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두칼럼2019 여름호 (235호)

‘창의적 민주시민’이란
민주주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다

‘창의적 민주시민’을 기르는 혁신미래교육

“낡은 것은 죽어 가는데도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 위기가 존재한다. 바로 이 공백 기간이야말로 다양한 병적 징후들이 출현하는 때다.”
(A. Gramsci)

지금 우리 사회는 어디를 향해 가고 있는가 물을 때마다 낡은 것은 죽어가고 있으나 새로운 것은 아직 탄생하지 못하는 상황을 위기로 본, 그람시(A. Gramsci, 『옥중수고』)의 탁월한 지적을 떠올린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분명 우리 사회는 위기다. 특히 민주주의가 그렇다.
이런 위기 상황 속에서 조희연 교육감 2기를 맞이하였고, 서울교육비전은 ‘모두가 행복한 혁신미래교육’에서 ‘창의적 민주시민을 기르는 혁신미래교육’으로 바뀌었다. ‘창의적 민주 시민’이 핵심 용어로 등장한 것이다.
‘창의적 민주시민’이란 어떤 의미일까? 추상적이고 일반적 인 개념이 아니라, 서울교육에서 기르고자 하는 ‘창의적 민주 시민’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까?

‘창의적’과 ‘질문이 있는 교실’

‘창의적 민주시민’의 구체적 모습은 서울교육지표와 연계하여 그 의미를 살펴볼 수 있다. ‘ 창의적’이라는 의미는 ‘질문이 있는 교실’과 연계하여, ‘민주시민’이라는 의미는 ‘우정이 있는 학교’와 연계하여 그 핵심을 읽을 수 있다.

먼저 ‘창의적’과 연계되는 ‘질문이 있는 교실’은 우리 아이들이 공부하고 생활하는 가장 기본 적인 공간인 교실의 이상적인 모습으로, 정답 찾기보다 창의적인 생각들이 살아있는 교실, 일 방적 전달이 아니라 상호 소통이 활발한 교실, 서로 협력하고 토론하며 함께 생각하는 교실, 무기력하지 않고 활기가 넘치는 교실을 말한다(서울특별시교육청, 2018).

‘질문이 있는 교실’이 그리고 있는 모습들을 보면 한 마디로 ‘살아있는 교실’이라고 할 수 있 다. 그런데 ‘지금 학교는 살아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젓는다. ‘학교 는 죽었다’는 라이머(E. Reimer, 김석원 옮김, 1982)의 외침은 아직도 유효하고, 수업시간 에 자는 아이들을 일탈이 아닌 사회학적인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은(성열관, 2018) 우리를 아프게 한다.

이런 아픔을 치유하고 학교를 살리기 위해서는 먼저 질문을 살려야 한다. 물론 질문의 수준과 유형, 질문을 활용하는 교육방법 등은 다양하다(김현섭, 2015; 유동걸, 2015). 중요한 것은 질문의 방식이 교사의 일방적인 설명식 교육의 또 다른 형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랑시에르(J. Rancière)가 ‘무지한 스승’의 조건으로, 인간을 해방하고자 하는 자는 인간의 방식으로 질문해야지 식자(識者)의 방식으로 질문해서는 안 되며, 지도받기 위해서 질문 해야지 지도하기 위해서 질문해서는 안 된다고 한 것과 같은 의미다(J. Rancière, 양창렬 옮김, 2008).

또한 현재 나와 우리 사회의 모습을 회피하지 않는 질문이어야 한다. 물론 과거와 미래, 타자에 대한 질문도 필요하지만 현재의 나와 우리 사회가 배제된 질문은 공허하다. 따라서 ‘창의적-질문이 있는 교실’과 연계한 첫 번째 창의적 민주시민의 구체적 인간상으로, ‘오늘을 질문하는 사람’을 제시한다.

