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선 (도선고등학교, 교사)

#1

중1 HR시간, ‘양서를 읽자’가 주제인 학급회의에서 우리는 ‘양서(良書)’를 해독하지 못했다. 아니 조금 다르게 해석했다. 피천득의 ‘인연’을 배운 직후였다. 아사코가 나오는 국민 수필에는 ‘새로운 양서(洋書) 냄새…….’ 라는 구절이 있어서 양서가 서양책이라고 다들 이해하고 있었다. 회의를 하면서도 주제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선택할 권한은 우리에게 없었다. 회의 주제는 ‘위에서 내려오는 것이므로’ 우리는 군말없이 회의나 하면 되었다. 그때 우리 반이 정한 실천사항 중에는 ‘양서를 읽을 게 아니라 우리나라 책을 먼저 읽자.’라는 것도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코미디 같다.

#2

고1 때 임승○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190이 넘는 키에 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었다. ‘키 큰 사람이 싱겁다.’는 말은 그 친구한테서 정당성을 얻었다. 친구들은 그를 짐승○이라 불렀다. ‘학습 분위기를 바르게 하자.’는 주제의 학급회의에서 그는 큰 눈을 희번덕거리며 “좋은 생각이 있습니다. 교실 뒤쪽에 셰퍼트를 기르는 겁니다. 그래서 떠드는 학생들을 물게 하는 겁니다.” 라고 신이 나서 의견을 냈다. 주변 친구들이 킥킥거리기 시작했다. 승○이가 흰소리를 하면 어김없이 정의의 사도 용○이가 나섰다. “야 너 헛소리 집어치워!” 흡사 어느 개그 프로에 나왔던 봉숭아학당의 한 장면 같았다.

#3

고1 때 반장 선거에서 떨어진 후 나는 오히려 떨어진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옆에 서 보니 반장이라는 게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고 딱히 권위도 없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 고2 반장 선거에서는 입후보도 하지 않았는데 누가 추천을 하더니 소견발표에서 사퇴하겠다고 했는데도 당선이 되어 버렸다. 만만한 놈 반장 만들어 학급에서 자기들 맘대로 하겠다는 심보였다. 그런 가운데 제일 싫었던 시간이 HR이었다. 회의할 때 친구들은 도통 집중을 안 하고 떠들기만 했다. 집중을 안 하니 유의미한 의견이 나오지 않았고 약간의 소란과 침묵이 계속 교차하는 시간이었다. 교탁 앞에 서 있으면 등에 땀이 삐질삐질 나왔다. 악몽 같던 1학기가 끝나고 고대하던 2학기 반장 선거가 찾아왔다. ‘드디어 내가 이 굴레를 벗어나는구나!’ 밑으로부터 솟아오르는 희열을 감추기 힘들었다. 그때 사람 좋은 담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자 2학기 반장을 뽑아야 하는데, 어때요? 우리 1학기 반장이 참 잘했지요?” “네!”(저런 사악한 놈들), “그럼 우리 굳이 2학기 반장을 뽑지 말고 1학기 반장이 계속반장을 하는 게 어떨까요?”, “네!”(저런 극악한 놈들!!!)

HR이란 게 있었다. HR이 homeroom의 약자라는 것을 한참 뒤에 알았지만 뜻은 몰라도 무슨 시간인지는 알았다. 시간표에 너무 선명하게 CA와 모종의 경쟁관계가 있는것처럼 영문자로 적혀있던 시간! 그 HR 시간에는 항상 학급회의를 했다. ‘면학 분위기를 만들자.’, ‘호국영령에게 감사하자.’와 같이 ‘답정너’인 주제가 정해져 학급에 전달되고 이 주제로 모든 반이 회의한다는 것이 말도 안 되는 이야기지만 그땐 그랬다. 사실, 학급회의 내용이 썩 훌륭하진 않았다. 주제가 내 피부에 와 닿지 않으니 뜬구름 잡는 얘기만 나올 수밖에 없었고 학생들은 회의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때 담임 선생님들은 무얼 하셨을까? 왜 학급회의가 산으로 가는 걸 두고 보셨을까? 잘 기억나진 않지만 교실에 안 계셨던 것 같다.

