등학교 못지않다. 비경쟁 독서·토론 수업에서 그림책은 한 몫을 한다. 그림책은 짧다. 그러나 그 내용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래서 토론에 적합하다. 텍스트 기반 토론이 되지 않는 경우, 경험에 의한 토론으로만 끝나기 쉽다. 이러한 난제를 그림책이 해결해 준다. 그림책을 활용하여 텍스트 기반 비경쟁 독서·토론을 유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림책은 현상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 읽고 나면 ‘?’가 제법 많이 생긴다. 읽을 때마다 생각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래서 생각 나누기에 적합하다. 토론 주제와 관련된 그림책을 비교적 수월하게 찾을 수 있는 것도 장점이다. ‘나, 가족, 인권, 다문화, 세계 평화, 전쟁, 학교폭력, 생태전환, 경쟁, 혐오와 차별, 장애 이해 등등….’ 주제별로 다양한 그림책이 지천에 널려 있다. 국내외 작가들의 수준 높은 창작 그림책들도 계속 출간되고 있다. 그것도 아름다운 그림과 함께.

비경쟁 독서·토론 수업 외에 사회 문제 해결하기, 서평 작성하기, 그림책 창작하기, 과학 에세이 쓰기, 그림책 패러디하기 등 다양한 수업 설계로 학생들의 수업 참여를 높인다.2 비단 국어 시간뿐 아니라 전 교과에 걸쳐 활용도를 넓혀 나간다. 학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으려는 선생님들의 눈물겨운 노력이다.

교장 선생님의 그림책 사랑도 빼놓을 수 없다. 초등학교 입학식에서 딱딱하고 지루한 교장 선생님 말씀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다. 그 자리를 말랑말랑한 그림책이 대신 채운다. ‘틀려도 괜찮아’, ‘너는 너라서 멋져!’, ‘(해야 하는데) 하기 싫은 그런 날은 누구에게나 있어’, ‘겁이 나는 건 당연해’. 제목만 들어도 안심이 되지 않는가? 교장 선생님의 이 한 말씀으로 신입생이나 아이를 입학시키는 부모님들의 걱정은 눈 녹듯 사라진다.

‘사단법인 책 읽어 주기 운동 본부(회장 심영면)’3에서는 입학 시즌이 되면 입학식에서 읽어 주기 좋은 그림책을 선정해 연수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자료까지 제공한다. 2023년에는 300명 남짓 참여하였다고 하니, 그 열기가 제법 뜨겁다. 입학식뿐만 아니라 평소 훈화를 대신하거나 학급별로 교장실로 초대해서 그림책을 읽어 주기도 한다. 교장실을 아예 그림책 전시장으로 만들어 아이들과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교장 선생님도 있다. 특별히 마음이 아프거나 학교 생활에 적응을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상황에 맞는 그림책을 골라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처음에는 눈도 마주치지 않던 아이도 교장 선생님의 따뜻함과, 눈길을 사로잡는 그림책으로 인해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기도 한다.

교원학습공동체에서도 그림책은 빠지지 않는다. 그림책을 교과 수업에, 인성교육에, 예술교육에, 심지어 학부모 교육과 교사 교육에도 적극 활용한다. 종합예술로서의 그림책의 가치를 일찍이 발견한 선생님들이 교과별 성취 기준에 맞추어 수업 콘텐츠를 개발하고, 서로 공유하고, 자발적으로 수업 나눔을 한다.

요즘 서점에 가 보면 그림책 수업, 그림책 토론, 그림책 인성교육, 그림책 철학 등의 책이 부쩍 눈에 띈다. 저자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교사들이 많다. 대부분 공저라는 점에서 다른 책과 차이가 있다. 그림책 수업 경험을 모아 함께 책까지 출간하는 것이다. 이런 열정을 어디서 또 볼 수 있을까? 교육청의 정책이 아닌, 필요에 의해서, 그것도 좋아서 하는 일이라니. 정말 정말 대단하다. 선생님들은.

그림책은 내가 읽는 책이 아니라 남에게 읽어 주는 책이다,
부모가 자녀에게, 선생님이 학생에게, 선배가 후배에게, 연로하신 부모님께, 친구에게, 마음을 담아, 사랑을 담아 읽어 주는 책이다. 자기 전 아이와 함께 베갯머리 독서를 루틴으로 실천해 보라. 탄탄한 독서 정서를 가진 아이로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4 AI가 활개치는 이 시대에는 향후 사람보다 더 또렷하고 분명한 발음으로 읽어 주는 프로그램도 물론 나올 것이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부모가 아이의 살을 부비대며 읽어 줄 때의 그 느낌을, 그 감동을, 그 정서를 감히 AI가 따라갈 수 있을까? 삶에는 순간의 조각들이 있다. 누구나 들키고 싶지 않은 비밀도 있다. 크건 작건 나름의 트라우마도 안고 살아간다. 그림책은 잊고 있던 삶의 한 조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때 그 감정, 그 추억들. 아름답거나 혹은 아름답지 않은 기억들조차도 그림책은 잘도 소환해 낸다. 그림책은 혼자만 지니고 있던 비밀을 드러내고, 풀어내지 못한 트라우마와 마주할 용기를 주기도 한다. 혼자 읽을 때보다 함께 읽을 때 더 센 힘을 낸다.

그림책은 일생에 세 번 만난다고 한다.
내가 어렸을 때, 내 아이가 어릴 때, 그리고 인생 후반기에.
내가 어렸을 때는 엄마 무릎에서 만났고, 내 아이가 어릴 적에는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 주면서 만났다.

어느새 인생 후반기를 맞이한 요즈음, 나는 만나는 사람들에게 이 말을 자주 한다.

“그림책, 같이 보실래요?”

 

 

 

 

  1. 좋아서 하는 그림책 연구회 https://m.blog.naver.com/okastor/221642044908
  2. 호민애(서울사대부중) 블로그 https://m.blog.naver.com/hohokt12
  3. 사단법인 책 읽어 주기 운동 본부 http://xn--ok0by95bfib23bcwh.com/
  4. 신정아(2023), 우리 아이 책 읽기 수업, 언더라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