다음으로 ‘창의적’이라는 표현에서 우리는 새로운 것, 특이한 것, 고정된 틀을 깨는 것 등의 느낌을 받는다. 이전에는 교육 현장에서 능력이나 잠재력과 같은 용어가 쓰였다면 요즘은 ‘창의적’이라는 의미가 강조됨에 따라 역량이라는 단어가 많이 나타나고 있다. 능력이나 잠재력이 이미 만들어진 콘텐츠에 대한 습득 능력이나 습득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었다면, 역량은 어떤 상황에서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 이미 배운 것보다는 새로운 배움을 조직하고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이런 ‘창의적-질문이 있는 교실’의 연계를 통하여 두 번째로 제시하는 민주시민의 인간상은‘세계를 설계하는 사람’이다. 우리가 원하는 ‘창의적’은 시간이 남아서 그냥 엉뚱한 것을 해보는 것이 아니다. 현재 우리의 모습에 문제를 제기하는 ‘오늘을 질문하는 사람’이라면, 다음으로는 ‘어떻게 더 좋은 세계를 만들까’를 고민하고 설계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창의적’이 단순히 새롭고 특이한 이론과 사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 현세계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세계질서를 그린다는 의미가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현재 ‘창의’라는 이름으로 이루어 지는 다양한 교육들이 학생들에게 새로운 세계질서를 그려보게 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진정한 배움은 다양한 차별과 억압적 사회구조를 인지하는 예민함을 길러주고, 자기인식의 한계를 깨닫게하며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고 더 나은세계를만드는 데 개입하도록 부추기는 것이다.”(강남순, 2017)라는 인식을 절실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만 서울교육을 통하여, ‘세계를 설계하는 사람’을 길러낼 수 있을 것이다.

‘민주시민’과 ’우정이 있는 학교‘

‘창의적’이라는 말이 ‘질문이 있는 교실’이라는 서울교육지표와 통한다면, ‘민주시민’은 ‘우정 이 있는 학교’라는 서울교육지표와 통한다.

‘우정이 있는 학교’는 교육 활동이 이루어지는 모든 공간에서 서로에 대한 깊은 배려와 따뜻한 어울림이 넘치는 모습으로, 경쟁의식보다는 공동체 의식이 두드러지는 학교, 이기심보다는 타인에 대한 존중과 배려를 우선하는 학교, 차별과 따돌림이 아닌 함께하는 어울림이 있는 학교를 말한다(서울특별시교육청, 2018).

‘우정이 있는 학교’의 모습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바로 ‘평화로운 학교’다. 평화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은 민주시민교육이 지향해야 할 최고의 가치다. 인권이 인간을 중심으로 한 개념이라면, 평화는 인간의 권리를 넘어서는 생명 전체의 권리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모든 생명이 서로를 살리는 관계인 평화는 바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고의 권리다(심성보, 2018). 따라서 이런 평화가 살아 넘치는 학교를 만드는 것이 우리의 책무라면, 세 번째 민주 시민의 인간상으로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을 상정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그런데 평화가 너무도 소중한 가치라는 것은 인정하는데, 어떤 것이 평화이고 어떻게 평화를 만들어가는가에 대해서는 왠지 막막하다. 그런 의미에서 다음과 같은 ‘평화를 보는 눈’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정주진, 2017).

평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평화의 눈으로 세상을 보는 것’이 필요하다. 그 방법은 첫째, ‘희생’에 주목하는 것이다. 무고한 이의 피해와 희생을 줄이는 것, 그렇게 해서 모두가 원하는대로 ‘잘먹고 잘 살 수’있게 하는 것이 평화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두번째는 관계에 주목하는 것이다. 사람들 사이의 상호작용과 그 질에 주목하는 것을 말한다.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폭력을 줄이고 희생당하는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바로 평화다. 희생과 관계에 주목해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르게 보려면 꼭 필요한 것이 바로 ‘평화의 눈’이다.

평화로운 학교를 만들고 지키기 위해서는 평화역량(peace capacity)이 필요하다. 그것은 “인간이 삶을 경험하는 삶의 네 가지 차원(자기 자신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공동체와의 관계, 자연과의 관계)에서 서로를 살리는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평화를 창조하는 능력”을 말한다(박보영, 2009). 서울교육이 추구하는 세 번째 민주시민의 인간상은 바로 이러한 평화역량을 갖춘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민주시민–우정이 있는 학교’의 연계 속에서 네 번째 민주시민의 인간상으로 제시하고 싶은 것은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다.
‘더불어 사는 삶’을 얘기할 때 떠오르는 관념은 공동체다. 공동체란 여러 사람이 평등한 상태로 무엇인가를 함께 하는 집단이다. 구성원들이 열린 마음으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이 공동체의 바람직한 모습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내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존재한다는 것이 아니라, 함께 움직이는 역동적 존재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단순히 ‘함께 있는(竝存, being together)’존재가 아니라, ‘어울려 함께 나아가는(相生, becoming together)’ 존재라고 할 수 있다(조용환, 2001).