그래도 HR은 매주 정해진 대로 진행됐다. 회의가 코미디 프로의 ‘봉숭아 학당’ 같고, ‘침묵의 바다’가 되든 우리는 매주 정해진 주제에 따라 회의를 했다. 하다 보니 반장을 ‘의장’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과 나머지 반 아이들을 ‘의원’이라고 불러야 한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반장들끼리 모여 대의원회의라는 것을 한다는 것도 알았다. 그러나 대의원회의 결과가 학급에 잘 전달되지는 않았다. 그건 아마 반장 잘못도 있겠지만, 그 결과에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의원’들 탓도 있을 것이다. 더 근본적으로는 대의원회의 결과가 내 삶에 큰 영향이 없어서였다. 어차피 뻔한 주제로 뻔한 결과가 나온 거니까.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HR은 민주 시민의 태도를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는 아주 훌륭한 제도였다. 매주 학급회의를 하고 그 의견을 모아 매월 대의원들이 회의를 했다면, 그리고 회의 안건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었다면, 회의 결과가 효용이 있다고 느꼈다면, 그리고 담임 선생님의 약간의 지도가 있었다면, 우리는 민주 시민이 될 수 있는 교육을 제대로 받았다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가? 학생자치 영역에서 어떤 부분은 많이 발전했고, 어떤 부분은 퇴보했다. 서울특별시교육청은 조희연 교육감 취임 이후 지속적으로 학생자치활성화를 위해 힘을 쏟고 있다. 학생참여예산도 200만원씩 지급해 더 이상 예산 문제 때문에 학생자치가 활성화되지 못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혁신교육이 확산되고 민주적인 학교자치에 대한 감수성도 높아지면서 학교마다 차이가 있겠으나 학생회가 학교의 주체로 점차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또한 더 이상 학급회의 주제를 위에서 ‘하사’하지도 않고 도덕책에 나오는 실천사항을 강요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학급회의 시간 확보는 오히려 30년 전보다도 못하다. 왜 그럴까? 학교마다 자율활동 시간을 주당 1시간씩 배정하고 그 시간을 통해 다양한 활동을 한다고 계획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시간에 할 게 너무 많다. 안전교육, 성폭력예방교육, 성교육, 금연교육, 학교폭력예방교육, 아동학대 예방교육 등 세상이 흉흉해지면서 학교 교육활동을 통해 의무적으로 해야 할 것도 점점 늘었기 때문이다. 물론 필요한 교육들이다. 그러나 그 교육들로 인해 의무 조항이 없는 학급회의가 점차 우선 순위에서 밀리고 있다.
이러한 학교 상황에서 학급자치를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학교장의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 필자가 학생참여위원회 강의나 컨설팅 장학을 나갈 때는 꼭 ‘학급회의는 얼마나 자주 하시나요?’를 물어본다. 대체로 평균 월 1회였으나 한 학기에 한 번, 1년간 한 번도 한 적이 없다는 대답이 나오기도 한다. 교육청 권고는 격주 1회 이상이지만 ‘권고’는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게다가 격주 1회 형식적으로 학생자치 시간을 확보하고도 실제 운영에서는 다르게 하는 경우도 많다. 반면 격주 1회 또는 주 1회 고정적인 시간을 정해놓고 학급자치를 내실있게 진행하는 학교도 꽤 있다. 학급회의를 통해 나온 다양한 의견들을 대의원회의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가다듬고 이를 학교장과의 간담회를 통해 가시적으로 학생들의 의견을 실현시키는 경우도 증가하고 있다. 그렇다면 하려면 할 수 있다는 얘기다. 학교의 관리자가 학급자치의 중요성을 알고 학생들의 열띤 토론을 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해 준다면 말이다.
학급회의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될까? 굳이 학급회의 많이 하지 않아도 학생회가 잘 운영되고 있는데? 학생자치활동 우수사례집을 보면 학생회 임원 중심의 이벤트성 사업이 사례의 절대다수를 차지한다. 그러나 이것은 학생자치의 핵심 목표는 아니다. 학급자치활성화의 핵심 목표는 ‘학급회의–대의원회의’를 거쳐 사업을 결정하고, 이를 학생이 주체가 되어 기획·운영하는 가운데 학생들이 학교활동 참여에 대한 효능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학교의 주체로 인식할 수 있게 된다. 비유하자면 풀뿌리 민주주의라 할 수 있겠다. 어렵겠지만 학급회의를 조금 더 많이 했으면 좋겠다.