따라서 ‘어울려 함께 나아가는 사람’을 기르기 위한 교육적 노력이 필요하다. 이는 오늘날 우리 교육에서 절실하게 요구되는 과제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해 우리 사회에서는 서로 다른 목소리가 있다. 소위 ‘인성교육’과 ‘민주시민교육’을 대립적 관점으로 보는 시각이 다. 그러나 ‘인간적 성숙’을 위한 ‘인성교육’과 ‘정치적 성숙’을 위한 ‘민주시민교육’이 대립되어서는 안 된다. 인성교육이 보수의 전유물일 수 없고, 민주시민교육이 진보의 전유물일 수도 없다. 우리는 사람도 되어야 하고 시민도 되어야 한다(심성보, 2018).

아렌트(H. Arendt)는 『인간의 조건』서문에서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움직이며 행위하는 복수의 인간들은 자신과 타인에게 말을 건네고 이해할 수 있는 경우에만 의미 있음을 경험할 수 있다.”고 쓰고 있다. 서울교육이 추구하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란 이렇게 ‘타인과의 소통과 이해 속에서 존재의미를 찾는 사람’이며, 또한 “인간의 삶을 소외시키는 사회 문제를 협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우리 사회를 염려하는 시민”이기도 하다(성열관, 2018).

서울학교를 민주주의의 정원으로,
서울학생을 민주주의의 정원사로

학생들을 ‘창의적 민주시민’으로 기르기 위해서는 그 토대인 우리 사회가 제대로 된 민주주의 사회인가를 되돌아보아야 한다. 우리가 가꾸고자 하는 민주주의 모습과 방법에 대한 지속적인 자기성찰이 있어야 한다. 이러한 자기성찰을 위한 점검표로 『민주주의 정원(The Gardens of Democracy)』이란 책을 권한다(E. Liu & N. Hanauer, 김문주 옮김, 2018).

이 책에서는 민주주의를 정원에 비유한다. 정원에는 정원사가 필요하다. 즉, 씨를 뿌리고 김을 매고 시민 권력의 생태계를 가꾸어 나감으로써 소수가 아닌 다수에게 이익을 안기려는 의지와 능력을 가진 시민들 말이다. 훌륭한 정원사는 절대 ‘자연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의 정원에 대해 책임을 진다.

저자는 오늘날 민주주의의 위기를 보면서, 우리가 오랫동안 가져왔던 ‘기계형 지성(Ma- chinebrain)’을 버리고 ‘정원형 지성(Gardenbrain)’을 요구한다. 기계형 지성이 이 세계와 민주주의를 시계와 톱니바퀴, 균형과 평형력 등으로 설명 가능한 일련의 기계장치로 본다면, 정원형 지성은 이 세계와 민주주의를 얽히고 설킨 하나의 생태계로 본다. 기계형 지성은 이 세계의 안정성과 예측성을 전제로 한다면, 정원형 지성은 이 세계의 불안정성과 예측불가능성을 가정한다. 기계형 지성이 사람들을 톱니바퀴를 구성하는 톱니라고 생각한다면, 정원형 지성은 사람들을 역동적인 세계를 구성하는 독립적인 창조자로 본다.

저자는 정원만 만들어 놓으면 자동적으로 정원이 아름답게 꾸며진다는 기계론적 사고를 버리고, 정원을 늘 관리하고 보살피는 정원사의 자세로 민주주의를 바라보고 가꿔야 한다고 요구하고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정원이라는 입장에서 지금까지 제시한 서울교육이 추구하는 창의적 민주시민의 구체적 인간상은 어떻게 비유될 수 있을까?

‘오늘을 질문하는 사람’은 지금 집 앞의 정원을 심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다. 정원을 멋지고 아름답게 꾸미고 싶은데, 현재 모습은 왠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꿈꾸던 정원은 이런 모습이 아니었는데, 어디에 문제가 있는 것일까? 내가 새롭게 꾸며볼 수 있을까?

‘세계를 설계하는 사람’은 질문으로 그치지 않고, 새로운 정원을 꾸미기로 마음먹고 그 모습을 그려보는 사람이다. 남의 집 정원도 둘러보면서 나만의 정원을 설계한다. 이 과정에서 최종 설계의 모습이 내가 처음에 가졌던 모습과 달라질 수도 있다.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은 정원을 가꿔가는 정원사의 자세를 말한다. 정원사는 ‘평화의 눈’으로 정원을 가꿔야 한다. 정원사만의 눈을 호강시키기 위해서가 아니라, 정원의 화초와 나무들 이서로 희생되지않고 각자의 삶과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도록하기 위해서다.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란 화초 및 나무들이 인간의 삶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인간과 함께 공존하는 존재임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나 그리고 인간 중심적 관점을 벗어나 그들도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생명의 주체로서 인정해주어야 한다. 더불어 살아가는 존재를 위한 윤리적 지평을 넓혀야 한다.

서울교육이 추구하는 창의적 민주시민의 구체적 인간상으로 제시한 오늘을 질문하는 사람, 세계를 설계하는 사람, 평화를 사랑하는 사람,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이란 곧,  ‘평화로운 민주주의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다. 학교 교육을 통해 이런 정원사를 길러야 한다. 그런데 “어느 동네의 구식학교에 묶여있는 15세소년에게 지금 내가 해줄 수 있는 최선의 조언은 이것이다. ‘어른들에게 너무 의존하지 말라.’”(Harari, Y,N. 2018)는 경고를 보면, 과연 학교가 제대로 된 정원사를 길러낼 수 있는지 걱정되기도 한다.
학생들을 민주주의의 정원사로 길러내기 위해서는 학생들을 ‘미래의 시민’뿐만 아니라 ‘현재의 시민’으로 대우해야 하고(심성보, 2011), 학생들이 실질적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자력화(empowerment)도 필요하다(한국교육네트워크, 2018). 무엇보다도 학교가 평화로운 민주주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 내가 창의적 민주시민의 인간상으로 ‘민주주의의 정원을 가꾸는 정원사’ 앞에 ‘평화로운’이라는 수식어를 붙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원래 ‘포용’의 수단이었던 민주주의가 이해관계로 인해 ‘배제’의 수단이 되어가면서 이 세상 의 평화도 무너지고 있다. 민주주의자 없는 민주주의가 공허한 것처럼, 평화를 사랑하는 정원 사가 없는 민주주의의 정원은 황량하다.

서울 학교가 야생의 세렝게티가 아닌 상생의 정원이 되길……. 그리고 서울 학생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정원사가 되길…….

참고문헌
강남순(2017), 배움에 관하여 : 비판적 성찰의 일상화, 동녘.
김현섭(2015), 질문이 살아있는 수업, 한국협동학습센터.
박보영(2009), 평화역량 강화를 위한 교육 방안의 탐색, 교육사상연구 23(1). 서울특별시교육청(2018), 2018 서울교육방향 및 해설.
성열관(2018), 수업 시간에 자는 아이들, 학이시습.
심성보(2011), 인간과 사회의 진보를 위한 민주시민교육, 살림터. 심성보(2018), 한국 교육의 현실과 전망, 살림터.
유동걸(2015), 질문이 있는 교실, 한결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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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환(2001), 문화와 교육의 갈등-상생관계, 교육인류학연구 4(2). 한국교육연구네트워크 엮음(2018), 학교혁명, 살림터.
Arendt, H. 이진우 옮김(2017), 인간의 조건, 한길사.
Harari, Y.N. 전병근 옮김(2018), 21세기를 위한 21가지 제언, 김영사.
Liu, E. & Hanauer, N. 김문주 옮김(2017), 민주주의의 정원, 웅진지식하우스. Rancière, J. 양창렬 옮김(2008), 무지한 스승, 궁리.
Reimer, E, 김석원 옮김(1982), 학교는 죽었다, 한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